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중력의 노예다. 땅에 얽매여있기에 우리는 항상 중력에서 벗어나고자 자유로운 비행을 꿈꾼다. 중력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비행기의 발명을 이끌어냈다. 인류 사회를 일궈낸 것은 결국 삶을 이탈하고자 하는 의지다. 니체는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초인의 모델로 “중력의 영역에 적대적에 서있는 인물”을 제시했다. 초인은 “새의 천성”을 지니며 하늘로 지상의 중력에 얽매이지 않으려한다. 니체가 말하는 중력이란 지구에 작용하는 힘을 넘어 중력처럼 우리를 짓누르는 패러다임의 은유이다. 즉,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노예다. 니체는 이를 ‘낙타’라는 은유로 나타냈다. ‘낙타’는 무릎을 꿇고 자기 등에 마음껏 짐을 올리도록 허가하는 인간들이다.

 우리는 ‘중력’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처럼 우리가 ‘낙타’처럼 살아가도록 방관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각하지 못한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은 실제로는 ‘낙타는 죽었다’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낙타’인 스스로를 죽이고 삶의 의지를 되찾아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메르스 파동 때 정부가 ‘낙타’를 금지한 행위는 의미심장하다. 미세먼지 때문에 고등어를 금지시킨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물원 외엔 존재하지도 않은 ‘중동 낙타’를 금지하는 행위는 체계적인 은유다. 즉, 메르스 사태 당시의 ‘낙타’의 금지는 금지할 것이 없는데 금지가 이뤄진 기호의 금지다. 이는 국가 단위에서 권력으로 지식을 구축하려고 이루어진 계획으로 재해석해야한다.

Áßµ¿ È£Èí±âÁõÈıº ¸Þ¸£½º °øÆ÷°¡ È®»êµÇ°í ÀÖ´Â 2ÀÏ ¿ÀÈÄ °æ±â °úõ½Ã ¼­¿ï´ë°ø¿ø µ¿¹°¿ø ³» ³«Å¸ ¹æ»çÀå¿¡ ´ÜºÀ³«Å¸°¡ °Ý¸®µÇ¾î ÀÖ´Ù. ¼­¿ï´ë°ø¿ø µ¿¹°¿øÀº ³«Å¸°¡ ¸Þ¸£½ºÀÇ ¸Å°³¿øÀ¸·Î Áö¸ñµÇ¸é¼­ ºÒ¾È°¨ÀÌ Ä¿ÁöÀÚ µ¿¹°¿ø¿¡ ÀÖ´Â ³«Å¸ 2¸¶¸®¸¦ ¸ðµÎ ³»½Ç·Î °Ý¸®ÇÏ°í ¼­¿ï½Ã º¸°Çȯ°æ¿¬±¸¿ø¿¡ ¸Þ¸£½º °¨¿° ¿©ºÎ¸¦ ÀÇ·ÚÇϱâ·Î Çß´Ù. 2015.6.2/´º½º1

 메르스 파동 당시 정부는 메르스의 원인을 ‘낙타’로 규정했다. 서울대공원의 ‘한국 출생’ 낙타 2마리를 감금했으며, 중동 출입을 금지하며 낙타고기 섭식을 막았다. 그들이 은폐하려는 메르스의 원인은 패러다임의 균열이다. 국가의 질병통제 시스템에 생긴 빈틈이 메르스 파동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났다. 정부가 ‘낙타’를 금지시킨 이유는 상징으로 읽힐 수 있다. 이는 질병통제 시스템의 오류가 드러났음을 은폐하려는 행위지만 동시에 ‘낙타’라는 상징을 금지시키는 행위다. 우리가 스스로를 ‘낙타’임을 인지하는 계몽은 국가 차원에서 위협으로 다가온다. 정치의 빈틈(부조리)은 그 체제를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하므로 국가는 지식을 구성하여 원래 담론을 유지하려한다.

 니체의 은유에 따르면 우리는 ‘낙타’ 단계를 넘어서 ‘사자’ 단계로 이동할 수 있다. ‘새’가 되기를 바라는 ‘낙타’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니체의 유명한 명언 중 하나인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여기서 나온다. 니체가 주장하는 윤리적인 삶은 자신이 스스로의 의지대로 개척하는 운명이 자신의 길임을 믿는 삶이다. 낙타의 윤리에서 벗어나는 삶은 스스로를 는…♥ 지점에서 찾아온다. 니체는 이를 낙타로 존재하는 자신이 자신을 둘러싼 짐들을 깨닫는 지점에서 온다는 말로 표현했다. 여기서 낙타는 자신이 짊어진 짐 중 무엇이 가장 무거운지 따진다.

끝도 없고 답도 없는 낙타 라이후...★

끝도 없고 답도 없는 낙타 라이후…★

 이는 “노예는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 족쇄를 차고 있는지 서로 자랑한다”는 리로이 존스의 격언과도 겹쳐보인다. ‘낙타’라는 상징을 은폐하는 것은 우리가 ‘낙타’임을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정부의 은폐는 헬조선의 현실과도 맞닿아있다. 경쟁 사회의 패러다임에서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패러다임들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둔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성적”으로 경쟁한다. 세계는 우리를 수치화함으로 우리를 가치의 짐에 얽매이도록 한다. 그러한 권력 작용이 우리가 덜어내야 할 무거운 짐들을 외면하도록 만든다.

그는 “사자”로의 삶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지점에서 온다고 봤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부정함으로 우리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낙타라고 자각하지 못하는 이상 낙타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자”인 인간은 당연한 것을 아니라고 함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다. 우리는 헬조선이라는 중력에 저항하며 비행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낙타’라 불리는 우리 자신을 거부함으로 사자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층위까지 나가지 못한다. 사회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통제가 가해지기 때문이다. 균열이 일어나는 사건에서 ‘낙타’의 언급을 금지했듯이 권력은 지식을 통제한다. 그러나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사자’의 차원을 넘는 것이다. 그는 초인의 정신을 이룩한 자를 ‘아이’의 형상으로 등장시킨다. ‘아이’는 모든 것을 초월한 자다. 순진무구하며 자신의 행동 자체가 목적인 자들이다.

KakaoTalk_20160620_143924584

  니체는 삶이 단 한 번뿐이며, 그 삶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봤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 한 번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한다. 그는 자신의 윤리적 선택만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 봤다. 낙타의 금지는 이 윤리적 삶을 방해하려는 타자들의 계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신을 죽임’으로 초인의 논리로 맞서 싸워야한다. 스스로가 ‘낙타’임을 알아차려야하며, 거기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아가야한다.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라는 성경의 은유는 여기서 효력을 발휘한다.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이들은 드물다. 그러나 스스로가 낙타임을 아는 순간 우리는 바늘을 통과할 수 있다. 구원의 길은 스스로가 찾아나서야하는 법이다. 그것이 니체가 우리에게 알려준 인생이다.

글/ 개소리 플레이어

편집 및 교정/ 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