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트라이앵글
-힐링, 멘토 반지성주의-
➀ 힐링과 미문주의

현대는 신경증자의 세계다. 그들은 자신을 일상이라는 쳇바퀴에 넣음으로 패턴의 세계를 그대로 살아가려는 자들이다. 그들은 ‘정상’이라는 환상을 가짐으로 ‘비정상’을 삶에서 배제시키려한다. 자신이 ‘정신병자’임에도 그 사실을 부정하며 강박적으로 자신을 대타자가 만든 ‘정상’이라는 기준에 교정시킨다.

 

 우리는 역사를 배워오며 ‘정상’이란 기준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봐왔다. 마녀사냥이 ‘정상’이던 시대에선 많은 여성을 이유 없이 희생시켰고, 나치즘이 ‘정상’이던 시대에는 유태인을 학살했다. 우리는 ‘정상’을 고찰 없이 수용해왔기에 그런 폭력을 저질러왔다. 현대는 폭력이 물리가 아니라 정신을 향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멘토와 힐링, 미문의 세계는 반지성주의로 가는 이정표다. 이들은 신경증의 극한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패러다임에 개인을 안주시키는 역할을 자처함으로 충동을 억제한다. 힐링은 정신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용하며 멘토는 직접 중개자를 제공한다. 그들은 신경증이 강요한 패러다임을 극한으로 몰아붙여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다. 여기엔 창조가 없다. 그들을 정상 아래에 두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라는 꼰대질들만 있을 뿐이다.

정상 비정상을 왜 너희가 정하는 것인지 ¿

정상 비정상을 왜 너희가 정하는 것인지 ¿

 힐링은 ‘치유’라는 이름으로 삶을 대타자에 귀속시키려는 강박이다. ‘치유’는 증상이 생겼을 때 증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림을 의미한다. 특히 흔히 정신을 치유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또한 우리에게 나타난 심리의 문제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려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어떻게든 사람들을 위로하려하며, ‘상처’라는 언어로 감성을 자극한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욕망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언어 아래서 인간이 원래 어떤 동물인지 끝없이 의미를 부여하려한다.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은 우리가 자신이 제시한 방법으로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

 

 ‘힐링’은 여기서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자신에게 욕망을 투사하기를 바라는 ‘우상’의 형태(이는 한 단계 더 나아갈 때 멘토로 이어진다)와 상담심리학에 가까운 ‘치료자’의 형태다. 이례적인 범주가 있다면 일상에서의 힐링이 있다. 앞서 두 가지로 분류한 형태의 힐링은 강연이나 출판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흔히 TV 프로그램이나 SNS에서 이들을 마주할 수 있다. 그들은 선생이나 상담자를 자처하며 자신의 경험이나, 사람들이 지닐 수 있는 보편성과 당연함, 학문의 정의를 기반으로 얘기하려한다. 그 곳에는 ‘증상’의 원인을 규명하여 치료하려는 움직임만 있을 뿐 증상 그 자체를 밝혀내려는 사고는 없다. 그래서 그들을 임의대로 규정하는 지점에서 힐링이 가능해진다. 그들은 ‘증상’이 암시하는 의미를 진단하지 않고 상담을 진행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힐링을 대표하는 경구는 청춘을 아픔을 견디는 존재로 규정한다. ‘위로’라는 이름 아래 ‘사회생활이란 그렇다’라는 식으로 의미를 신격화한다. ‘사람’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식의 말은 신학에서나 먹히는 사고다. 인간을 움직이는 보편성이 있다는 논리는 세계를 움직이는 신이 있다는 논리와 같다. 이 논리는 라캉이 말한 ‘대타자’의 논리로도 이어진다. 앞서 말한 대타자는 우리의 충동을 거세하는 세계의 법규를 이르는 말이다.

라깡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은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 상정!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 분석학자이다.

라캉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은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 상정!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 분석학자이다.

  우리는 어머니를 욕망하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이 욕망을 상실함으로 이 세계에 안착한다. 그 순간 쥬이상스(향유)라 불리는 무의식 너머에 잠들어있는 욕망은 거세당한 언어로 우리에게 출현한다. 즉,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타인이 우리에게 언어와 세계를 선물해줬기에 우리는 그 법규에 맞춰 욕망을 대리충족한다. 라캉은 우리가 속한 세계를 상징계라 불렀으며, 대타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상징계의 신이라고 말했다. 힐링은 우리에게 상징계에 속해있길 강권하며 우리의 쥬이상스를 소외시킨다. 그 결과 우리는 정상인으로 삶을 살아 간다. 그들은 치료를 빙자함으로 우리를 시스템에 구속시킨다.

 

우상 형태의 ‘힐링’은 이성과 경험에 호소하지만 실제로는 반지성주의다. 경험이란 무궁무진하고, 노하우라는 것은 개개인마다 다르다. ‘우상’ 형태로 존재하는 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영웅담으로 가공함으로 자신을 ‘우상’으로 만든다. 자신은 역경을 극복한 자이므로 타인에게 자신의 성공담이 선례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힐링의 허구성은 여기에서 온다. 그들은 자신이 발견한 보편과 진리를 설파하며 세계가 환상이란 사실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달리 그들은 진리가 ‘자신이 아무것도 모름’에서 온다는 사실을 은폐시키고 그 자리를 자신이 설정한 보편성으로 메우려한다. 즉, 구조의 탓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 결여로 돌리는 논리다. 자신들이 구조를 이겨냈기에 타인들도 구조들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구조를 향한 확신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진리를 설파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희망과 노력이라는 신이 우리를 이끌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있다. 그들은 라캉의 분류대로라면 강박증에 가깝다. 앞서 말한 라캉의 논리로 설명하자. 우리가 삶에 회의를 느끼는 지점은 ‘증상’에서 온다. 라캉에게 증상 개념이란 우리의 쥬이상스가 거세당함으로 세계에 안착하지만, 그곳에서 다시 쥬이상스가 출현함으로 찾아온다. 이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말실수나 경련(히스테리) 등으로 출현한다. 우리는 신경증자이기에 쥬이상스를 욕망하기를 포기하는 대신 대상A라는 대체물을 향유함으로 쥬이상스를 충족시키려한다. 단적인 예시로 우리는 잃어버린 자유를 날아다니는 슈퍼히어로나 자동차 등으로 소유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희망과 열정이라는 단어를 대상A로 설정함으로 그것을 욕구하게 만든다. 이러한 대상a는 쥬이상스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증상’이란 우리가 대상A를 상실했을 때 나타나며 대타자가 붕괴한다고 알려주는 신호다. 그 대타자의 붕괴란 우리에겐 어떤 ‘기의’도 존재할 수 없는 허무의 영역이다. 신神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만 그 단어에 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논리다.

 

  멘토들은 대상A로의 자신을 상실하고 싶지 않기에 대타자의 작용을 강화하려한다. 또한 우리 스스로도 허무의 영역을 스스로 마주하고 싶지 않기에 멘토들을 찾는다. 그 담화는 세계에 진리가 있다고 가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우리에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도록 하는 안내자일 뿐이다.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라는 방식으로 그들은 우리를 통제하는 ‘아버지’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증상을 ‘상처’라 취급하며 회복해야할 것으로 정의한 뒤 ‘위로’라는 언어 사용으로 쥬이상스의 출현을 막으려한다. 이는 강박증자의 구조다.히스테리가 앞서 말한 ‘억압된 쥬이상스가 신체로 출현하는 것’이라면 강박증은 ‘억압하려는 정신이 쥬이상스로 침투’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거세당한 쥬이상스를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누릴 수 없기에 타인에게 그 체계를 강박적으로 전파한다. 그들은 타자의 욕망과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하며 자신의 체계로 거세당한 지점을 어떻게든 메우려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과정이다.

평화로운 나와 내 안의 억압당한 욕망

평화로운 나와 내 안의 억압당한 욕망

그들은 사회에서 실패한 시절에 억압당한 욕망들이 다시 강박의 형태로 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쥬이상스의 출현을 어떻게든 막으려해서 타인에게도 그 체제를 강요하도록 한다. 스스로 우상으로 칭하려는 자들은 모든 대상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보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상으로 세우려한다. 그러나 정상인이 존재하지 않듯이 영웅도 존재하지 않는다. 힐링은 신을 가정하는 반지성의 향연이라 볼 수 있다.

 

‘치료자’를 자처하는 힐링은 SNS의 미문주의로 나타난다. ‘위로’를 자처하는 자들은 자신의 논리에 입각하여 상대방을 원래 사회의 자리로 되돌리려한다.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우리에게 고전미를 느끼게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진술들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한의 세계에 속해있다. ‘아프지 말라’는 테마를 두고는 무한히 변형할 수 있는 세계지만 오히려 우리는 대타자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욕망하는 언어들을 스스로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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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그의 책 에끄리를 시작하며 ‘인간은 문체 그 자체다’라는 말을 시작했으나, 그것은 모든 인간이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지만, 각자의 쥬이상스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미문주의에 자신의 언어는 없다. 그들은 타인에게 반응을 얻을 수 있는 말들을 지껄인다. 그들이 주장하는 센티멘탈리즘도 앞서 말한 ‘우상’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강박증의 유형을 지니지만 동시에 성도착의 유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앞서 말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서 보편성을 찾음으로 그들이 원하는 어떤 진리를 제공해주는 식으로 명맥을 이어나간다. 그들의 지식은 백과전서적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현상을 언어로 포착하여 보편화시킬 수 있다는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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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말로는 관종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정상 상태를 유지하지만 좋아요라는 상대방의 관심에서만 강박증세를 내보인다. 라캉은 도착증세가 쥬이상스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일정한 상황에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들은 상징계로 통제당하지 못한 관심종자의 기질이 존재한다. 그들 스스로도 이러한 행위가 비정상임을 알지만 그들은 바깥에서는 이러한 도착증을 발현하지 못한다. 그 순간 ‘좋아요’ 그 자체가 그들은 페이스북의 ‘좋아요’와 결탁한 자들(즉 따봉충)이기에 그것이 존재할 때에야 그러한 말들을 내뱉을 수 있다. 우리가 청춘이라고 생각하는 이미지들에 기반을 둔 문장들은 ‘미문’으로 읽히며 진리를 은폐한다. 그들은 그러한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쥬이상스를 내비치지 않는다. 센티멘탈리즘은 그래서 따봉충으로 존재하는 자신을 방어하는 언어임과 동시에 타인을 감상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은 이름시 등등의 이름으로 별것 아닌 것들까지 미적 가치를 부여하려한다. 이는 ‘좋아요’를 받으려는 심리임과 동시에 그들 자신을 숨기려는 신경증의 기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말하지 않으며, 진리로 보이는 것들만 말한다.

 

알랭 바디우는 우리에게 진리로 존재하지만,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 과학, 예술, 정치’라고 말했다. 따봉충들은 ‘사랑’이란 무엇이다라는 은유로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을 정의하려한다.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보편화시키는 것은 각 개인에게 진리-사건으로 다가오는 사랑들을 무시하는 파시즘이다. 따봉충은 그러한 보편에 ‘동의’를 요구함으로 좋아요 수를 늘려간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 지닐 수 있는 윤리, 혹은 그에 대한 질문을 원천 봉쇄한다. 질문을 막고 저 너머의 세계가 존재함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진실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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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시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의 이름은 기호인 것이고, 이름시는 기호에 붙여진 기호다. 우리에게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이름으로 살아가는 실존을 의심케하는 질문을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따봉충의 윤리는 오로지 ‘좋아요’만을 탐미함으로 윤리를 배제시키고 판단의 장을 닫아버린다. 그 도착증의 원인은 간단하다. ‘좋아요’가 자본과 결탁해있기에 그들은 자신만의 논리를 주장할 수 없게 봉쇄당해버린 것이다. 페이스북 스타라 불리는 자들도 자신이 처음 올린 글을 끝없이 반복한다. 그들은 자신이 주장하고 있음이 아니라 주장이 인정받고 있음을 향유함으로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자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반복하는 셈이다. 어린 시절 인정받고 자랐거나 또는 인정받지 못함에서 우리는 근본환상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페이스북 좋아요라는 형태로 왜곡당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관심이 자본으로 이어지기에 그들은 반복을 반복한다. 힐링한다고 주장하는 페이스북 스타들은 근본환상을 반복하는 형태에 그치는 도착증자들이다.

 

 진정한 힐링의 형태는 고독이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산파법으로 끝없이 증상을 나타나게 만들며 그것을 벌리는 식으로 그 고독이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세계에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 끝없는 질문이 바로 윤리 그 자체로 작용한다. 산파법은 우리에게 질문으로 이 세계가 헛된 것임을, 어느 것도 정의할 수 없다는 영원한 회의의 세계로 빠트린다. 그 과정의 끝은 세계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아픔도 사실은 환상의 불충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다. 이 때 우리는 우리만의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힐링은 우리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으로 시작해 우리가 윤리를 만들어낼 기회를 자신들의 윤리로 뒤덮는다. 우리는 고독으로 스스로를 완성시켜야 한다. 아마도, 최승자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내 청춘의 트라이앵글이 ‘외로움, 괴로움, 그리움’인 것처럼.

 

글/ 개소리 플레이어

편집 및 교정/ 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