(이 글은 3월에 작성된 글입니다. 최근 일본은 유엔의 ‘위안부 합의’ 수정 권고에 대해 자신들과 무관하니 따를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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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깊고도 복잡한 역사를 가진 도시다. 높은 유리건물들이 즐비한 화려하고 발전된 도시 같아 보여도 바로 옆 골목길로 들어서면 수십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옛부터 서울의 중심지였던 중구 일대는 수많은 문화와 역사가 혼재된 아름다운 곳이다. 그렇게 오랜 중구의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깊고 선명한 흉터를 남긴 시절이 바로 일제 강점기다. 광화문 ‘소녀상’부터 남산 위안부 ‘기억의 터’까지, 우리의 아픈 역사를 따라 산책을 떠나보았다.IMG_9882

소녀는 혼자가 아니다

여행의 시작은 광화문 소녀상이다. 광화문의 오른편에는 일본 대사관이 있다. 그리고 그 맞은 편에 소녀상이 앉아있다. 울지도, 화내지도 않는 차분한 시선이 주위를 더욱 경건하게 만든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소녀상을 찾아왔다. 학생들 몇 명이 소녀상 앞에 꽃을 두고 가기도 했다. 소녀상의 뒷편에는 서명용지와 모금함이 놓여있었다. 다음 목적지인 인사동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노란 텐트가 눈에 들어왔다.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모인 대학생들이 지내는 텐트라고 한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보내는 따뜻한 손길에 꽃샘추위도 한 풀 꺾이는 듯 하다.

민간문화재 유출의 항구, 인사동

한국의 전통 문화를 느껴보고 싶은 외국 관광객이라면 꼭 들르는 곳이 바로 인사동이다. 이 날도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이 인사동을 채우고 있었다. 오래된 화방들과 찻집들, 골목에 숨은 골동품들은 인사동을 찾은 사람들에게 한국적인 멋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에서 은은히 들리는 퉁소와 북 소리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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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평화로운 인사동 또한 아픈 역사를 피해갈 순 없었다. 조선 시대부터 인사동은 그림을 관리하던 관청인 도화원이 설치되어 문화상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을 점령한 일본인들은 인사동의 미술상, 서점 등에서 한국의 문화재를 구입해 일본으로 빼돌렸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민간유물이 일본으로 유출되던 첫 번째 항구가 바로 인사동인 것이다.

인사동은 그런 상처를 딛고 일어나 현재는 훌륭한 문화관광거리가 되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맛있는 길거리 음식들을 먹고 여러 볼거리들을 구경하며 걷다보면 어느새 인사동 거리의 끝에 다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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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시작된 곳, 탑골공원

인사동의 끝자락에는 자그마한 공원이 하나 있다. 공원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라는 큰 탑이 자리잡고 있다. 이 탑이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 바로 탑골공원이다.

지금은 비둘기와 바둑 두는 어르신들로 유명한 작고 한산한 공원이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최초의 도심 공원으로 우리의 역사를 말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919년,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3.1 운동을 시작한 곳이 바로 탑골공원이다. 공원 정문 옆에는 역사를 기리기 위해 벽화와 동상이 서있다.

역사와 함께 흐르는 개천

종로에서 우리의 목적지인 남산을 향해 걷다 보면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개울이 흐른다. 바로 청계천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콘크리트로 덮이고 다시 복개된 한 많은 하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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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은 조선시대에는 특별한 명칭 없이 개천이라고 불렀다. 사대문 내에 유일한 개천이라 딱히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청계천이란 이름은 일제 강점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청계천의 북쪽으로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활동하던 종로거리가 있고 남쪽으로는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명동거리가 있다. 청계천이라는 개천은 한양의 북촌과 남촌을 나눌 뿐 아니라 우리 민족과 일본인을 나누던 경계였다.

 

강점기 일본인들의 거주지 명동

청계천을 지나쳐 오면 명동성당이 보인다. 명동성당이 위치한 명동거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번화가이다. 수 많은 쇼핑몰들과 음식점, 즐길 거리들이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을 맞이 한다. 외국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좋아하고 즐겨 찾는 곳이지만 그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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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은 일제 강점기에 명치라고 불렸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메이지 일왕의 한국식 발음이 명치다. 조선시대의 이름은 남촌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곳에 자리를 잡으며 일왕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바꾼 것이다. 현재 이름인 명동은 그 이름을 바꿔 사용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을 수탈한 돈으로 유흥시설을 짓고 발전시킨 거리가 서울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되고 국내외의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거리가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아린 기억 앞에 서서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인 남산에 도착했다. 남산은 산 위에 위치한 남산타워와 함께 오랜 시간 동안 서울의 상징물이었다. 위안부 기억의 터는 그 남산의 북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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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에서 길을 건너 남산으로 향하면 바로 위안부 기억의 터가 있다. 지난 2016년 8월 29일 열린 기억의 터는 일제 강점기에 고통받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억의 터가 세워진 장소 또한 굉장히 의미 깊은데, 이곳이 바로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통감관저터다.

기억의 터는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과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이름이 새겨진 대지의 눈, 을사늑약으로 남작 작위를 받은 일본인을 기리는 판석을 거꾸로 세워놓은 통감관저터 비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 세상의 배꼽과 기억의 터를 만든 사람들 네 곳으로 구성되어있다. 각 장소에 서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과 우리 민족의 역사를 마주하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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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눈을 위에서 바라보면 이름 그대로 눈 모양이 보인다. 눈동자 안에 서면 할머니들의 아픔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과 할머니들의 증언, 이름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무게감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대지의 눈 옆에 있는 얼핏보면 큰 돌을 세워놓은 것처럼 보이는 비석이 통감관저터 비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이다.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꼭 한번 자세히 설명을 읽어보자. 이 비석은 무엇인지, 어째서 거꾸로 세워놓은 것인지 알 수 있다.

세상의 배꼽 가운데에는 크고 평평한 돌이 놓여있다. 아마도 이 돌이 세상의 배꼽이 아닐까? 돌에는 손모양의 그림과 함께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아픈 기억이 있고 그 아픈 기억을 기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의 터 끝에는 기억의 터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 분들의 이름이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면 마음 가는 곳을 조금 더 둘러보자. 처음 지나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기억의 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산 중턱에 자그마한 공터가 나온다. 이 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바로 아래에 있는 기억의 터부터 지나왔던 길들이 한 눈에 보인다. 서울 어느 골목에, 우리 민족의 가슴 어느 한 구석에 아픔이 새겨지지 않은 곳이 있을까. 그 아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흉터를 안아주기 위해 이번 주말은 기억의 터에 올라보는 것은 어떨까?

 

글 / 존잭킴
사진 / 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