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따금 어떻게 다른 남자가 로테를 사랑할 수 있고 감히 사랑할 자격이 있는지 의아할 때가 있다. 내가 마음을 다 바쳐 오로지 그녀만을 애절하게 사랑하고 있는데, 오로지 그녀밖에 모르고, 그녀만이 내가 가진 전부인데!

– 9월 3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일상이라는 이름의 환상은 언젠가 무너진다. 일상은 언어로 만들어진 세계이며 우리는 모든 사물을 언어라는 틀을 거쳐야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에 우리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시대가 만들어낸 시대정신이다. 누군가 만들어낸 기준이 우리라는 존재를 사회에 던져놓았으며, 그 안에서 ‘나’라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가 만들어낸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은 어딘가에 있다고 가늠할 수 있는 ‘장소’의 세계에 머물러있다. 어떤 짓을 하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말로 읽힌다.

롤랑 바르트는 현대의 ‘장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비장소atopos’의 영역이라 말한다. 그는 사랑만이 우리를 비장소의 영역으로 안내할 수 있으며 비장소에 진입한 사람들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독특함을 지닌다. 그들은 문명이 예측할 수 없는 단계로 들어간다. 언어로 칭할 수 없는 유령이 나타나는 순간 자신에게 주어져있던 운명을 거부할 힘이 생긴다. 그러나 사랑이 불행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연인이 동시에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욕망의 목적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 두 욕망이 불화하는 지점에서 비극이 찾아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욕망은 혼자만 지니는 욕망이다. 짝사랑을 다룬 소설들은 많았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우리가 흔히 짝사랑이라 부르는 사랑의 원형들을 모두 내포한 작품이다. 많은 노래 가사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제시한 짝사랑의 이미지를 반복한다. 그는 혼자만의 비장소에 갇힌 외로운 죄수이며, 자학으로 스스로를 초월하려는 형이상학적 질환의 피해자다. 이 소설이 주는 교훈은 짝사랑에 빠진 사람은 마조히스트라는 사실이며, 그들은 헛된 신을 숭앙함으로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는 환자란 진실이다.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형이상학적 질환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마귀들림의 기억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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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문제인거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미신의 세계다. 베르테르는 신을 욕망하는 대신 짝사랑하는 대상을 신으로 숭앙하는 자다. 우리가 신을 소유할 수 없듯이 그도 짝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할 수 없으리라 생각함으로 자멸의 길로 접어든다. 어느 순간 그는 신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실패를 추구하는 욕망을 지님으로써 신과 자신을 갈라놓는 장애물을 추구한다. 그러한 장애물이 없이는 신이 신으로의 의미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끝없이 장애물을 만드는 자기학대의 길을 걸으며, 자신을 초월하려는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작품이다. 베르테르가 샤로테를 사랑하는 과정은 금기를 어기려는 과정이며 언어로 치환할 수 없는 아토포스의 영역에 진입하려는 광기로 해석할 수 있다. ‘뭇사랑의 입에 오르내리며 더럽혀진 당신의 이름을 이제 로테 이외의 다른 누구의 입에서도 듣지 않겠습니다.(p.44)’라든가 ‘하늘과 땅이, 나를 에워싸고 작용하는 모든 힘이 두렵기만 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영원히 집어삼키고 영원히 되새김질하는 괴물일 뿐이다.(p.87)’같은 베르테르의 진술들은 그가 세계와 샤로테를 분리하여 ‘당신’이라는 이름의 아토포스의 영역으로 두고 있음을 알려준다. 베르테르의 세계는 ‘문장의 연결을 관례적인 어법대로 하지 않으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다. 백작과 관료들이 지배하는 세계는 ‘감각이 완전히 메말라가는’ 세계이며 젊은이인 베르테르 자신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공간이다. 세계와 아토포스의 대비는 아토포스를 초월적인 세계로 두며, 현실세계를 향한 환멸로 드러난다. 이 도식 아래에서 베르테르가 ‘샤로테’를 가지려는 열망은 ‘샤로테’가 아니라 샤로테로부터 나타나는 천국의 문에 입장하려는 열망이다. 베르테르가 ‘샤로테’를 경유해 원하고 질책하는 대상은 바로 ‘신’이다. 그에게 ‘샤로테’는 다다를 수 없는 신이며 그녀의 약혼자인 ‘알베르트’는 무능한 세계를 대표하는 자다. 베르테르의 환멸은 ‘알베르트’라는 이름의 세계를 무화시킴으로 ‘샤로테’라는 이름의 신에 다가가려는 과정이다.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네가 있을 뿐”이었는데, 그녀는 어느새인가 “You float like a feather(당신(이라는 천사)은 깃털처럼 떠있어요)”, “You’re so fucking special(당신은 존나 특별해요)”라는 존재로 변하고 “I want perfect Body, I want perfect soul(나는 완벽한 몸을 원하고, 완벽한 영혼을 원해요)”라는 진술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을 파멸시키는 것은 베르테르가 감사하다고 했던 ‘신이 주셨다는 상상력’이다. 그는 자신이 잘못된 신을 섬긴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녀에게 끝없이 금기를 부여해 신의 모습을 인간에 투영하는 굴절된 초월을 피하려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장애물로 대상을 돌려 끝없이 부딪힌다. 그 결과 자신이 금기를 깨고 있음을 체감해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빛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에 기준”에 만족 못하며 자신이 “안경 쓴 샌님”에 불과하다는 걸 아는 주인공은 “너의 그 잘난 남자친구”로 대상을 돌려 질책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장애물에 맹목적이라 스스로 파멸하기를 기대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그녀를 섬기기에 자신을 선을 집행하는 자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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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런다고 되는게 아냐

마조히즘은 현대의 찌질함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존재의 질환이다.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열등한 존재라는 자기비하뿐이다. 끝내 경멸하는 자들에게 자기구원을 바라는 자다. 당신이 나 대신에 가진 나의 그녀를 함부로 다룰 생각하면 안 돼요라든가, 꼭 하나만 바래요. 나 대신에 그녈 영원히 지켜줘야해요 식의 주문들은 경멸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소원을 투영하는 식이다.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이렇게 원하는데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사랑의 바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 과정에서 ‘나’는 “안경 쓴 샌님”에 불과하다. 그래서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은 I’m a creep, I am a wierdo(나는 쓰레기고 괴짜에 불과해)라는 자조뿐이다.

베르테르는 9월 3일자에 고백하듯이 ‘나만’이 그녀를 안전히 지켜줄 수 있다는 찌질한 고백을 한다. 이 행위는 순전히 그녀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윤리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녀가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고행을 이어나가거나 영원을 약속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르네 지라르는 고행이 욕망을 은폐함으로 성불구자(!)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말한 적 있다. 즉, 그녀를 향한 욕망이 강해지지만 그것을 표출하지 못하며, 심지어 그것이 불일치함으로 매혹에 포로로 사로잡힌다는 말이다. 날 기억이나 할까요, 내 이름조차 생각이나 날까요 하는 포효는 욕망을 표현 못하지만, 욕망의 대상이기를 바라는 역설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바라만 보는데에 그친다. 성불구자는 그 여자가 자신의 소유물이기를 바라며 상대방의 인격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병의 경지다. 베르테르의 앞선 9월 3일자 고백은 이러한 성불능의 대표라 볼 수 있다.

선생의 욕망이 안좋은 곳을 스쳤습니다

 

한편으로는 영원을 약속하는 록발라드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널 사랑해, 눈을 감아도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면이라든가, 기다릴께 나 언제라도 저 하늘이 날 부를 때 식의 옛 발라드들은 남성이 표현할 수 있는 영원을 표현함으로 의지의 굳건함을 보인다. 그와 동시에 넌 이제 떠나지만, 너의 뒤에 서 있을 거야 식으로 선을 자처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들은 오히려 주인공의 고독을 배가시킬 뿐이다. 그들은 선을 자처함으로 스스로가 선이기를 향유하는 형이상학적 질환에 걸린 자들이다. 르네 지라르는 마조히스트들의 결말을 비극적으로 보았다. 그들은 사탄을 숭배하며 자신이 선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기에 악의 길로 들어선다. 즉, 자신이 착하기 때문에 그녀를 가지지 못한다 생각하여 타락해버린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며 자신이 악한 사람이어야만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미신이다. 그들은 그렇기에 박애주의자나 격렬한 선의 숭배자를 자처한다. 영원이라는 상징은 “순결함”이라는 선을 증명하려는 행위이며 그로 인해 사악한 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려는 시도지만, 그들은 악이 승리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 고통받는다. 이 과정에서 실패한 인물들은 여성혐오의 길로 빠지고, 마지막으로 젊은 베르테르처럼 자신의 선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의 길로 빠져든다.

찌질함은 인간의 본성이다. 르네 지라르는 이를 신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욕망이라 봤고, 라캉은 쥬이상스를 누리지 못하는 인간의 결핍이라 봤다. 관점의 차이가 어떠하든 짝사랑은 관계의 불화에서 생기는 절대고독을 즐기는 행위다. 어느 순간 우리는 짝사랑을 하며 짝사랑하는 대상과 동시에 “짝사랑하는 사람을 짝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순간을 느낀다. 그런데 왜 지금 나 널 그리워하는 거니, 네가 없는 하루하루가 왜 이리 힘드니라는 고백의 순간에서 우리는 그 사람을 절대 잊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은 한동안 자신의 신에 가까운 이상향이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쉽게 자신에게로 오면 그 사람의 가치가 훼손당하기에 그 사람을 계속 먼 상대로 두는 찌질한 짝사랑은 그래 그랬었지, 널 사랑하기에 세상은 나에게 커다란 감동이었어 남는다. 그 순간을 잊는다면 내가 살아온 짧은 세월은 하나도 보잘 것 없다는 고백으로 우리는 신에 대한 기억을 우리의 마음으로 남김으로 다음 사랑에서 겪을 존재론적 질환을 간파할 수 있다. 젊은 베르테르는 존재론적 질환을 견디다 못해 파멸해버린 예민한 영혼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서 슬퍼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예민함의 씨앗이 우리의 마음에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짝사랑의 아픔, 찌질함은 우리에게 내재된 또 하나의 나이기 때문이다.

 

<Setlist>

Radiohead-Creep

The Nuts-사랑의 바보

10cm-스토커

성시경-넌 감동이었어

정준일-고백

하동균-그녀를 사랑해줘요

K2-그녀의 연인에게

박효신-동경

플라워-Endless

Sky-영원

박진영-너의 뒤에서

등등 

편집 및 교정 / 요정

글 / 개소리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