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참하는 진리들
-프로불참러 조세호와 진리의 형태

인간은 부재를 사유하는 동물이다. 무언가가 없어졌을 때 부재를 인식하여 빈 자리를 메우려하기 때문에 동물과 차이점을 지닌다. 종교인들은 종교를 마련함으로 빈자리에 신을 채워 넣었고,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으로 공백을 메웠으며, 과학자들은 이성과 실증으로 그 자리를 채워 넣었다. 어떻게 그 자리를 메우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공백을 사유한다는 사실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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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불참러인 조세호는 공백을 사유하는 진리의 전령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부재함으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비꼰다. ‘모르는데 어떻게 가냐’는 조세호의 멘트는 21세기의 진리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 볼 수 있다. 프로불참러의 유행은 우리가 진리라 생각했던 고정관념에 반격을 가하는 예술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불참러 드립은 이 시대의 시한폭탄으로 작용했기에 그만큼 열광적으로 인터넷에 붐이 일었다. 단순히 안재욱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보다는 불참의 이유인 ‘모른다’에 초점이 맞춰져있었기에 우리는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진리마저도 엿볼 수 있다. 진리는 언제나 정상 범주에 불참하는 형식으로 존재하며 우리는 삶의 주체로 거듭남으로 이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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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랭 바디우는 철학을 공백을 사유하는 장소로 열어둠으로, 스스로를 진리로 사유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우리가 사유하는 진리가 허구라 주장해왔다. 그들은 진리가 상대주의의 영역이라며 ‘소피스트’의 철학들을 철학의 장으로 불러왔다. 모든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장소에서야 우리는 진리를 사유할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 결과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의 철학은 여기서 무너져버린다. 철학은 진리를 종식한다고 해서 끝나는 학문이 아닐뿐더러, 철학은 고정관념을 향한 질문이기에 영원할 수밖에 없다. 알랭 바디우는 철학에서 무너져버린 진리를 ‘공백’의 사유라 내세우며 그것이 ‘예술, 수학, 정치, 사랑’라는 네 가지 영역(절차)에서 가능하다며 철학의 진리를 복권시켰다.

바디우의 정치학은 이 공백을 어떻게 사유하느냐의 문제에서 주체의 문제를 논했다. 조세호는 이 주체의 문제를 농담으로 웃어넘기는 자다. 그는 세계의 질서를 비웃음으로 우리에게 공백을 보여주는 자다. 알랭 바디우는 우리 세계를 백과전서적 지식에 둘러싸인 사회라 분석해왔다. 그는 모든 것을 정의함으로 인간을 사전처럼 기록하려는 기존 질서가 진리를 일원적으로 분석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모든 가치를 수치로 부여해왔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연봉이라는 방식으로 일 년에 얼마 짜리 인간인지 평가 받는다. 주민등록번호와 학력 등은 우리의 가능성을 ‘점수’나 ‘출생’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진리가 ‘자본’이라는 기준 아래서만 발생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알랭 바디우는 진리가 다양한 곳에서 오기에 공백이라 논의해왔으며, 그 증거가 바로 앞서 말한 네 가지 범주에서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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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뭐 있는 행사 다 참석하려고 태어난 게 아닌데

철학은 진리를 하나의 기준으로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기준을 받아들여 ‘탈봉합’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 진리는 항상 ‘진리들’이라는 말로 불린다. 조세호의 농담은 그 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던 진리에 직접 질문한다. ‘아는 사람이면 반드시 결혼식에 가야하는가?’, 혹은 ‘결혼’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으로 이어지는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가 그 형태다. 그는 김흥국이 내세우는 백과전서적 지식을 비웃음으로 우리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이는 (산파술로 불려왔던)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질문함으로 우리가 아는 지식이 무지(공백)임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세계가 지식을 강요하는 가운데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란 식으로 대응할 수 있으며, 우리의 주체는 그 자체로 ‘사건’으로 나타난다.

 

굳어져버린 패러다임들은 ‘존재’라 볼 수 있다. 우리 시대의 패러다임은 자본주의라는 이름이며, 그들은 ‘존재’로서 사건을 금지한다. 즉, 존재들은 존속을 목적으로만 존재할 뿐 스스로 죽음을 자처하지 않기에 시스템을 그대로 고정시킨다. 그들은 ‘구성주의적 사고’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그들의 사고를 우리도 모르는 새에 주입함으로 기존 질서를 유지한다. 패러다임은  그들만의 논리를 구성하기에 쉽게 깨기도 어려운 것이며 여기서는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들도 누군가 만든 논리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존재를 끝없이 의심함으로서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는 사실 안재욱을 향한 발언이 아니라, 김흥국이 ‘왜 안 갔냐’라고 말하는 기존 질서를 향한 반항의 발언으로 읽힐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서 온다. 또한 그 모름의 대상이 안재욱일 뿐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진리가 공백임을 드러내는 진술임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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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데 어떻게 가냐고 댓글을 달아보자

바디우에 따르면 주체는 오직 이 시대의 윤리를 심문하는 질문을 반복할 뿐이다. 그는 실제로 이 시대에 주체는 이러한 ‘사건’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진리가 공백임을 알기에 어떤 형태로 다가오는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모르는데 어떻게 가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는데 결혼식을 가라는 사건은 기존 질서가 부조리함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사건’의 존재는 우리를 주체로 보이게 만들며,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하는 장소는 세계를 승화시키는 예술이다. 앞서 우리는 조세호의 발언을 ‘예술’의 영역이라 말했다. 그 이유는 모르는데 어떻게 가냐는 개그로 패러다임의 균열을 승화시킴으로 인터넷 유저들을 납득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자리를 웃음이라는 아름다움으로 채웠기 때문이다. 방송이 탄 지 몇 달 뒤에야 일어난 프로불참러의 유행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모르는데 어떻게 가냐’는 푸념은 공백으로 향해가는 질문으로도 읽힐 수 있다.

 

글/ 개소리 플레이어

편집 및 교정/ 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