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아침 6시 40분에 맞춰놓은 요란한 짱구 시계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침대에 눌어붙어 있는 몸뚱아리를 어거지로 떼어 일으켜 샤워를 하고, 엄마가 차려준 간단한 아침을 후딱 해치우고는 7시 40분 즈음 집 앞으로 나가 또래 중딩들로 가득 찬 스쿨버스를 탔다. 언제나 그렇듯 아침 첫 수업은 비몽사몽 상태로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보낸 뒤 둘째 시간인 과학 수업을 들으러 갔다. 평범한 학교 책상과 과학 실험실 책상 사이쯤으로 생긴 책상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책과 필기구를 꺼내놓고는 수업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돼도 해리스 선생님은 수업을 하지 않으셨다. 대신 교실 앞쪽에 비치돼 있던 큰 TV를 켜고 뉴스 채널로 돌리셨다. 화면에는 뭔지 모르겠는 빌딩 한 채가 잡혀 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한쪽 면이 심하게 부서진 채 검은 연기를 하늘로 피워 올리고 있었다.

“Wow! Cool!”

같은 교실에 있던 크리스라는 백인 남자애가 TV를 보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해리스 선생님은 곧바로 눈을 부릅뜨고는 그 애를 혼내듯 노려봤고, 크리스는 뻘줌했는지 고개를 홱 돌려 가만히 있던 옆자리 애한테 괜스레 말을 걸었다. 난 당시 아직 언어 적응이 덜 됐던지라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른 채 혼자 책에 코나 처박고 있었는데, 크리스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무슨 영문인지 TV 화면을 살폈다. 봤더니 아까 그 연기 나던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으니 무너지기 전에 비행기가 날아와 빌딩을 들이받는 장면도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지만 화면 구성과 상기된 앵커의 목소리로 봤을 때 분명 진지한 뉴스였다.

1 - 911

2001년 9월 11일, 세계 최강국 아메리카합중국이 건국 이래 처음으로 본토를 공격당할 때 공교롭게도 난 그 땅에 있었다. 사건 발생 몇 달 전에 이민을 간 난 버지니아(Virginia) 북부에 있는 한 공립 중학교 학생이었다. 뉴욕의 트윈타워와 함께 공격당한 펜타곤(美 국방부 건물)은 집에서 불과 30분 거리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 역사적인 사건 당시 현지의 분위기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충격에 휩싸여 있었는지 몸으로 느끼기에 충분했다. 테러 당일에는 이미 등교를 한 상태였지만 바로 다음날 12일은 휴교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등교하지 않고 집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뉴스에서는 테러 직후 성조기(Star-Spangled Banner) 판매가 급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TV에는 미국인들이 추모 집회에 나와 손깃발로 된 성조기를 하나씩 들고 눈물을 흘리며 힘껏 흔드는 장면이 나왔다.

빈 라덴이 뿌린 민족주의 씨앗

People plant some of the 3000 U.S. flags placed in memory of the lives lost in the September 11, 2001 attacks, at a park in Winnetka, Illinois, September 10, 2013.   REUTERS/Jim Young   (UNITED STATES - Tags: DISASTER ANNIVERSARY SOCIETY)

People plant some of the 3000 U.S. flags placed in memory of the lives lost in the September 11, 2001 attacks, at a park in Winnetka, Illinois, September 10, 2013. REUTERS/Jim Young (UNITED STATES – Tags: DISASTER ANNIVERSARY SOCIETY)

2001년 9월에 미국인들이 손에 쥔 성조기는 세월호 노란 리본과는 다르다. 물론 둘 다 ‘추모’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 성조기에는 훨씬 더 큰,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지도 모를 의미가 담겨 있었다. 바로 ‘민족주의’의 태동이었다. 민족주의(nationalism)의 ‘민족’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유전적 의미로서의 민족(race/ethnicity)이고, 둘째는 한 국가에 대한 소속으로서의 민족(nationality)이다. 한국인의 경우 ‘한민족’이라는 유전적 개념의 민족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모두 강하고, 이 둘의 범위는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둘 사이 구분을 거의 안 한다. 하지만 서구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한 민족 계열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고, 한 국가 안에 여러 민족 계열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미국은 더 그렇다.

우선 미국은 우리처럼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니다. (우리도 논란이 있긴 하지만) 앵글로-색슨(Anglo-Saxon)이 주류로 간주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나머지를 다 압도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이민자 손으로 탄생한 나라이고, 건국 이후에도 꾸준한 이민자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외국인들에게 미국은 ‘이민의 땅’이고, 꼭 이민이 아니더라도 최고의 유학 지역으로 꼽힌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 자체가 미국이 이민자들에게 온갖 기회가 열려 있는 땅이란 의미 아닌가? 그리고 꼭 물 건너 넘어오는 이민자들이 아니더라도 이미 미국 내에 있는 많은 흑인과 멕시코에서 계속해서 넘어오는 히스패닉(Hispanic)만으로도 미국은 다민족 국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선진국 치고는 이례적으로 ‘국가성’이 약하다. 미국은 연방제(federalism) 국가다. 하나의 통일 국가로 탄생한 게 아니라 여러 국가가 ‘연합’한 형태다. ‘United States’란 말 자체가 여러 ‘State‘가 ‘Unite’ 했다는 말이다. 미국의 ‘State’를 우린 ‘주(州)’라고 번역하는데, 사실 ‘state’란 단어는 정치적으로 ‘국가’란 의미다. 즉 미국은 원래 13개의 ‘국가’가 연합한 연방체로 출발한 거다. 미국의 50개 주를 우리나라의 지방행정구역 개념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 생각 훨씬 이상으로 미국의 각 주는 매우 독립적이다. 미국 전체에 통일되게 적용되는 법보다 주마다 다른 법이 훨씬 더 많다. 미국인들도 ‘미국’이란 국가에 대한 소속감보다 출신 ‘주’에 대한 소속감이 더 강하다. 아, 최소한 2001년 전까진 말이다.

3 - Constitution

9・11 당시 미국인들이 손에 쥔 수많은 성조기는 이제 미‘연방’국의 시대가 끝나간다는 걸 암시했다.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본토를 공격받은 적 없는 미국이었는데, 심장부인 뉴욕과 워싱턴DC에서 국제무역센터 두 채가 허망하게 사라지고 펜타콘 외벽이 부서졌다. 빈 라덴의 이 공격은 국제적으로는 ‘테러와의 전쟁’이란 새로운 프레임을 던졌고, 동시에 미국을 주가 아닌 국가 단위로 뭉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미국인들의 사고에는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엄청난 반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런 반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확장돼 미국의 이민 정책 전반에 대한 반감으로 흘렀다. 빈 라덴이 뿌리고 간 씨앗 때문에 미국에선 때늦은 민족주의 정신이 퍼지고 있는 거다.

정의의 이름!…을 내려놓는다

4 - Cold War

미국은 수십 년 세계 최강 패권국(hegemon)이었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그 독점적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정치・경제나 군사적 면에서의 우위도 대단했지만, 미국을 강대국을 넘어서 패권국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이념’(ideology)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깃발을 높이 치켜세우고 그 아리 모인 수많은 국가들의 아버지, 큰형, 또는 후견인 노릇을 해왔다. 미국이 내는 모든 목소리와 미국이 하는 모든 행동에는 대의를 위한 명분이 실려 있었다. 최소한 다들 그리 인정해줬다. 그리고 마침내 소련이 붕괴되고 공산주의 진영이 와해되면서 ‘미국-소련’으로 유지되던 양극(bipolar) 구도가 무너지고 거의 단국(unipolar)에 가까운 체제가 형성됐다.

하지만 21세기가 후반으로 접어들 때까지 미국이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다. 여전히 강대국일 순 있겠지만 강력한 패권(hegemony)을 쥐고 있긴 어려워 보인다. 미국은 지금 거대한 두 세력과 동시에 힘겨운 싸움을 벌이게 생겼다. 하나는 중동・이슬람 세력, 다른 하나는 중국이다. 하나씩 상대해도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버거운 상대들인데, 하필이면 양쪽의 도전이 시기적으로 겹치고 있다. 중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미국에 엄청난 위협을 가하며 역전 기세를 올리고 있고, 일부 종교 세력은 손에 잡히지 않는 테러 단체들과 종교적 신념을 기반으로 한 폭력성으로 미국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5,6

미국이 유일 패권국 지위를 잃어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단연 경제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다. 그 시기에 맞춰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이념적 지위도 함께 잃어가고 있다.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등지고 있어서라기보다는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할 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이미 붕괴했고 자유민주주의 이념은 퍼질 만큼 퍼졌다. 오히려 이젠 자유민주주의보다도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각광을 받기까지 한다. 미국이 차고 있던 자유민주주의라는 야광팔찌는 이제 빛이 약해져 꺼져가고 있다. 이에 더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등에 대한 군사 개입으로 악명 포인트까지 쌓은 상태다. 이제 미국은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미국은 이제 과거 정의의 이름을 버리고 ‘이기적인 미국’이 되려 할 가능성이 크다. 다른 나라의 이익이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미국만을 위한 길을 가려 할 거다. 핵우산 아래 들러붙어 있는 (한국을 포함한) 중소국들을 하나씩 발로 차내거나 그 대가를 받으려 할 거다. 무역 적자가 심하다 싶으면 신자유주의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보호무역 모드로 과감히 들어갈 거다. 국가 이익 극대화를 위해 각 주에 분산돼 있는 권한도 점점 중앙(연방)정부 차원으로 넘어갈 거다. 미국에 유입되는 이민자 수를 줄여 자국민 이익을 챙길 거고, 필요하다면 이미 들어와 있는 이민자들도 괴롭힐 거다. 더 필요하다면 더 나아가서 이슬람교인과 히스패닉까지 핍박할 수도 있다. 그들이 미국 국민이더라도 말이다.

누구 떠오르는 사람 없는지…?

7 - Apprentice

You’re fired.

미국이 ‘정치인’ 도널드 트럼프에 열광하고 있다. 물론 트럼프는 예전부터 미국 내 인지도가 대단했다. 부동산 업계에서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능력 있는 경영인으로 알려진 건 이미 옛날 얘기다. 여기에다 <WWE>와 <Apprentice> 등을 통해 TV에도 여러 번 출연하면서 대중적 인기도 연예인 못지않게 얻었다. 하지만 대권은 인지도와 인기만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특히 미국 정치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트럼프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공화당 대선 주자가 됐고, 그의 당선 가능성은 ‘설마’에서 ‘혹시’가 돼가고 있다. 트럼프가 지지를 받는 건 단순히 그가 재미있는 ‘괴짜’라서가 아니다. 그는 지금 미국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내건 슬로건은 ‘Make America Great Again’이다. 여기서 난 ‘Great’란 단어에 주목한다. 만약 민주당 쪽 어떤 후보가 이런 형식의 슬로건을 썼다면 ‘Make America Just Again’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트럼프는 ‘정의롭게’ 대신 ‘위대하게’를 썼고, 이는 미국인들을 자극한다. 알게 모르게 미국인들은 이제 ‘정의’에 질려 있다. 많은 미국인들은 이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미국, 한국과 같은 나라를 북한이나 핵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미국, 숱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민자들을 다 받아주는 미국, 온갖 데 간섭하고 간섭받아야 하는 미국이 아니다. 이제 미국인들의 수요는 주류 미국인들이 잘사는 미국, 히스패닉 없는 미국, 히잡 없는 미국, 경제적 이득을 최대한 챙기는 미국, 환태평양-동아시아 등 다른 동네 문제랑 상관없는 미국…다시 말해, 미국만 잘 먹고 잘사는 미국으로 이동해간다.

8 - slogan

트럼프가 수많은 정책에 대한 언급을 했고, 수많은 집단의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그가 주장하는 정책의 핵심은 결국 이민 문제에 있다. 지금 미국에는 반(反) 이민 정서가 팽배해 있다. 트럼프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자신 있게 얘기하지 못했던 문제다. 미국은 그 태생부터 이민자들의 나라였다.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고, 건국 때부터 지금까지 온갖 이유로 수많은 이민자가 흘러들어왔으며,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건너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앵글로색슨 자신들도 이민자들이었던 데다 미국의 비약적 발전이 그 외의 이민자들의 힘을 분명히 빌렸다. 게다가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의의 사도지 않았는가?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국경에 장벽을 치자는 말은 세계의 정치・경제 패러다임을 이끌어가는 미국 국민으로서는 너무도 ‘정의롭지 못한’ 일이었다. 트럼프가 깨부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언론은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마치 전 세계에 재앙이 몰아칠 듯이 말한다. 특히 우리 언론은 더 심하다. 물론 트럼프가 국방 문제와 관련해 우리에게 불리한 얘기를 줄곧 해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논조가 지나치게 치우쳐 트럼프 현상에 대한 이해를 불가능하게 한다. 트럼프가 말이 거칠긴 하다. 그렇다고 그가 미치광이인 건 아니다. 잠재적 독재자인 것도 아니다. 허경영 같은 희극인은 더더욱 아니다. 트럼프는 절대 바보가 아니고, 그가 그런 말들을 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그에 반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트럼프는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그 어떤 미국인보다도 냉철하다.

The United NATION of America

설사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미국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건 아니다. 미국은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우리나라와 달리 대통령보다 입법부의 힘이 훨씬 더 강하다. 의회가 적극적으로 견제하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그리고 애초에 트럼프가 대통령이 안 될 수도 있다. 돌풍을 일으키는 건 맞지만 여전히 여론조사에서도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에게 밀리고 있다. 우리나라 대선의 경우 선거기간 막판에 특정 이슈로 돌풍을 일으켜 역전하는 게 가능할 수 있지만 미국은 선거인단제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게 쉽지 않다. 트럼프 현상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가 당선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여운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질 거다. 트럼프는 그동안 많은 미국인들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을 못했던 불만과 욕망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민국가’ 미국에서 드디어 ‘이민’이 커다란 정치적 이슈가 됐다. 이제 미국인들은 이민 정책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됐다. 아니, 이제 정치 이슈가 됐으니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물론 지금 당장 미국인 전체를 대상으로 투표나 여론조사를 실시했을 때 이민 정책 분야에서 트럼프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게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체로 파급력이 크다. 이제 폐쇄적 이민 정책을 논하는 게 죄가 아닌 것처럼 될 거고, 이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날 거다.

트럼프 현상을 통해 난 미국의 굵직한 변화 방향 세 가지를 예상한다. 첫째는 국가 개념의 강화다. 앞으로 미국은 여러 주의 연방체(United States)가 아니라 미국 자체가 하나의 국가(state)로서 성격을 더 강하게 띠게 될 거다. 둘째는 민족주의 강화다. 미국 전체가 하나의 단일체로 강화되는 동시에 ‘미국 국민’의 정체성은 주류 기독교 백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될 거다. 이 과정에서 인종 차별이 심화되고 이민 정책이 폐쇄적 방향으로 흐를 거다. 마지막 셋째는 고립주의(isolationism)다. 미국은 더 이상 국제적 영향력을 키우고 행사하기 위해 애쓰지 않을 거다. 오히려 타 지역, 특히 환태평양-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그 개입 정도를 낮추고 미국만의 이익을 키우는 방향으로 선회할 거다. 사실 이 세 가지 모두 이미 진행되기 시작했다.

9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이런 현상이 더 빨라지겠지만, 안 되더라도 조금 늦어질 뿐일 거다. 우린 트럼프를 미국 정치에 어쩌다 등장한 돌연변이나 미치광이 정도로 치부하고 넘겨선 안 된다. 트럼프 현상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논문이자 미국 장래에 관한 로드맵이다. 이제 우린 ‘큰형님’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 당장 그리 될지, 아니면 십 수 년, 수십 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미리 준비해야 한다. 애써 친해져 놓은 학교 ‘짱’이 어느 날 갑자기 등을 돌리거나 전학을 가버리면 힘없는 대한민국이란 꼬맹이는 언제 어디서 삥을 뜯길지 모른다. 방심하지 말자. 방관하지 말자. ‘트럼프’라는 경고장을 잘 공부하자.

교정 및 편집 / 아날로그

글 / 개똥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