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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욱의 《서울 시》가 출간된 지 3년이 훌쩍 지났다. 하상욱의 인기 몰이를 시작으로, 요 몇 년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SNS 기반 작가들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듯 우후죽순 생겨났다. 문학 카르텔의 덕을 보지 못하는 작가들이 SNS를 통해 자기의 글을 알리려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재미로 게시하다 보니 어찌어찌 랜선상 유명세를 탄 사람들도 있다. 속사정이야 어찌됐든, 일단 유명세를 탄 사람은 유력 출판사의 마케팅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할 기회가 생긴다. 그 동안 하상욱의 《서울 시》1·2권과《시 밤》, 김수민의《너에게 하고 싶은 말》, 최대호의 《읽어보시집》《이 시 봐라》등의 책이 출간되었고, 이들은 각각 시나 에세이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초장부터 글의 수준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먼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랜선 연예’라 부를 만한, SNS 기반의 대중문화다. 비단 글 쓰는 사람들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이제 SNS는 전방위 예능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전에 없던 새로운 예능의 장이 나타나면서 과거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 가치가 있다. 바로 인기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종종 인기 있고 잘생긴 연예인과 그렇지 않은 연예인을 보았을 때 사람들의 반응 차이를 대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능의 세계에서 인기는 요컨대 권력의 척도이고, 인기의 정도는 단순한 수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예능인을 순서 매기고, 그들의 등급을 나누는 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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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가 없으면 망하는 것이다

 

이는 요사이의 SNS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새로운 예능의 장은 고독한 예술적 성취보다는 대중의 환심을 지향하기에 적합한 장소다. SNS에서의 예능활동은 ‘좋아요’ 수에 지배된다. 글 쓰는 사람은 반응이 좋은 글을 반복해서 게시하고, 비슷한 종류의 것들을 자꾸 재생산한다. 대개의 SNS 스타들은 결국 글을 쓸 때 그 맛이 대중들의 입맛에 수렴하도록 하고, 주체적인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대중의 반응을 예상하여 그것을 내면화한다. 요컨대 이 ‘랜선 연예’의 장에서는 인기가 예능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한다.

SNS와 인기

인기를 얻는 것은 일단 좋은 일이다. 무엇을 쓰기에 앞서 그 점을 명확히 해두겠다. 인기에 관하여 내가 아는 한 최고의 통찰은 다음 문장에 담겨 있다.  

「인기는 부지불식간 얻게 되면 미덕이나,
추구하면 부덕이다.」

이 문장은 인기의 추구 자체를 비난하는 목적으로 쓰인 것이라기보다는, 인기의 특성을 말하는 목적으로 쓰인 것이다. 인기에는 기본적으로 다수로부터의 호감이 전제되어 있는바 개인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예컨대 의도찮은 인기를 얻은 사람1)얻을 자격이 있는 인기이므로 요행이라는 뜻은 아니다은 대개 고독한 사람이 쉬이 빠질 수 있는 허무의 깊은 굴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기는 인간의 인정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달콤하고, 달콤한 것들이 으레 그렇듯 애착을 가진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채근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고작 유자서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를 읽을 줄은 모르며
유현금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을 뜯을 줄은 모르니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말고 껍데기만 좇아다니는데 어찌 금서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느냐.」

이 오래된 구절을 현대적으로 적용해본다. 책의 정신이 아니라 그것의 보기 좋은 껍데기를 좇는 사람이란, 글쓰기의 정신이 아니라 그것에 따르는 인기를 좇는 사람이다. 그것은 예술의 정신을 좇는 것이 아니라 힙스터인 본인에게 쏟아지는 열광의 시선만을 희구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시선을 희구하는 행위 자체가 부덕인가? 나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기의 추구가 근본적으로 갖는 부작용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행위‘만’을 좇는 것은 쭉정이다. 이와 반대로 ‘정신’이란 말하자면 행위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이상, 혹은 이상을 성취하기 위한 ‘본질적인’ 행위에 관한 것이다. 비본질적인 행위는 겨우 유현금, 즉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으로 그것을 의식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그것에만 몰두하는 것은 문학을 하는 사람이 글자의 아름다움만을 신경 쓰는 것과 같다―이것은 서예의 정신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시인 

지난 3월, 이메일로 나와 시를 주고 받던 분이 나에게 이렇게 물어왔다.(직접 인용을 하겠다.)  

“톨스토이는 예술은 타인―대중들로 해석해도 무리 없을 듯 합니다―에게 공감을 얻고 사회를 긍정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런 문맥에서 보들레르, 리스트, 바그너 등의 예술인을 비판했는데, 이것이 하상욱 씨 류의 사람들을 시인이라 칭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즉, 하상욱 류의 작가들이 쓴 SNS발 글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데 그것이 그들을 시인이라 칭할 수 있는 근거가 되겠느냐는 요의 질문이었다. 하상욱과 직접적으로 갈등을 겪었던 지인도 있고, 또 그것과 별개로 개인적으로도 SNS로 얻은 영향력이 실제로 행사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몇몇 SNS 작가들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맥락에서의 ‘톨스토이 예술론’은 실제 톨스토이의 생각과 다르게 왜곡된 것이며, 그 작가들이 실제 톨스토이 예술론에 부합하는 작가라고 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이 아저씨도 고생이 많으신 것이다

이 아저씨도 고생이 많으신 것이다

 

먼저는 타인에게 공감을 얻어야 하며, 사회를 긍정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톨스토이가 제시한 ‘좋은 예술’의 두 가지 자질이 인과관계로 엮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톨스토이를 인용하는 사람들은 쉬이 이 두 가지 전제를 자의적으로 뒤섞어, 타인에게 공감을 얻는 예술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이끄는 예술이라는 식으로 해석해 버린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사회를 긍정적으로 이끄는 ‘동시에’ 공감을 얻어 영향력을 가지는 예술을 원했던 것이다. 조금만 의문을 가져 보면 두 전제가 아무런 논리적 관계도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가지 전제임을 명확히 할 수 있다. 예컨대 ‘대중의 공감’을 갈망하는 상업주의 예술이 다른 예술에 비해 인간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가? 비슷한 논리로, 여성성의 상품화가 긍정적인 사회 발전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김수민이 쓴 것은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는 있겠으나, 사회를 긍정적으로 이끌어가는 예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글은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웹에 떠도는 말을 되뱉어 낸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어디선가 보았던 말들, 페이스북 뉴스피드에 떠도는 달콤한 말들,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이 기실 편견만을 확산시키고 있다. 예컨대《너에게 하고 싶은 말》「나를 만나기 위해 다른 약속을 뒤로 미루는 사람을 만나세요.」는 언뜻 맛보기에 달콤하지만 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예술가가 할 말은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보편의 사회에서 충분히 상용되는 문장인 동시에, 그다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장도 아니다. 예술가는 ‘상용되고 있지만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보다 ‘상용되지 않지만 그러나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낫다. 남들 다 할 수 있는 일이면 구태여 예술가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할머니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술가라면 ‘약속을 뒤로 미루는 사람’을 만나지 않아야 좋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솜씨 있는 작가라면 그 주장에 걸맞은 증거를 하나씩, 하나씩 밝혀내야 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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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톨스토이가 비판했다는 보들레르의 대표적 시집 《악의 꽃》에는 이런 독창적 예술가에 관한 암시가 많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보들레르는 ‘악’을 재조명하여 ‘꽃’에 빗대었다. 악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그 ‘공공연한 비밀’을 문장으로 증명해낸 것이 보들레르다. 물론 보들레르나 랭보가 지금껏 충분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파리 시민들의 변혁의식에도 어느 정도 빚을 졌을 것이다. ‘대중의 공감’이라는 건 이런 종류의 것이어야지, 편견으로 가득한 코드를 새로운 것인 양, 박수 치며 받아들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요컨대 쉬운 말로 비판적 인식이란 게 좀 필요한 게 아닌지.

다만 작가나, 문학이라는 말에 너무 무게를 싣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상욱도 자기를 시인이라고 밝히기만 하면 사전적 의미에서 시인인 것일 테다. 물론 ‘그 사람은 시인이다!’하고 영탄조로 말할 때의 ‘시인’이란 단어는 사전적인 것이 아니지만. 작가가 지향할 것은 당연히, ‘그 사람은 시인이다!’의 ‘시인’일 것이다.

글/ 미치코 아빠

편집 및 교정/ 이점

   [ + ]

1. 얻을 자격이 있는 인기이므로 요행이라는 뜻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