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관리자는 쌩먹파나 간장파임을 밝히고 시작합니다1)자고로 편집자는 선소스 후 탕수육의 ‘투먹파’입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탕수육이다. 부먹이냐 찍먹이냐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이 가진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탕수육은 배달시킨 순간부터 볶먹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철가방이란 과정을 거친 뒤 누군가의 집으로 던져진다. 소스와 함께.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라는 경구처럼 탕수육은 집으로 온 순간부터 선택의 기로에 놓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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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탕수육처럼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고 태어났기에 스스로 삶을 선택해야하는 운명에 놓여있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어떻게 탕수육을 먹어야할지 여러 방식으로 논의해왔다. 가위바위보나 동전던지기같이 운에 모든 것을 맡기는 종교적인 경우도 있으며 설득이나 민주주의같은 정치적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쪽을 해봤자 볶먹이 내는 특유의 맛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볶먹이라는 이데아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 ‘볶먹’이라는 진리를 가정하고 그것에 도달하려하며 신을 섬기듯 모든 사고를 이데아의 영역 아래에 두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볶먹’이라는 것에 도달해야만 탕수육의 원본이라 믿으며 배달 온 탕수육은 ‘볶먹’을 복사한 것뿐이란 사고다. 이 같은 사고관은 원본의 오리지널리티(고유성)를 중요시한다. 부먹이 그나마 ‘탕수육에 버무려진 소스’라는 볶먹의 특성에 가깝기에 부먹주의자들은 찍먹주의자들을 고려하지 않고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버린다. 부먹과 찍먹의 논쟁은 부먹이 저지르는 독단에서 온다. 여기서 진지한 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찍먹을 옹호하며 자신의 철학사를 시작한다. 그들은 탕수육과 소스가 분리된 지점이야말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믿는다. 소스가 부어진 탕수육은 소스에 녹아버려 그대로 눅눅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이나 이데아같이 삶의 이치를 가정했을 때 삶이 이데아에 종속당하기에 우리는 운명이라는 굴레에 허덕인다. 누군가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삶이란 신이 내려준 선물이며 우리는 그 자체로 신에게 감사하며 살아야한다는 굴레에서 자유를 찾지 못한다. 신이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해놓았기에 우리는 영생을 소망하며 종교의 윤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종교에서 제시한 윤리관들은 대부분 구시대의 것이며 우리를 옭아맬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릴 가두는 윤리관에서 벗어나 우리의 윤리를 찾아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를 넘어 패러다임이나 코드, 거대담론, 상징계 등 다양한 용어로 변주시킬 수 있다.

하이데거는 ‘신학으로의 철학’이라는 용어로, 니체는 계보학이라는 방법으로 비판했다. 그들 말대로라면 앞서 말한 것들에 물들지 않은 상태, 어떠한 진리도 가정하지 않은 비닐에 싸인 탕수육에서 우리가 어떻게 담론에 물들지 않고 탕수육을 다양한 방법으로 먹는지가 유일한 철학적인 문제라 볼 수 있다. 논지를 발전시키면 우리는 어떻게 탕수육을 먹어야할지 모르기에 탕수육을 먹는 방법에 있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결론이 나온다. 니체는 이를 아모르파티Amor fati2)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경구로 자신이 개척해야하는 선택들을 받아들임으로 우리가 삶을 즐길 수 있다 표현해놓았다.

찍먹이냐 부먹이냐는 논쟁은 인간에게 어떤 자유도 주지 않았다. 간장파나 쌩먹파는 부먹과 찍먹의 싸움에서 이단으로 배제시켜왔다. 부먹이냐 찍먹이냐는 논쟁도 앞서 말한 윤리관처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이분법으로 나눈다. 니체는 삶을 무엇으로도 정의할 수 없다고 믿었듯이 탕수육 논쟁도 무엇으로도 정의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것을 개개인이 어떻게 먹을지는 선택에 맡겨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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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기 전에 말이라도 하던가!

선택들은 무한하다. 탕수육을 어떻게 먹어라 누군가 가정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탕수육을 먹는다. 누군가 취향이 부먹이라며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버리는 순간 진리는 하나로 고정되며 히틀러나 스탈린이 했듯이 전체주의의 폭력을 불러온다. 수많은 선택들이 공존하는 장에서 우리는 무엇이 제일 맛있는지 찾을 수 없다. 알랭 바디우는 이같은 상황을 ‘진리들’이라 칭하며 민주주의의 영역에서 여러 진리는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추구해야할 진리를 ‘공백’이라 말하며, 진리란 공백을 어떻게 메우느냐의 문제라 믿는다. 공백을 메우는 것은 바로 주체들의 투쟁이라 말한다. 이를 탕수육으로 말하자면 탕수육을 어떻게 가장 맛있게 먹느냐의 논쟁은 각자가 투쟁으로 설득해야한다.

바디우는 ‘탕수육은 부먹이다’라는 세계가 부여한 질서에서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방법들로 ‘탕수육을 어떻게 먹어야할지 질문해야한다’고 질문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다시 말하자면 ‘탕수육을 구운 김에 싸서 먹는다.’ 식의 허무맹랑한 논리들은 묵살해야할 목소리가 아니라 ‘탕수육’을 질문하는 문제로 재탄생한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새로운 탕수육의 가능성을 발생할 수 있으며, 우리만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 무작정 모든 것을 용납해야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리보다는 합리적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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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ㅡ지컬처럼 보이지만 이런 말도 결국 폭력을 일으킬 수 있다

간장파가 사회적 약자라며 그들에게 특권을 부여해서도 안 되는 법이며 어떤 방법이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우세에 둬서도 안 된다. 모두가 공론장에 놓여 치고받고 싸우는 ‘사건’들이 진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부먹이냐 찍먹이냐는 논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린 탕수육을 부먹이냐 찍먹이냐 정하지 않고 모두가 공존하는 장에서 모든 합리적인 가능성을 논의해야한다. 탕수육이란 무엇인지 질문이 나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새로운 맛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간장도 조금 먹어보고 다른 선택지 좀 만들어보세요(?)

글/ 개소리플레이어

편집 및 교정/ 이점

 

   [ + ]

1. 자고로 편집자는 선소스 후 탕수육의 ‘투먹파’입니다
2. 네 운명을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