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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인 기자는 살인사건을 파헤치고 있다. 그러다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일어난다. 앞서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하지만 기자는 수사에 도움이 될 정보를 경찰에게 넘기지 않는다. 정보를 독점해야, 경찰보다 앞서 나가야 특종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국장과 기자들이 이런저런 추리를 하는 사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이 살해당한다. 가정이다. 기자가 경찰에 자료를 넘겼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수사에 진척이 있었을 테고, 어쩌면 경찰이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조치를 취했을 수도 있다. 사람이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가정이다.

 기자인 내가 정유라의 은신처를 발견했다면? 나는 공적 사안을 공중에게 알려야 한다는 직업윤리에 충실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일생일대의 특종을 누가 발로 걷어찬단 말인가. 기사를 만들어 한국에 보냈고, 그 날 저녁 TV에는 정유라가 어디에 숨어있는지가 알려진다. 하지만 이 보도를 보고 한국 경찰이 덴마크에 협조를 요청하는 사이 정유라가 도망친다면? 덴마크 경찰과 공조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몇날 며칠을 죽치고 앉아 감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유라와 같이 있는 남성들이 돕는다면 촬영기자와 취재기자만으로는 막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다시 잠적한다면 특검 수사에도 차질이 생길 테고,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경찰에 신고를 먼저 하고 취재했어야지,
단독에 눈 먼 기레기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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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는 그 상황에서 최선을 선택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기사는 포기 못한다. 그렇다고 한 나라를 뒤흔드는 권력형 비리에 연루된 사람을 도망치게 둘 수도 없다. 절충점을 찾은 게 경찰에 신고하고 그 과정을 찍은 것이다. 마치 제3자의 신고로 정유라가 체포됐다고 보도하는 것보다, 기자가 신고해 체포됐다고 투명하게 밝힌 게 훨씬 낫다. 시청률이라는 이해관계가 있지 않았냐고? 언론사 기자가 쓴 기사로 시청률과 클릭 수, 판매부수가 올라가는 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치면 월급 받고 기사 쓰는 것도 문제가 된다.

증권가 출입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얻은 정보로 특정 기업 주식을 잔뜩 사두거나, 자신이 주식을 보유한 기업의 홍보 기사를 쓰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건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얻은 정보로 사적 이득을 부당하게 챙기는 행위다. 지난 해 퓰리처상을 받은 AP 기자들도 노예 노동을 취재하다 당국에 정보를 건넸다. 경찰이 와서 노동자들이 구출되는 장면을 영상으로 찍었고 구출된 노동자들을 취재해 기사로 썼다. 이것도 기자가 현장에 개입해 사건을 만들어서 기사화 했으니 문제인 건가? 기자들이 퓰리처상이라는 이해관계 때문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를 어긴가? 사안에 개입하지 않은 채 보도만 하고 노동자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을 내버려둬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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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내가 JTBC 리포트에서 걸리는 지점은 이런 거였다. 정유라가 체포되는 장면. 그가 덴마크 경찰에 끌려 경찰차로 호송되는 과정을 보여줘도 되는가? 이 장면은 피의자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영상이 아닌가? 방송기사는 글과 달라서 어떤 영상을 쓰는지를 더 주의깊게 봐야 한다고 배웠다. 이 영상은 보도 윤리에 위배되지 않는가? 정유라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아서 상관없는가? 정유라의 여권 사진을 보여주는 것은 괜찮은가? 이 장면들은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었나? 1)영상이 반복되는 걸 보면 쓸 만한 영상을 못 건진 것 같다. 아마 집 안에 들어가서 찍고 싶었겠지만 경찰이 제지하지 않았을까? 윤리를 생각한다면 방송에 나오는 사람의 인권에 관한 윤리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고 본다.  

 

이건 다른 얘기다.

 좋은 기자란 뭔지, 기자의 관찰자 역할이란 뭔지 쭉 생각해왔다. 2012년 이후 나는 집회에 ‘참여’한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관찰’을 위해 집회 장소에 머물렀다. 사람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늘어서 있는가? 어떤 깃발이 보이는가? 행진 경로가 어떻게 되고 어떤 구호를 외치는가? 기자를 꿈꾼 뒤부터 시민의 정체성보다 기자의 정체성을 더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울컥할 때면 속으로 ‘나는 관찰자다’라고 되뇌었다. 좋은 기사를 쓰려면 사안과 거리를 두는 객관성과 냉정함이 필요하니 훈련을 미리미리 해놔야지.   

 그래서 나는 기자와 다른 걸 겸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경멸하고 증오했다. 저런 사람들 때문에 기레기 소리 듣게 되는 거라고. 내가 만일 어떤 집단에 속했을 때 그 곳과 거리를 둘 수 있는가? 객관을 유지한 채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는가? 내가 속한 단체에서 나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이 사건을 제대로 보도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내가 다니는 대학 상황이 엄혹하더라도 다른 단체들과 함께 하지 않았고, 공동행동을 하자는 제안과 돈 주겠다는 제안들도 족족 거절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더 나아지길 바라지만 내 방식대로 기여하겠다. 그러려면 나는 보도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   

  이 생각이 흔들렸던 건 2014년 밀양에 취재 차 농활을 갔던 때다. 취재와 연대. 상반되는 목적을 두고 혼란스러웠다. 농활과 취재를 요구한 언론사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결론을 내렸다. 그래, 연대하자. 다만 좋은 기사를 쓰는 것만이 내가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니, 좋은 기사를 쓰자. 이것도 쉬지 않았다. 좋은 기사를 쓰려면 좋은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들에게서 얻을 것인가? 밀양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 편이다’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정보를 얻어낼 것인가? 오히려 이건 취재원을 속이는 행위 아닌가? 그리고 그런 말과 행동은 관찰자에서 벗어난 게 아닌가? 나는 어정쩡하게 굴었고 그리 썩 좋은 기사를 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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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사이 대학원도 가고 인턴도 하고 왔다. 때가 묻었는지 지금 다시 밀양으로 취재하러 간다면 고민하지 않고 밀양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슨 말이든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좋은 기사를 쓸 수만 있다면. 사안의 맥락, 진실을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것이다. 관찰자의 역할을 잠깐 포기하는 대가로 관찰자의 역량을 잘 발휘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 전에도 인용한 톰 울프의 말이다.

 

“기자는 대답해 주리라 기대할 하등의 권리가 없는 질문을 던지는 등 누군가의 프라이버시에 자신이 당연한 권리를 가진 듯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 그리고 그러기 무섭게 떡하니 컵 하나를 내놓고 구걸하다시피 한다. 무슨 정보가 안 떨어지나, 무슨 일이 안 일어나나 오매불망 기다리며, 원하는 것을 얻어 낼 때까지 제발 쫓겨나지 않기를 바란다.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된다. 환심을 사려고 듣기 좋은 소리를 하고, 모든 일을 다 해줄 것처럼 알랑거린다. 필요하다 싶으면 무엇이든 할 기세다. ‘스토리’에 대한 지극한 일념 하나로 조롱, 모욕, 심지어 폭행도 참는다. 굴욕스러운 구걸 행위다.”

이보시오 언론사 양반들. 나는 개처럼 일할 준비가 되어 있소. 그러니 나를 어서 취직시켜주시오. 요즘은 어떤 사람과 무슨 대화로 주제를 하든 기승전취직으로 대화가 끝난다. 글도 그렇다.

글/ 메미
편집 및 교정/ 이점

 

   [ + ]

1. 영상이 반복되는 걸 보면 쓸 만한 영상을 못 건진 것 같다. 아마 집 안에 들어가서 찍고 싶었겠지만 경찰이 제지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