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양날의 검이다. 우리에게 사고 체계를 만들어주지만 감성이라는 직관을 배제시킨다. 서구사회는 이성의 힘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 믿어왔다. 계몽주의를 기반으로 발전한 이성만능주의는 인류가 이성으로 유토피아를 건축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이성으로 만든 결과물들이 세계를 황폐화시켰음을 목도했다. 또한 극도의 이성을 강조하여 유태인 학살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용인시킨 나치 정권은 물론, 산업화 기술을 활용하여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해온 자본가들을 겪어왔다.

 서구 지성사회는 원자폭탄이 수십만 명을 몰살한 1945년을 기점으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서구사회가 저질러온 폭력들을 고발하고 타자들을 받아들이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시 한 번 이성을 제대로 사용해보자는 ‘비판철학’은 각자의 길을 걸어감으로 전후 유럽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기존의 아동용 만화들과 ‘도라에몽’의 차이에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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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용 만화들은 주인공들의 화합을 중요시하지만, 도라에몽은 주인공들을 모두 비판한다. 스폰지밥과 도라에몽의 서사 구조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스폰지밥은 어떤 에피소드가 일어나면 다양한 사건들이 이어지다가 주인공들의 화해로 이어지거나 사건이 급작스레 소거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스폰지밥은 물론, 뽀로로라든가 텔레토비같은 만화들은 서사에서 선악의 구도가 명확하지 않다. 소소한 일에서 갈등이 일어나지만 이는 커다란 규모로 번지지도 않으며, 일상에서 정리할 수 있는 구도로 나타난다. 장르의 격차도 있지만 어린이 만화는 대부분 다양한 모습을 지닌 주인공들이 어울림으로 화합의 가치를 강조한다. 전후 유럽사상은 세계 2차 대전으로 나타난 유태인 학살이란 비극이 타자를 수용하지 않아서 발생한다고 봤다. 즉, ‘타자’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그들을 이끌어왔던 명제다. 이는 비판철학에서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나 마찬가지지만, 후자의 경우 어린이용 만화처럼 무조건적인 환대를 중요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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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도라에몽의 서사는 타자를 수용하는 과정보다는 이성을 비판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과학의 결과물인 도구를 잘못 사용하는 것을 지적함으로 인간이 어떻게 위험에 처할 수 있는지 경고한다. 에피소드형 만화가 그러하듯 도라에몽은 끝없이 에피소드를 반복함으로써 이성으로 이루어진 과학만능주의가 끝없이 실패를 반복하리라는 사실을 시청자에게 환기한다.

도라에몽 서사의 도식
진구가 위험에 처함→도라에몽에게 도구를 요청함→원래 의도대로 사용하다가 다른 의도로 사용하기 시작함→커다란 위기가 봉착함→도라에몽의 도움으로 원상복구

 산업화 시대에 들어서며 인류의 발전 속도는 인류의 인식 발전 속도보다 빨라졌다. 현대 사회에서는 우리가 소화하지도 못할 도구들이 계속 지수함수 그래프처럼 늘어난다. 즉, 과학은 발전할수록 더욱 폭발적으로 발전한다. 인류 대부분의 발명품은 고대에서부터 나타난 것이 아니라 19-20세기에 생겨났다. 1)도라에몽이 사용하는 도구들은 20세기에 발명된 도구들의 변용이다. 대나무 헬리콥터는 비행기의 변용이며, 어디로든 문은 공간의 이동이 빨라진 20세기의 교통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진구가 일반인을 상징한다고 봤을 때, 진구는 과학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반인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도구를 매번 낯설게 접하기에 도구를 제대로 사용할만한 이성을 갖추지 못 했다. 그렇기에 진구는 도구를 이로운 용도가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수단으로 쓴다. 그 과정에서 원래 의도는 왜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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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크푸르트 사회과학연구소의 소장이자 비판철학자인 호르크하이머는 이를 ‘도구적 이성’이라 칭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성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나타나기에 이성이 야만으로 변하는 형태를 지적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부정변증법2)즉, 모든 변증법의 끝은 부정으로 나아간다이라는 방법론으로 이성이 어떻게 야만의 형태를 드러내는지 고발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이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는 <황금가지>라는 책에서 서구 이성의 발전이 주술→신화→종교→과학 식으로 발전한다고 봤다. 아도르노는 인류가 진보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계몽이라는 이름의 야만은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계몽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기에 타자를 배제시켰다. 변증법3)정-반의 결합이 절대정신을 이룩하리라는 서구 정신은 인류가 이성이라 여기지 않았던 주술-신화의 구조를 반복한다. 즉, 계몽은 과학과 이성이라는 신을 상정하고는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재생산한다. “신탁의 예언에서 비롯된 논리적 귀결로서 신화의 영웅들이 파멸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운명의 필연성’은 형식 논리의 엄밀성으로 세련화되어 서구 철학의 모든 합리적인 체계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체계들의 결과마저 결정한다.” 신화는 그 자체로 계몽을 수행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신화의 우상들을 계급대로 매기고, 그들이 비이성과 반인륜적인 행동에 분노하는 것처럼 이성은 자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우리에게 계급을 매기고, 비이성에 분노하게 만든다. 아도르노는 이성의 역사란 파괴의 반복이라 말했다. 즉, 모든 것을 이성의 영역으로 들임으로 의외성을 배제시키고 모든 것을 패턴화하고 수치화한다는 말이다. “자연을 파괴함으로 자연의 강압을 분쇄하려는 모든 시도는 단지 더욱 깊이 강압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란 문장으로 유럽 문명의 궤도를 판단한다. 결국 주술-신화-종교는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무언가를 가정해왔던 계몽이다. “애니미즘이 사물을 정령화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물화함으로 페티시즘(물신주의物神主義)를 이룩한다.” 계몽과 야만은 다르지만 같은 말이다. 도라에몽은 이 흐름을 만화 자체의 서사로 반복하여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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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는 무지한 존재여서 악으로 나타난다. 퉁퉁이와 비실이도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도라에몽 만화에서는 선악의 구도가 비교적 명백하다. 퉁퉁이와 비실이는 평범한 진구에게 악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들의 악은 진구의 감정을 자극해 도구를 사용하도록 촉발시킨다. 진구는 그 순간 ‘악의 평범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을 재판하는 과정을 참관했다. 그녀의 눈에는 아이히만이 평범한 가정의 주인공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나치의 명령을 비판없이 따랐기에 죄인으로 변질했다. 그녀는 우리의 이성이 무사유이기에 악으로 변한다고 봤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진구가 시험이 0점인 데에서, 그가 평소에 사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이 개념들은 물리적인 힘(권력)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퉁퉁이와, 자본주의에 힘입어 폭력을 행사하는 비실이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독재자나, 기업가들도 이성을 수단으로 사용하기에 이성으로 지배하는 사회는 지옥으로 보인다.

 도라에몽은 서로 화합이 불가능한 ‘악의 평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퉁퉁이가 전체주의의 화신으로 등장하며 비실이가 자본주의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인류에겐 희망이 없다. 비판 철학의 테제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쓸 수 없다”는 인식으로 인류에게 희망을 버린듯하지만 이성의 힘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이 화해하는 이상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타자와 ‘합리’적 의사소통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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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사소통은 정치의 영역은 물론, 일상의 영역에서도 타자와의 윤리를 결정한다. 퉁퉁이의 전체주의와 비실이의 자본주의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타난다. 합리적 의사소통은 타인과 나를 같은 위치에 둠으로 이성에 기반을 둔 의사소통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진구와 퉁퉁이, 비실이 사이에 합리적 의사소통이 일어난다면 이러한 일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의문투성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대화하고 서로를 이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이해하려 시도해야한다.

 그러나 이성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도라에몽을 구성하는 상당수의 에피소드는 진구가 이슬이를 가지지 못하는 결핍에서 등장한다. 프로이트학파이자 비판철학자인 허버트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인간이 고도의 산업사회에서 거대 이념에 사상마저 흡수당해 일차원적 인간으로 변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는 거대 이념을 파악함으로 혁명을 일으켜야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프로이트를 분석한 <에로스와 문명>에서 인류와 문명의 화합 가능성을 주장한다. 문명은 성욕이 승화한 결과물이지만, (자본주의와 관료제 등으로 나타나는) 과잉억압이라는 형태로 인간 본연의 욕망을 억압한다고 봤다. 그는 인간의 욕구가 발현할 수 있는 문명상태를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만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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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라에몽이 꿈꾸는 세계는 이슬이를 욕구하는 진구의 집착과 성욕이 현실 세계와 타협하기를 바라는 면에서 도구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이는 망가지기 일쑤다. 진구는 아직 깨어있지 않기에 이로운 이성을 항상 오용할 뿐이다. 그래서 이 만화는 이성을 제대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무지로 인해 반복으로 나타나는 폭력의 구조를 보여준다. 도라에몽은 어린이 만화이지만 이성을 공격함으로 이성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인류가 나치를 보며 반성하듯 진구를 보며 반성한다. 지독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이성으로 “서정시 없는 시대”를 이겨나가야 한다고.

도라에몽은 이성의 오용을 사고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주는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닌다. 앞선 테제들을 살피며 우리는 이성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지 기회를 마련해준 여러 사상가들을 만났다. 인류는 문명이 발생한 이후로 양날의 검을 걸어왔다. 계몽과 야만이 같은 말이듯, 폭력과 평화도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도라에몽이 주는 교훈들은 주제가와 정반대다. “하고 싶은 일 모두 다했으면 좋겠네”가 아니라, 우리는 하고픈 일을 모두 할 수 없으며 하고픈 일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이다. 이는 비관론이 아니다. 우린 감성과 화합을 중요시하는 것을 넘어 끝없이 비판하는 사고로 자신의 윤리를 세울 줄 알아야한다는 뼈저린 가르침이다. 도라에몽은 지독한 폭력에서 야만적인 이 사회에서 인간일 줄 알아야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글/ 개소리 플레이어

편집 및 교정/ 이점

   [ + ]

1. 도라에몽이 사용하는 도구들은 20세기에 발명된 도구들의 변용이다. 대나무 헬리콥터는 비행기의 변용이며, 어디로든 문은 공간의 이동이 빨라진 20세기의 교통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2. 즉, 모든 변증법의 끝은 부정으로 나아간다
3. 정-반의 결합이 절대정신을 이룩하리라는 서구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