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껍데기는 가라

– 시국선언을 추진한 고려대 총학생회에 대한 탄핵안 상정 사태를 맞이하여

각종 시민단체, 전국 대학 학생회에서 시국선언 물결이 들불처럼 퍼져가는 동안에, 고려대학교에서는 준비되었던 시국선언 발표가 취소되고, 시국선언을 이끌었던 총학생회장단에 대한 탄핵안이 상정되어 전학대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다음 사진은 총학생회장단에 대한 탄핵안 발의문이다. 부디 놀라지 마시라. 이 조잡하기 그지없고 심지어 곳곳에서 맞춤법을 어긴데다 논리마저 조악하기 그지없는 천박한 글이 800여 명(+ 알파)의 연서명을 받아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튼 저걸 논리라고 할 수 있다면, 총학생회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난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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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시국선언이 늦었다는 것.

헛소리다.
고대총학은 최순실 사건에 대한 대통령의 졸속한 사과문이 발표된 25일에서 딱 24시간이 지난 26일 오후 3시에 시국선언을 예고했다. 시국선언문 낭독은 27일에 있을 예정이었다. 서강대, 이대 등 26일 시국선언을 결행한 몇 개의 대학 학생회들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추세에서 예정대로였다면 고대총학의 계획은 전혀 늦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신속한 편이었다.

둘째,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에 다른 주제를 ‘끼워넣’었다는 것.

그 다른 주제는 다름 아니라 백남기 어르신 물대포 사망 사건이다. 고대총학은 시국선언의 캐치프라이즈로 ‘백남기는 죽이고, 최순실은 살렸다’를 내건 바 있는데, 총학을 비난하는 자들의 주장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사안을 왜 엮느냐, 혹은 백남기 사건을 왜 ‘끼워넣기’ 하느냐, 이런 게 되겠다.

어이가 없어서 사지의 모든 혈자리가 막혀버릴 것 같다. 잠시 숨을 고르고.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의 각종 실정은 외면하고 최순실 사건에 대한 책임만 묻자는 말인가. 그러면 이렇게 답하겠지. 백남기 사건이야 설왕설래가 계속되는 중이고, 최순실 사건에 대해선 공론이 모인 것 아니냐. 웃기는 소리다. 그건 어떻게 알 수 있는데? 아직까지 박근혜를 지지하는 시민이 15%가 된다고 하는데, 최순실 사건에 대한 규탄이 어떻게 고대생의 공의라고 믿을 수 있는데?

그들은 그들도 모르게 그들이 행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다. 정치는 애초에 거대한 환상이다. 환상 없이 정치는 작동되지 않는다. 고대생 전체의 정치의식을 조사해본 적도 없으면서, 심지어 설문조사 결과도 없으면서, 최순실 사건 규탄은 공의라고 믿고, 백남기 사건은 공의가 아니, 라고 주장한다. 강력한 환상에 시달리는 자들이 다른 환상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가 토론해야할 것은 최순실 사건에 다른 사건을 ‘끼워넣기’ 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끼워넣기’할 것이냐, 바로 그것이다. 마치, 탄핵안을 주장하는 이들이, 탄핵의 근거로 디럭스 사건(저게 무슨 사건인 줄은 모르겠다만) 등등을 곁가지로 ‘끼워넣기’ 했듯이. 우리는 정부여당의 책임을 묻는 중이다. 우리는 무엇을, 왜, 책임 묻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최순실 사건은 왜 ‘끼워넣기’ 했나. 최순실 사건이 100%의 지지를 받는 공의인 줄도 모르면서, 그것을 공의라고 믿고, 시국선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순실이 우리를 농단하고, 박근혜가 우리를 기만했기 때문 아닌가? 책임을 지지 않는 자가 암막 뒤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 (실제로 그 이중통치가 내놓은 결과물들이 재앙수준이었던 데다가) 우리의 헌법체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기 때문 아닌가?

사진 / 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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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백남기 사건은 왜 ‘끼워넣기’. 하면 안되는가. 백 번 양보에서 백남기씨가 참가한 시위가 불법시위라고 하자. 어떤 법전도 불법을 저지른 시민을 물대포로 때려죽여도 규정해두지 않았다. 불법을 저질렀다고 공권력이 사람을 죽여도 되고, 죽인 다음 일언반구 사과도 없이, 부검의 명목으로 시신을 탈취하는 정부의 권능을 규정해둔 헌법도 없다. 나는 백남기 사망 사건이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보다 중했으면 중했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일이 절대 아니라 생각한다. 여기선 사람이 죽었다.

사실 저들의 속내는 이러할 게다. 최순실 사건이야 누가 봐도 잘못한 거지만(그러니까 불법), 불법 시위를 진압하는 와중에서 사망한 백남기 사건(불법에 대한 합법)을 왜 끼워넣는가. 그러니까 자신들은 불법에 대한 합법적 저항인데, 왜 자신들을 불법과 같은 줄에 세우느냐는 말이 되겠다. 박근혜 정부가 날 때부터 정당성을 상실한 괴뢰정부임이 밝혀진 지금에도 이런 소리가 나온다. 당신들이 불의에 항거해서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 나서는 순간, 당신들은 불법이다. 정부전복음모론자들이고, 좌익용공분자고, 정북세력이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행범이다. 그리고 당신은 죽어도 된다. 자, 이제 어찌할 건가. 어찌할 거냐고. 6월 항쟁의 구호는 ‘독재 타도, 호헌 철폐’이기도 했으나, ‘한열이를 살려내라’이기도 했다. 백남기와 이한열은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다만 알겠다. 6월 항쟁의 대오와 당신들은 무척 다르다는 것을.

셋째, 총학생회의 이름으로 시국선언을 하면서 통진당 세력을 비롯한 각종 운동권 단체들의 연서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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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그래, 그건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눈 앞의 타켓에 집중하겠다.

그들이 말한 총학생회의 입장문에 연서한 운동권 단체는 다음과 같다.

정치경제학연구회 수레바퀴, 한국근현대사연구회, 고려대학교 학생행진, 노동자연대 고려대모임, 민중연합당 흙수저당 고려대분회, 고려대 평화나비, 백남기 농민 사건 해결을 위한 고대인 모임, 세월호를 기억하는 고대인 모임.

자. 나는 운동권이 무엇인지, 운동권은 털나고, 머리에 뿔이 난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들이 운동권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내가 운동권인지 아닌지도 정말 모르겠지만, 딱 하나 아는 게 있다. 그들도 고대생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명명백백히 고대생이다. 총학생회에 의견을 제시한답시고 색깔론을 시전하고 있는 ‘애국우익’들이 고려대생인 것처럼, 총학생회의 시국선언에 힘을 싣고 함께 거리로 나갈 준비를 하는 학생들도 고대생이다. 고대생은 고대총학의 입장문에 연서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누가 멋대로 제한하는가. 남의 정치적 자유를 멋대로 제한하고서도 자유, 정의, 진리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과연 당신들이 국면마다 종북몰이, 색깔론으로 국론을 분열시킨 박근혜 정부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순수함의 욕망이 거세게 도사리고 있다. 운동권 혐오, 100% 지지, 모두의 지지를 받는 공의에 대한 집착.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대중독재의 징후다. 대학생답게 순수하게 규탄하자는 말. 이미 정치를 하고 있으면서 정치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지독한 자기부정이다. 모순이다. 그러고보니 어떤 정치인들은 상식에 맞는 정치를 그렇게나 주장해왔다. 100명의 사회에는 최소한 100 개의 상식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는 것처럼.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도, 6·25 전쟁도 상식의 이름으로 벌여졌던 걸 모르는 것처럼. 또, 그러고보니 정치색을 배제하고 세월호에 대한 순수한 추모를 벌이자던 이들이 떠오른다. 세월호 사건의 정치쟁점화를 반대한다던 이들이다. 어떤 정치가 작동해서 세월호가 뒤집어졌고, 어떤 정치가 작동하여 세월호의 승객들을 구할 수 없었으며, 어떤 정치가 작동해야 세월호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데도, 순수한 추모를 주장하던 이들이다. 그러고보니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지들이 정치인인 주제에, 정당한 비판을 정치공세라며 묵살해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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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강력한 바이러스에 시달리다 못해 내성이 생겨버린 것 같다. 그 바이러스의 이름은 정치혐오다. 정치혐오는 곧, 정치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혐오다. 사회혐오는 곧 사회를 구성하는 자기혐오다. 그런데 박근혜-최순실이라는 머리 둘 달린 괴물의 몸통은 무엇인가. 바로 그 바이러스다. 정치혐오다. 괴물을 낳았다는 걸 알아채고서도, 꼴에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 이건가.

작금의 탄핵안 사태는 대학의 명망이 한낱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적확한 근거다. 학벌과 지성이 전혀 관계가 없다는 증거를 찾고 싶은가. 그렇다면 고개를 들어 안암을 보아라. 자유, 정의, 진리 따위는 실종되었고, 박근혜 일당이 심어놓은 반정치와 색깔론의 이데올로기가 횡횡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제한하고, 정의를 거꾸로 세운 뒤, 진리를 숨기는 대중독재의 징후가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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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니야

청년이 희망이고, 대학생이 희망이라고? 아니. 그런 거 없다. ‘어떤’ 청년이 희망이고, ‘어떤’ 대학생이 희망이다. ‘어떤’ 노인이 희망이고, ‘어떤’ 선생이 희망인 것처럼. 여기 청년에 대한 낭만적인 정치적 기대가 존재할 구석은 없다. 기대하지 마라. 이게 청년의 현실이다. 분노한다면, 자유를 찾고 싶다면, 정의를 세우고 싶다면, 진리를 보고 싶다면, 영웅을 기대하지 말고 우리가 나서자. 서로의 모습을 보이자. 그래서 서로와 만나자.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처럼 부끄럼 빛내며 만나자. 각자의 분노를 품고 각자의 사유로 각자가 정치가가 되자. 우리 모두 위대한 정치가가 되어 대연정을 펼치자. 저 무도한 정부여당을 상대로, 우리 안의 정치혐오를 상대로 맞서자. 그래서 결국, 몰아내자. 우리가 거국중립내각의 주인이 되자. 순수함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이제 좀 멋있어지자. 비로소 사월도 알맹이만 남기고 껍데기를 부셔버리자.

글/ 강훈구

편집 및 교정/ 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