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시의 존재론
-하상욱 이후의 텍스트의 조건

DANTO

아서 단토. 미국의 철학자. 2013년에 별세하셨다고 합니다.

예술은 선언문이다. 아서 단토는 미술사를 재해석하며 그것을 선언문의 역사라 불렀다. 예술가들은 철학자와 달리 직관과 감각으로 자신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트렌드로 작용하여 그 시대의 미술을 이끈다.1)흔히 이 말을 패러다임이라는 익숙한 용어로 쓴다.  그래서 거대서사인 미술은 항상 세계에 질문을 던진다. 산업화 이후 사진의 등장으로 미술은 무언가를 재현하는 의무를 박탈당했기에 그 이후의 미술은 ‘개념 미술’로 나타난다. 마네 등의 인상파로부터 시작된 미술은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에 따른 각자의 선언문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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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곰브리치, 왼쪽, 클레멘트 그린버그, 오른쪽.

미술사학자인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만들기와 맞추기’라는 개념으로, 그린버그는 모더니즘 미술을 예로 들며 ‘옛 미술을 비판함으로 진보하는’ 미술사가 연속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아서 단토는 이들과 달리 1970년대 이후 미술을 진단하며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다. 이제 연속적으로 진보하는 미술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으며 이제 남은 질문은 ‘무엇이 예술인가?’뿐이다. 즉, 현실을 바라보는 장치로서의 미술이 다 나왔기에 이제 남은 것은 미술 스스로에 대한 진단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선언문의 종말’이라는 말과도 같다. ‘선언문의 종말’은 모든 선언문이 가능한 세계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모든 예술을 향한 용납이 아니다. 그는 헤겔의 말을 인용하며 그것이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것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로 예술을 해석했다. 그는 그의 저서인 ‘일상적인 것으로의 변용’에서 어떤 것이 예술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에 관한 것’이자, ‘그것의 의미를 구현한다’라는 의의에서만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는 모든 이들이 예술가가 될 수 있으나 대신 예술의 조건을 갖춰야한다 주장했다.

IRUMSI

요론,,,,거 말이다!

SNS에서 유행하고 있는 이름시는 이러한 조류에서 의의를 지니는가? 절대 아니다.

귀여니와, 하상욱을 거쳐오며 텍스트는 무한히 자유로워졌다. 귀여니는 ‘이모티콘’과 ‘유행어’의 도입으로 텍스트의 한계를 넓혔다. 귀여니는 진지하게 이 세대가 지닌 가벼움과 명랑함을 판타지에 녹여냈다. 모두가 오글거릴 수 있던, 감성의 표출에 자유롭던 시대에서 그 시대의 감수성을 대표했다. 그녀의 선언문은 문체를 넘어서 스토리와 감성만으로 문학이 가능함을 보여줬다. 인터넷 소설이라는 장르의 출현은 우리로 하여금 서사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줬으며, 문단에서 활동하지 않는 비제도권 작가들이 충분히 문단 권력을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줬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정통으로 등단하는 제도에 기대어 ‘작가’를 정의하지만 문예지 등 매체가 아닌 인터넷이라는 열린 장소에서도 ‘작가’는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문단이라는 거대권력에서 벗어나 재미 그 자체로의 문학을 추구하는 가능성으로 나타났다. 또한 진지한 문학에서 배제시켜왔던 유치함이라는 감성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귀여니가 베스트셀러로 대두함으로 우리는 문학이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단토의 예술론에서 예술이 의미하는 바였다. 작가 자신의 사상과 신념이야 말로 예술을 가능케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언과 신념은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어떤 권력으로부터든 제한당해서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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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욱이 질문한 바는 ‘메시지’만 남은 문학이다. 그는 자신을 시팔이라 주장하지만, 시인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의 구성요소를 모두 배제시키지만 일부러 시라 주장한다. 그의 발언은 사실 언어유희에 가깝다. 하지만 바슐라르가 ‘상상력’의 공간이라 정의한 시의 작용을 하지 못한다. 이미지나 은유 등의 기존 시의 요소라 할 만한 게 없을뿐더러 고의적로 그것을 파괴하지 않았다. 반동으로의 역할도 하지 않지만, 이것은 우연찮게도 문학의 기능을 질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름시는 그 메시지마저 존재하지 않는 형태로 존재한다. 그들의 윤리는 오로지 자신의 발언이 아니라 좋아요를 통한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라캉은 이러한 관심종자2)인문학적 개소리 1편을 참고하자! http://misfits.kr/14477들이 부모에게 관심을 받으려는 유아기를 반복함으로 유아기적 퇴행을 겪는 자들이라 설명했다. 그들은 ‘선언문’으로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발언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전의 것들을 반복함으로 당연한 진리를 설파하는 자들이기에 사람들은 그 당연함에 공감한다. 여기에 예술의 윤리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상욱이 말장난으로의 예술을 성취해냈다면, 관심종자는 그 말장난마저 붕괴시키는 텍스트일 뿐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시나 작가로 칭하는 그 자체가 다양성에서는 용납되어야하나, 그들이 예술이냐는 논의는 결국 윤리의 측면에서 따져야한다.

글/ 개소리 플레이어

편집 및 교정/ 이점

   [ + ]

1. 흔히 이 말을 패러다임이라는 익숙한 용어로 쓴다.
2. 인문학적 개소리 1편을 참고하자! http://misfits.kr/14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