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세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연희관 015B 5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나보다 키는 커야지 말이야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21세기의 성평등주의자로 얼마나 굳게 착각하고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태교 받을 적부터 가부장적인 사회에 아주 자연스럽게 적응해온 ‘모태 가부장주의자’인 나는 내 생각과 생활 구석구석에서 스스로를 계몽시켜야 했다. 나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여자’ 혹은 ‘남자’가 아닌 ‘사람’으로 대하고 마음가짐을 고치는 일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시야를 선물해 주었다. 물론 나는 아직 다 계몽되지 못했다. 내 안에는 아직도 페미니스트와 섹시스트가 공존한다. 그 중 가장 고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나의 ‘이성’이 가장 작동하기 힘든 부분이다. 바로 연애와 섹스. 하악.

‘세계적인 두 명의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와 브루노 마스’, 라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스치는 감상이 있다. (둘 다 서있는 거임)

‘세계적인 두 명의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와 브루노 마스’, 라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스치는 감상이 있다. (둘 다 서있는 거임)

친구: 가지가지야, 남자 소개받을래? 학교는 어디고~ 직장은 어디고~

나: 키 커?

특히 나의 남자 취향은 매우 섹시즘적이고 가부장주의적이다. 돈과 학벌은 아오안(아웃오브안중)이지만 남자다운 체격이 매우 정말 중요하다는 면에서 말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몇몇 남성들의 취향과 비슷하달까. 대략 여자 씹치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가슴 커?’라는 얘기가 그들 입에서 저절로 나오듯 ‘키 커?’라는 말부터 나온다. 아직도 이불킥을 하는 흑역사가 하나 떠오른다. “저는 저보다 키 작은 남자는 싫어요. 남자친구를 내려다보기는 싫거든요. 후훗.” 2년 전 사람들 앞에서 이상형을 밝히는 시간에 내가 한 말이다. 그것도 마치 적절한 유머센스를 발휘하고 있다는 듯이 새침한 말투로 말이다……. (죽고 싶다…심호흡 크게 한 번…)

과거의 나 제발 입 다물어..!!

과거의 나 제발 입 다물어..!!

 정말 정말 창피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몰랐던 시절에도 스스로 취향이 가부장적임을 인지하고 있었나 보다. ‘내려다보기’ 싫다니(심호흡 다시 한 번…). 하늘과 같이 ‘높은’ 남친을 우러러보고 싶었나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까지도 키 작은 남자에게는 이성으로서 호감이 잘, 아니 절대 안 생긴다. 나도 이런 내가 잘못된 걸 알지만, 일평생 알면서도 고치기 힘든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한다.

 분명 내가 사랑에 빠질 때 상대의 인격을 배제하고 그를 성적으로만 대상화하는 것은 아니다(정말입니다). 그러나 성적대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도 힘들다. 우리에게 성애적 사랑은 섹스어필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말이다. 사랑이란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사랑의 발로와 같은 섹스어필은 상당 부분 사회화된다. 가부장주의 사회에서 만들어낸 섹스어필은 남성에게 가부장에 걸맞는 체격을 요구한다. 신체적으로 여자보다 강하고 우월하여 그녀들을 보호하거나 혹은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에 따라 길거리에 존재하는 평범한 커플의 모습은 남자가 더 크고 여자가 더 작은 모습이다. 반대로 여자가 더 크면 그 광경은 바로 낯설며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내가 키가 좀만 컸으면 너한테 고백하는 건데”라는 슬픈 취중진담이 여기저기서 괜히 흘러나오겠는가(본인 입으로 이런 발설하는 게 찌질해보이는 문제는 별개….☆). 이렇듯 ‘키’가 우리에게 주는 제약은 상당하다.

로맨틱한 성 역할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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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써놓으니까 정말 저질이지 않나요? 아 여기서 키 차이는 당근 남성−여성.

이러한 고정된 이미지는 단순히 신체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관념은 신체를 기점으로 하여 우리의 로맨스 판타지 구석구석을 침투한다. 로맨스에 대하여 우리 대부분은 아래 같은 그림을 상상하지 않나? 내가 키 큰 남자를 원하는 건 단순히 보기 좋아서가 아니라 바로 저런 그림들을 연출하고 싶기 때문이다. 걸을 때는 남자가 여자 어깨에 팔을 두르고, 키스할 때는 여자가 발뒤꿈치를 올려 입술을 포개면 남자가 여자의 뒷목을 받쳐주는. 그야말로 흔하디흔한 로맨스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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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생각하면 어떨까. 잠시만 우리 모두 1인칭 시점으로 그 그림을 떠올려보자. 어디서 본 적이 없으니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한다. 키가 큰 여친이 아담한 남친의 어깨에 팔을 편하게 두른다. 같이 얘기를 하다가 그녀가 그를 귀엽다는 듯이 쓰담쓰담하면 그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올려다본다. 그러면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키스하고 그는 점점 발뒤꿈치를 든다…….음…, 그만하자. 영 몰입이 되지 않는다. 이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는 깨닫는다. 이건 로맨스가 아니라 코미디구나! 이건 내가 그동안 습득하온 ‘여성’의 역할이 아니고, 더더구나 저런 남자는 ‘남자답지’못하다. 비로소 사소한 로맨스 감정에서조차 남성의 권위와 능동성이 절대적인 이미지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로맨스를 만드는 고정된 성 역할은 끊임없이 학습된다. 우리가 보는 모든 드라마, 영화, 야동, 심지어 만화까지 저런 그림들로 채워져 있고 이를 본 사람들은 비슷한 현실 세계를 구성한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먼저 접근하는 쪽은 남성이 압도적 다수이고, 교제 혹은 결혼을 위한 프로포즈 역시 마찬가지다. 꼴릴 때 먼저 모텔에 가자고 하는 것도 대개 남자다. 물론 방문을 닫으면 섹스 또한 능수능란하게 리드할 수 있어야 한다. 뭐든지 솔선수범해야 하는 남자들은 상당히 지칠 것이다. 반면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기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여자들 또한 지친다. 좋아해도 먼저 들이대면 별로일 것 같고, 꼴려도 먼저 가자고 하면 밝히는 것 같고, 답답해도 원하는 체위를 마음껏 요구했다간 색마가 될 거 같은 기분에 뭣 하나 마음대로 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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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건 다 미디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잘못된 성 역할이야!” 라고 외치고 나를 곧장 계도시키기는 약간 곤란하다. 유리천장, 성별분업, 가사전담의 부당함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 부당함을 주장할 수 있으나 로맨스는 상상에서 조차 나의 페미니즘적 이성을 정지시킨다. 논리력을 가동시키기 이전에 나의 연애 감정들, 이를테면 ‘호감, 설렘, 흥분 ’ 등은 내가 그동안 습득해온 역할들에 아주 강력하게 접착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범들을 어겼다가는 마치 로맨스가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차라리 SM플레이가 하고 싶다고 하세요.ㅎ 합의된 SM은 누구나 건강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차라리 SM플레이가 하고 싶다고 하세요.ㅎ 합의된 SM은 누구나 건강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러한 접착제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고정된 성 역할이 계속해서 학습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의 로맨스 감정도 다른 메커니즘에서 작동했을 것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남자가 여자를 ‘벽쿵’하는 모습에 많은 국내외 시청자들은 ‘심쿵’한다. 다만 다른 의미로. 많은 국내 수많은 시청자는 그의 함부로 애틋한 모습에 가슴을 설레하지만 해외의 시청자에게 그런 장면은 오직 ‘creepy’ 하다. ‘Korean wrist grab’이 하나의 검색어로 만들어질 정도니. 만약 ‘로맨틱한 감정’들이 ‘자연스럽게’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이런 차이는 발생하지 않았을 테다. 아무리 내밀한 감정이라 할지라도 왜곡된 현실의 진정성을 말해준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편집자가 검색해보았습니다.

편집자가 검색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이 변화하지 않는 한, 부조리를 인식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감정구조를 개조시키기는 어렵다. 내가 이런 글을 쓰면서도 키 작은 남자는 여전히 남자로 안 보이는 것처럼…미디어가 여전히 고정된 이미지들만을 재생산한다면, 사람들 역시 그와 비슷한 눈을 가지고, 비슷한 현실을 구성해갈 수밖에 없다. 위대한 사랑의 힘은 이마저도 이겨내겠지만, 피어나길 바라는 대부분의 사랑은 규범적인 틀에 짓이겨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 사랑인지도 알아보기 이전에 자신의 속물성과 분투해야 하는 시험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편견에서 벗어나 작은 남자를 좋아하게 될지라도, 주변의 시선과 평가질이 그 뜨거운 감정마저 싸늘하게 식힐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 구조가 사회적으로 주조되었다면 앞으로의 감정 구조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미디어에서 키 큰 여자와 키 작은 남자의 로맨스를 일상적으로 보아왔다면, 그들은 우스꽝스럽지 않고 그저 다양한 커플 중 하나로 보였을 테고, 발꿈치 드는 남자의 모습 또한 로맨틱해 보였을 것이다. 키 작은 남자와 키 큰 여자의 로맨스를 아무도 비웃지 못할 만큼 아름답게 그려내는 드라마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이상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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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그런 드라마가 있다. 만화 원작의 일본 하이틴 영화 ‘러브★콤(2006)’은 딱 키 큰 여자아이 고이즈미 리사와 키 작은 남자아이 오오타니 아츠시가 자신의 내면과 주변의 편견을 딛고 사랑을 이루는 내용이다. 리사는 자신보다 키 작은 남자에게 차인 이후로, 오오타니는 자신보다 키 큰 여자에게 차인 이후로 자신에게 ‘어울리는’사람만 만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리사는 유머 코드도, 음식과 음악 취향도 탁탁 들어맞는 오오타니를 점점 좋아하게 된다. 영화는 리사가 오오타니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고 그 사랑을 이루어 가기까지 겪는 고충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면 리사가 오오타니에게 고백을 하려고 준비하는 순간에 들려오는 얘기들처럼 말이다.

학생A: 오오타니 센빠이 완전 카와이하다ㅠㅠ 여자친구 있을까?ㅠ

학생B: 같은 반 리사랑 엄청 친하긴 하던데?

학생A: 에? 리사는 오오타니보다 10센치나 크자나. ‘고목나무에 매미‘라고 개그콤비일 뿐 이래

학생B: 하긴! 자기랑 키 큰 여자랑 사귈 리가 없지!!

리사는 이 같은 난관들에 여러 번 흔들리면서도 자신의 진실 된 마음이 변하지 않음을 깨닫고 결국엔 사랑을 쟁취해 낸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들의 키가 ‘언밸런스’ 함에도 둘이 얼마나 잘 어울리고 사랑스러운지를 느끼게 되고, 이들을 코메디가 아닌 로맨스로 바라보게 된다. 당장에 보는 이가 가지고 있던 감정 구조를 흩뜨리고 전에는 상상해보지 로맨스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쯤 볼만한 영화지만 오글거리는 니뽄풍의 만화적 연출을 견뎌내야 함ㅎㅎ). 하지만 영화는 아쉽게도 이러한 전복적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부분에서 여전히 규범적인 모습을 끌고 가는 ‘전략적 한계’를 지닌다. 가령 오오타니가 ‘키는 작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답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서 리사가 심쿵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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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모든 관습을 뒤엎으면서 기존 관습에 밀착되어있는 로맨스를 끌어내기는 어렵다. 하나의 관습적 가치를 배반할지라도 다른 관습적 가치를 통해, 대중에게 이 변화가 여전히 가치 있는 것임을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관습을 배반하면서도 대중을 설득하는 일은 애초에 한 작품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로맨스 판타지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많은 작품들이 사회적 인식과 소통하면서 기존의 틀을 하나씩 무너뜨려야 한다. 이러한 꾸준한 작업이 이루어질 때 변화의 범주가 점점 확장될 수 있다(가령 성별에 따른 신체-성별에 따른 역할- 성별 자체의 순서로 편견이 깨져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더 많은 탈규범적 작품이 필요하고 일상화되어야 하는 이유다.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표피 따위는 상관없다는 생각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실이 된다면 그때는 굳이 ‘전략적 한계’를 쓸 필요도 없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으로서 사랑하기

“아니 지금 다들 그냥저냥 잘살고 있는데 굳이 사회씩이나 바꿔야 한다고 난리는 난리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거 같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듣는 아주 진부한 말 중에 유명한 하나가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거야.”

라는 너무나도 뻔함과 동시에 이상적이어서 코웃음을 치고 귓잔등을 툭툭 털어버리게 되는 그 말이다. 내가 요즘 나이가 들어가는지 이 말이 정말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새삼스러운 것만큼 진실인 것도 없지 않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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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람이 보여주는 성 역할, 성적 이미지를 좋아한다면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하긴 힘들다. 언제든지 다르게 비춰질 수 있는 부질없는 껍데기 아닌가. 이러한 것들과 상관없이 정말 서로를 그대로 좋아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엄청난 강박에서 벗어나 ‘나 자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인간은 사랑받고 싶어 한다. 지금 그 사랑은 정해진 성적 프레임을 통해서 오가고 있기 때문에 사랑받기 위해선 그 프레임에 자신을 끼워 맞춰야 한다. 화장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깔창을 깔고 어깨에 뽕을 넣는 등의 외적인 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몸짓 하나하나에서부터 시작해서 직업 선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아닌 누군가를 연출해야 한다. 그 누군가를 상대가 사랑해주길 바라면서.

 그러나 이러한 연출마저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여자인데 키가 너무 크거나, 남자인데 키가 너무 작거나, 이성애자가 아니거나, 남자도 여자도 아니거나, 혹은 장애인이거나, 한국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다. 고작 우리가 ‘정상’으로 규정해놓은 껍데기 때문에 이들은 사랑의 무대에서 쉽게 소외되어 버린다. 성기가 사람을 결정하지 않는다면 그 성기에 부여된 역할도 그 사람이 아니고 그 역할에 어울리는 신체 또한 그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규범들에서 벗어난다면, 그리고 아무도 이러한 성 역할에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남자 혹은 여자가 아닌, 우리 모두 같은 사람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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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한가지가지

편집 및 교정/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