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이다. 교육부의 나향욱 기획관이 경향신문 부장기자와 있는 술자리에서 실언을 했다. ‘개돼지’만 기억하지 말고, 경향신문에 올라온 전체 대화를 보고 전문을 기억했으면 한다.

격차가 있는 사회가 합리적일까? 

아니올시다가 내 대답이다. 격차는 있을 수 있으나, 격차를 줄이려고 하는 사회가 합리적이다. 단순히 격차가 있다고 해서 그 사회가 합리적이라 주장하는 나 기획관의 발언은 위험하다. 사회가 버틸 수 있는 규모의 격차는 사회가 수용할 수 있으나, 현재 한국의 격차는 수용 불가에 가깝다.

김낙년 교수가 토마 피케티의 방법론을 통해 통계청 기준 한국의 소득을 따져보고, 이를 토마 피케티 데이터베이스로 비교해본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아래와 같다.

출처 : 포스코경제연구소 보고서 https://www.posri.re.kr/ko/board/content/3747

출처 : 포스코경제연구소 보고서 https://www.posri.re.kr/ko/board/content/3747

천조국의 우방국가라 그런지 사이좋게 1, 2등을 나눠먹었다. 나 기획관이 그리 찬양하는 미국의 신분제 사회는 세계 제일 가는 소득불평등을 자랑한다. 나씨는 ‘미국처럼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지만,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미국의 그것을 이미 턱밑까지 쫓아왔다.

합리적인 경쟁일지라도 격차는 생긴다. 사회가 아무리 조건을 평등하게 만들더라도, 기회의 평등을 시전하더라도 개인 능력의 차이, 가정의 차이, 운빨(..) 등등으로 인해 격차는 생긴다. 나씨가 말한 ‘격차가 있는, 합리적 사회’는 이 격차가 ‘노오오오오력’으로 극복 가능한 수준이어야 한다. 동시에 그 격차가 불합리한 차별로 인해 생기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은 노오오오오력의 차이는 인정할 수 있으나, 노오오오오력으로 극복 불가한 차이엔 때때로 화를 낸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규직이 되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우린 공감하고, 분노한다.

위선이라고? 나도 위선이었으면 좋겠다 시발럼아

나씨의 말 중 재수없는 부분은 여기다.

– 우리는 내 자식처럼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다.”

엥, 우리가 김군의 아픔에 공감하는 게 진짜로 위선이냐?

위선의 뜻은 아래와 같다.

[명사] 겉으로만 착한 체함. 또는 그런 짓이나 일.

고시라는 신분제 시험을 통과한 나씨라면 몰라도, 적어도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이 김군에게 보내는 안타까움은 위선이 아니다.

왜냐고? 우린 전부 ㅈ될 위기에 처해있거든.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OECD가 인정한, 세계 제일의 ㅈ같은 노동시장을 자랑한다. 전체 노동자의 1/3 가량이 비정규직이며, 임시직 노동자도 OECD 평균을 상회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슷한 업무 역량을 보여줘도 시간당 임금은 정규직의 70% 수준밖에 안된다. 정규직 대부분이 가입하고 있는 3대 사회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이지만, 비정규직은 고작 절반밖에 가입하지 못했다.


한국의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매우 공고하다. 전체 근로자의 3 분의 1 이 기간제, 시간제, 파견 근로자 등의 비정규직 근로자이며, 임시직 근로자 비중(22%)은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업무 역량이 정규직 핵심 연령대 근로자의 업무역량에 상응함에도 불구하고, 2014 년 비정규직 근로자의 시간당 임금은 정규직 근로자에 비해 38% 낮은 수준이다.(OECD, 2013c).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임금 불평등의 주요 원인이다. 앞서 논의된 대기업과 소기업,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 생산성 격차에 따른 이중구조 또한 불평등을 야기한다.

출처 : OECD 2016년 5월 한국경제 보고서


전체 노동자 1/3 가량이 비정규직이고, 정규직 채용은 하늘에 별 따기에 가깝다. 이 판국에 김군의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다. 내 친구의 일, 내 동생의 일, 내 선배의 일, 내 일이 될 수도 있다. ‘내일’을 위해 일하다 죽은 김군이 ‘내 일’이 될 수도 있다. 슬픈 현실이다. 이 판국에 우리가 김군에게 보낸 안타까움은 위선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비애이며, 19살 김군 하나 지켜주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분노다. 김군이 기름때가 묻은 공구 사이에 컵라면 국물을 먹기 위한 숟가락을 넣을 때 나씨는 개돼지를 위해 수고롭게 정책을 짜고 있었겠지. “아 이정도면 개돼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겠지? 얘들아 이정도 정책이면 걍 입닥치고 좀 들어라”고 조소하지 않았을까?

사상의 자유 아니냐? 사상의 자유 나가있어 뒤지기 싫으면

안타깝게도, 사상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로 면피될 수준의 발언이 아니다.

하나 물어보자. 정부가 왜 있냐? 교육부 기획관은 왜 있냐? 아니 교육부가 왜 있냐?

간단하다.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존재하는 건 쉽게 말해 사회에 지속 가능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지휘부가 없으면 사회에 꼭 필요한 서비스는 제공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꼭 필요한 서비스는 국방과 같은 치안서비스부터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교육까지 광범위하다.

그러면 교육부는 왜 있을까? 아니 왜 교육을 받냐?

쉽게 말해, 사람 구실하기 위해서다.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참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교육은 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된다. 우리가 쓰는 언어부터 다쳤을 때 어디를 가야 하는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이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본인의 권리를 표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참으로 여러 가지다. 게다가 부가적으로 계층의 사다리까지 하니 교육 참 열일한다.

출처: 동아일보

출처: 동아일보

‘사회에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을 우리는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배운다. 교육부는 필수적인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가르치냐를 관장한다. 그런데, 사회의 기반인 교육정책을 기획하는 양반이 ‘신분제를 공고히 하자’ 등의 위헌적인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떠들었다. 게다가 공무원으로서도 저 발언에 동의한다는 식으로 답했다. 이 얼마나 개 같은 현실인가.

교육은 계층의 사다리를 넘어 생존이다. 사람은 사람 구실하기 위해 배운다. 무언가를 습득해야 행위를 할 수 있고, 행위를 할 수 있어야 직업인으로서, 생활인으로서 기능한다. 학교는 비생활인인 아이들을 생활인이 될 수 있게끔 최소한의 기반을 쌓아준다. 여기서 말하는 기반은 위에 말했다시피 사회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이해부터 구체적인 기능교육까지 포괄한다.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생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교육부 관리가 ‘신분제’ 따위를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따위로 보호받을 일이 아니다. 보호받기에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거룩하다. 나 기획관의 주장은 단순 술자리에서만 용인될 수 있는 헛소리가 아니라 그를 외국까지 보내 공부시켜준 국민들에 대한 배신이다.

좀 맞자

좀 맞자

교육부 기획관은 단순 사기업의 부장과 다르다. 교육부는 사회의 기반을 다진다. 교육이 백년지대계인진 모르겠으나, 적어도 교육부의 정책 하나하나는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진하게 영향을 준다. 기획관은 그 정책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기획한다. 위헌적인 생각을 가진 기획관이 정책을 만들면, 그 정책은 기회의 평등은커녕 차별을 조장할 것이며 사회에 만연한 차별을 더욱더 고착화시킬 것이다.

헌법에 위배되는, 올바르지 못한 관료는 권력을 사유화한다. 권력의 사유화는 공공성을 파괴하며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저해한다. 공공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행정부의 관료가 위헌적인 생각을 가지면, 망하기 십상이다. 이 점에서 나 기획관의 파면은 정당하다.

(정권의 정점에 있는 사람에게 아부하기 위해 공영방송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한 그 사람도 파면해야 한다)

잠깐 여기서 한 가지. 우리라고 다를까?

여기서 한 가지 첨언하고 싶다. 개돼지라는 차별을 받은 우리는 격렬하게 분노했다. 하지만 우리라고 나 기획관과 다를까?

나 기획관은 사회의 특이점이라 불릴 만한 괴물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낳은 괴물일지언정 특이점은 아니다. 나씨를 단순히 비상식적 차별주의자로 치부하기엔 한국엔 이미 차별이 만연하다.

출처: 연합뉴스

출처: 연합뉴스

이자스민 전의원 관련 기사엔 항상 ‘동남아’, ‘이주민’, ‘너희 나라’ 등의 댓글이 달린다. 합법적 절차를 걸쳐 한국 국적을 얻고, 민의의 전당인 국회까지 입성한 의원에게 우리는 ‘동남아 출신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어라’, ‘너희 나라로 꺼져’ 등의 막말을 보낸다.

성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도 같다. 본인과 다르게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들은 ‘에이즈’의 주범이 되며, 졸지에 ‘사탄’까지 된다(야 그사람들이 사탄이면 너희부터 죽일걸?). 강제로 커밍아웃 당하기도 하며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다 자살까지 한다.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돼”, “어디 경비원이 감히”, “어디 여자가 무슨”, “동남아새끼들 죽여야”, “게이새끼들”, “홍어새끼들”

이러한 류의 발언은 인터넷에만 갇혀 있지 않다. 인터넷에서 실생활로 넘어온 게 아니라, 실생활에서 인터넷으로 넘어갔다. 문장이 탄생하는 공간만 달라질 뿐, 문장을 쓰는 사람은 우리다.

알고 있다. 한국 사회는 수많은 사람을 패배자, 희생자로 치환하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에 하청을 주며 단가를 후려친다. 하청은 재하청을 주며 단가를 또 후려친다. 단순 자본만 주범은 아니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대기업 노동자도 이 차별이라는 무대에 올라서긴 했다. 자본이 연출한 극일지언정 정규직 노동자도 극의 바깥에 있진 않다.

나씨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고시를 패스하거나, 부모가 유력한 자산가인 사람들은 나씨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고시는 일종의 신분제로 작동한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신화는 이제 실현 불가능할지언정, 기득권에겐 익숙한 문장이다. 그들은 용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돈은 교환가치뿐만 아니라 신분을 나누며, 차별의 주체가 된다. 나라가 고속-압축 성장을 해서 그런지, 기득권의 민도가 졸부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와타시와 아쿠마다!

와타시와 아쿠마다!

어쨌거나 나씨의 악행을 개인의 악마성에 귀결시키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나씨는 파면으로 끝났지만, 쉽게 말해 ‘재수 없게’ 걸린 거다. 걸리기 전까지 나씨는 MB정권, 박근혜정권을 넘나들며 수많은 정책을 만들었다. ‘고시’라는 양반 되기 시험을 통과한 많은 관료들이 나씨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막연한 의심과 추측뿐이다.

악마적 일부를 단죄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일부가 계속해서 재생산된다. 이 구조를 바꾸지 않는 이상 그들은 끝없이 탄생한다. 그들을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타자로 설정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감을 잠시 덜 수는 있어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난 일베가 아니라 우리 안의 일베가 문제다라는 주장엔 동의할 수 없으나, 우리 안의 일베를 경계하자는 수준의 이야기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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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개, 돼지도 소중하긴 하다.

나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개, 돼지가 아니다. 우리는 존엄한 사람이며, 신분제가 없는 국가에서 자유롭게 노오오오오력하고 꿈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우린 또 다른 개, 돼지를 마음 속에 그리고 있다. 성소수자, 이주민, 비정규직, 여성, 특정 지역 등등. 특정 누군가를 개돼지로 만들고, 개돼지가 되지 않게끔 공포심을 조장해 발전한 나라라 그렇다고 치지만, 더이상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분제를 주장하거나, 국개론을 펼치거나, 민중은 개와 돼지라고 주장하는 게 쿨해 보일지언정 틀린 주장이다. 단순히 ‘틀린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걸 넘어서 우리 스스로도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작은 소망이다.

 

교정 및 편집 / 저년이

글 /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