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개의 자소서를 쓴 남자,14년 하반기
9편: 개미論 / 생애 첫 면접 × 삼성 = ?

개미論

사실 삼성전자 SSAT 결과 발표가 나기 얼마 전 현대자동차그룹 결과 발표가 먼저 났다. 현대카드가 먼저 났고, 얼마 뒤 현대 자동차가 났다. 현대카드는 합격했고 현대 자동차는 떨어졌다. 국내 사기업 중 ‘탑 티어’로 여기는 현대 자동차에 탈락한 게 아쉽기는 했지만 아직 삼성전자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걸로 어느 정도 위안을 삼을 순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현대 카드는 합격했으니 놀지 않고 또 무언가를 준비할 수 있었다. 취준생에게는 할 일 없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다. 그런데, 현대카드는 시험합격 후 면접을 진행하는 일반적인 패턴과는 다른 기업이었다.

현대카드가 서류 전형에서 몇 배수나 뽑았는지는 모르겠지만 HMAT을 통해서는 총 채용 인원의 10배수까지 줄였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10배수면 사실 바로 전부 면접에 들어가기에는 조금 많은 인원이다. 현대카드가 인적성 시험에서 이렇게 많은 인원을 살려주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HMAT과 면접 사이 ‘에세이 전형’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카드 HMAT에 합격한 이들에게 에세이 주제를 알려주고, 며칠 뒤까지 해당 주제에 관한 에세이를 작성해 제출하게 했다. 그리고 이 에세이를 검토해 10배수를 5배수로 줄인다는 거였다. 이 2분의 1 확률을 통과한 5배수 인원만 면접에 들어가는 거였다.

‘에세이? 그래. 그래도 난 나름대로 글 쓰는 거 좋아한다는 사람이니 해볼 만한 싸움이겠지?

자소서는 ‘글’이 아니니까 참 쓰레기같이 썼지만 ‘에세이’라면 괜찮을 거야.’

이 생각은 절반만 맞았다. 얼마 뒤 현대카드에서 공개한 에세이 주제는 2개였는데, 2번 문항은 확실히 ‘에세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내용이었지만 1번 문항은 결국 자기소개서의 연장이었다. 아니, 그냥 자기소개서였다.

‘나’에 대해 자유롭게 기술하시오. (2000자 이내)

[조직이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목표달성을 위해 업무에서 더욱더 명확한 절차와 세밀한 프로세스가 요구된다. 동시에 복잡한 과정에서 본질을 놓치지 않는 단순함도 함께 요구된다]

‘복잡함과 단순함’이라는 가치는 상충되는가? 이를 조화시키거나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본인의 의견을 기술하거나 사례를 제시해 논증하시오. (2000자 이내)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지옥 같은 자소서 시즌은 이제 웬만큼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나’에 대해 쓰란다. 그것도 ‘자유롭게’ 쓰란다. 난 예상치 못한 고뇌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걸 뭔가 독특하고 창의적으로 써서 튀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대기업에 지원하는 평범한(?) 졸업예정자답게 내 장점을 한껏 어필하면서도 성실한 느낌이 풍기도록 신중히 써야 하는 건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정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현대카드란 회사가 남다른 광고와 마케팅으로 유명한 기업이긴 한데 과연 조직 내부도 그 이미지처럼 창의적인 곳일까? 알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답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민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한쪽으로 서서히 기울어졌다. 나도 모르는 새 저 밑에 처박아 숨겨뒀던 ‘똘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튀어야겠다!

튀어야겠다!

아무래도 2번 문항 ‘복잡함과 단순함’보다는 1번 ‘나’에 대해 쓰라는 게 더 큰 도전이었다. ‘나’에 대해 ‘자유롭게’ 기술하시오…튀기 위해서는 글 내용뿐만 아니라 뭔가 글의 포맷 자체를 특이하게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스쳐간 컨셉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머리-가슴-배’의 3분법이었다. 개미와 같은 곤충의 몸을 머리, 가슴, 배 3부분으로 나눠 보는 데서 착안한 거다.‘머리’는 한마디로 ‘생각’이다. 내 사고방식에 대해 말하는 거다. ‘가슴’은 한마디로 ‘감정’이다. 내가 어떤 감정을 크게 느끼는 사람인지 말하는 거다. ‘배’는 한마디로 ‘욕망’이다. 내가 어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인지를 말하는 거다. 내 자신을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설명하는 거다. 그때 당시에는 그냥 식상하게 ‘전 개똥같은 인재입니다!’ 이러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둘째로 스쳐간 아이디어는 ‘벤다이어그램’이다. 위의 3분법에 따라 내용을 채우면 ‘머리’, ‘가슴’, ‘배’ 3가지 영역으로 나눠진다. 그러면 벤다이어그램으로 치면 원이 3개 나오는 거다. 이 3개의 원을 가운데로 잡아당겨 모으면 총 4개의 영역이 추가로 생긴다. 첫째는 ‘머리∩가슴’, 둘째는 ‘가슴∩배’, 셋째는 ‘배∩머리’, 그리고 마지막 넷째는 ‘머리∩가슴∩배’, 이렇게 말이다. 그러면 벤다이어그램처럼 3개의 원을 가지고 모아서 겹치면 총 7개의 영역이 생기는 거다. 각각의 영역에 맞는 내용을 채워 넣으면 난 이 컨셉을 통해 나에 대해 7가지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는 거였다. 당시는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이 구조에 따라 정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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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구상에 따라 에세이를 작성해서 제출했다.

‘나’에 대해 자유롭게 기술하시오. (2000자 이내)흔히 곤충은 ‘머리-가슴-배’ 구조로 이뤄져 있다고들 합니다. 저는 이 분류를 사람을 볼 때 씁니다. 사람은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끼고, 배로 욕망하니, 이 셋을 합치면 한 사람이 나옵니다. 저는 제 머리, 가슴, 배 소개를 통해 저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머리: 직관적 사고]제 머리는 직관적으로 사고합니다. 직관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첫째로 모든 것을 큰 틀로 본다는 뜻입니다. 무언가를 세부적으로 뜯어보기에 앞서 그 전체를 꿰뚫는 본질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가지보다는 줄기,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것입니다.둘째로 직관적이라는 것은 여러 시각을 종합해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상을 큰 틀로 보려는 성향과 연결됩니다. 한 시각으로만 좁게 고려하기보다는 다양한 시각을 통해 대상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려 하는 것입니다.

[가슴: 주변과 연결된 감정]

제 가슴은 옆 사람 가슴에 거미줄 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을 다른 가슴과 연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 가슴이 고요하면 제 가슴도 고요하고, 떨리면 제 가슴도 떨립니다. 주변 사람들 감정에 민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 분위기가 안 좋으면 덩달아 가라앉는 단점도 있지만, 반대로 다른 이와 잘 공감하고 그들을 배려합니다.

이 때문에 눈치도 빠릅니다. 항상 다른 이의 마음을 생각하다보니 그들의 감정 변화에 민감하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잡아내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좋지 않으면 제 가슴도 그리 되니 항상 주변 분위기를 밝게 띄우려 노력합니다.

[배: 인정에 대한 갈망]

제 배는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부, 권력, 명예 가운데 명예를 가장 앞에 두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직 안에서 어떤 일을 맡으면 이를 완벽히 마치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제가 무엇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남에 대한 제 이미지를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이미지를 위해 속임수를 쓰지는 않습니다. 제 배는 남들뿐만 아니라 제 자신에게도 인정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속임수를 써서 돋보이면 제 자신에게 인정받지 못할 텐데,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머리+가슴: 다양한 의견에 개방적]

제 머리는 여러 시각을 종합하기를 좋아하고, 제 가슴은 주변을 포용코자 합니다. 이 둘은 저를 다양한 의견에 개방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저는 다른 이의 생각을 편견 없이 잘 듣고 이해합니다. 제 생각과 다르더라도 남의 시각에 공감할 줄 알고, 이를 통해 제 생각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잘 골라냅니다.

[가슴+배: 모두에게 좋은 친구]

제 가슴은 다른 이의 감정에 민감하고, 제 배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이 둘은 저를 남들이 좋아할 만한 친구가 되고자 하게 합니다. 남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것은 제 능력면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제가 좋은 동료라는 인정을 받고자 잘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어울리기 위해 항상 노력합니다.

[배+머리: 분석적 능력 갈구]

제 배는 인정에 대한 욕구가 강하고, 제 머리는 직관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직관적 통찰력만으로는 남들의 인정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구체적인 근거 없이는 남들이 그 결론이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석적 능력을 통해 그 근거를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직관적 성향으로서 자연히 갖게 되는 분석적 면에 대한 약점을 계속 보완하려 합니다.

[머리+가슴+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사람]

저는 저만의 직관적 사고로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신경 쓰기 때문에 능력이나 성과를 과시하고 다니지는 못합니다. 남들이 제게 방해가 된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데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신 제 자신을 가혹하게 대합니다. 과시하지 않아도, 남 탓하지 않아도 제 자신이 돋보일 수 있을 때 제가 진정으로 뛰어난 것이라고 여기고, 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합니다.

[조직이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목표달성을 위해 업무에서 더욱더 명확한 절차와 세밀한 프로세스가 요구된다. 동시에 복잡한 과정에서 본질을 놓치지 않는 단순함도 함께 요구된다]‘복잡함과 단순함’이라는 가치는 상충되는가? 이를 조화시키거나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본인의 의견을 기술하거나 사례를 제시해 논증하시오. (2000자 이내)조직 운영을 단순하게 하는 작업은 ‘복잡함 제거’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함을 어느 영역에 전가하고, 어느 영역을 단순하게 유지할지’의 문제다.[다양성: 피할 수 없는 복잡함]

큰 조직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다양성’이다. 여기에는 외부의 다양성과 내부의 다양성이 있다. 외부의 다양성은 환경의 복잡함이다. 모든 조직의 최종 목표는 단순하다. 다만 환경적 다양성이 이 목표 달성을 복잡하게 한다. 소비자의 다양한 요구는 기업의 이익 극대화 과정을 복잡하게 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장은 기업 생존 전략을 다변화한다. 결국 조직은 최종 목표 아래 다양한 종류와 단계의 중간 목표를 설정하게 되고, 이는 조직 운영을 복잡하게 한다.

내부의 다양성은 구성원의 다양성을 뜻한다. 조직이 커질수록 그 구성원들은 다양해지고, 이들의 개별적 목표는 조직 전체의 목표와 괴리된다. 이들의 목표와 조직의 목표를 일치시키기 위해 온갖 인센티브 제도를 설계하고 관리·감독을 강화하다보면 조직 운영은 복잡해진다. 한편 개별 구성원들도 행동반경이 좁아져 창의성 등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워진다.

[조직의 복잡함, 팀/개인에게 넘기기]

조직 내부 운영을 단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복잡함의 요소를 최대한 중앙에서 주변으로 옮겨야 한다. 즉 복잡함 관리를 조직 중앙에서 전담하는 대신 개별 팀이나 조직원에게 넘겨야 한다. 중앙에서 내부 절차와 프로세스, 다양하고 복잡한 중간 목표들을 일일이 관리하려 하면 최종 목표가 뒤로 밀리는 ‘목표-수단 도치’ 문제가 발생한다. 중앙에서는 기본적인 내용만 설정하고, 세부적 달성 방식은 하위 단위에 맡겨야 한다.

이는 조직의 책임을 개별 팀이나 구성원에 비도덕적으로 전가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성원 개개인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다양성을 바탕으로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직 내부의 복잡함을 복잡함이 어울리는 영역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효율적 복잡성 관리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조직 운영의 복잡함을 적당한 영역으로 옮길 수 있을까?

[방법 1: 프로젝트 단위 분업]

포디즘에서 비롯한 전통적 분업 방식은 직무 단위 분업이다. 한 개인은 한 업무만 기계적으로 수행하고, 조직은 이를 통해 전체 프로세스의 효율성을 도모한다. 하지만 이런 공장식 프로세스 설계는 복잡한 조직에는 맞지 않는다. 개개인이 자신이 맡은 단순한 직무만 수행하는 와중에 그 프로세스가 중간 목표들을 잘 달성하는지를 조직 중앙에서 모두 도맡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단위 분업’은 다른 표현으로는 ‘중간 목표 단위 분업’이다. 한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는 곧 조직 전체의 중간 목표 가운데 하나가 된다. 프로젝트 단위 분업 하에서 조직 중앙에서는 최종 목표 달성에 적합한 중간 목표를 ‘설정’하는 역할만 하고, 그 달성 방식은 개별 프로젝트를 맡은 개별 팀, 개별 구성원에 맡긴다. 이를 통해 조직은 개별 중간 목표 달성에 매몰되는 것을 피하고 최종 목표와 중간 목표 간 호응을 계속해 재검토할 수 있게 된다.

[방법 2: 재량과 책임 부여]

프로젝트 단위 분업과 필연적으로 함께 이뤄져야 하는 것은 재량과 책임 부여다. 각각의 외부 요인에 대응하기 위한 중간 목표, 이에 대응하는 프로젝트 팀을 중앙에서 꾸리면, 그 운영에 관한 것은 팀과 팀원들의 재량에 맡겨야 한다. 대신 그 성과에 대한 책임 구조를 설정해 최소한의 통제만을 가한다.

프로젝트 단위 분업과 재량/책임 부여는 내부의 복잡함을 통해 외부의 복잡함을 관리하는 것이다. 조직 내부의 복잡함을 야기하는 두 요인이 한 영역에서 겹치게 함으로써 조직 전체 운영은 단순하게 유지할 수 있다. 결국 ‘단순함’은 큰 그림이고, ‘복잡함’은 작은 그림이다. 조직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작은 그림에서는 과감히 손을 떼야 한다.

이 에세이 글을 싣기 위해 예전에 저장해뒀던 한글 파일을 보니 저장했던 시각(‘수정한 날짜’)이 오전 5시 33분이다. 현대카드 에세이 마감 시간은 오전 10시이므로 새벽에 24시간 하는 카페에 앉아 취준생들에게 흔하디 흔한 ‘새벽감성’으로 쓴 글이다. 피곤에 쩔어 중간 중간에 정신을 잃어가며 아무 정신없이 쓴 글이다. 그래도 당시 전체적으로는 내가 기발한 아이디어로 훌륭한 글을 작성하고 있다는 생각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면 거지같은 글이다. 애초에 구상했던 3분법이 좋은 아이디어였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 컨셉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도 잘 모르겠다. 문장도 매끄러운 맛이 하나도 없다. 내가 쓴 글이라고 말하고 다니기 참 쪽팔리다.

결국 난 2:1 경쟁률의 현대카드 에세이 전형에서 탈락해 면접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글을 저렇게 저 꼬라지로 썼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굳이 쪽팔림을 감수하고 저 글을 공개하는 건 나중에 다른 글들이랑 비교할 때 기준을 삼으라는 뜻이다. 나중 얘기지만 난 15년 상반기와 하반기에도 계속 현대카드에 지원했고, 서류전형과 시험전형을 통과해 에세이를 쓰게 됐다. 3번 연속이다. 14년 하반기에는 에세이 전형에서 탈락했지만 그 이후 15년 상반기와 하반기에는 모두 에세이 전형을 통과해 면접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합불에는 여러 변수가 있었을 거다. 읽고 채점하는 사람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다른 지원자들 글의 상대적 수준이 달랐을 수도 있다. 그래도 어쨌든 나중에 뒤의 2개의 에세이들과 비교해보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생애 첫 면접 × 삼성 = ?

내 생애 첫 면접은 공교롭게도 대한민국 초일류 기업에 속하는 삼성전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살 떨리는 일이었는데 더군다나 내가 좆도 모르는 소프트웨어 관련해서 지껄여야 하는 자리였다. 알지도 못했던 SCSA로 합격하고, SCSA가 도대체 뭔지 급하게 알아보고, 심지어 SCSA로 합격해서 입사한 현직자까지 지인을 통해 찾아 이런저런 설명까지 들었지만 여전히 내가 어떻게 내 자신을 어필해야 할지 감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삼성전자 SCSA 면접에 들어가기 전에 제출해야 할 게 있었다. 두 가지였다. 하나는 PT면접에서 활용할 포트폴리오(라 쓰고 그냥 PPT라 읽는다), 다른 하나는 에세이였다. 이 둘 다 합불과는 상관없이 그냥 면접에서 활용할 자료로서 제출하는 거였다.

특히 포트폴리오가 어려웠다. PPT를 내 맘대로 만드는 게 아니라 삼성전자에서 제공한 포맷에 맞춰 작성해야 했다. 여기에는 나도 모르게 얼떨결에 2지망으로 SCSA에 합격한 나로서는 도저히 제대로 채우기 어려운 항목들이 많았다.

– 나를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

– SCSA 지원 동기

– 스프트웨어 분야에 대한 관심도 (프로젝트 참여 경험)

– 소프트웨어 분야에 대한 창의적인 아이디어 제시

– 나의 커리어 로드맵 (SCSA에 선발된 경우)

– 나의 커리어 로드맵 (SCSA에 선발되지 못한 경우)

날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 좋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그런데 그 뒤부터는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지원 동기? 난 애초에 ‘지원’한 게 아니다. 그냥 영업마케팅으로 지원하면서 생각 없이 뭔가를 클릭했던 모양인데, 그게 SCSA 지원이었던 거다. 소프트웨어 분야에 대한 관심? 없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한 달 전부터 생긴 거다. 프로젝트 참여 경험? 당연히 없다. 스프트웨어 분야에 대한 창의적인 아이디어? 얼어 죽을…창의적인 건 고사하고 애초에 스프트웨어 분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른다. 커리어 로드맵? 커리어 로드맵??? 게다가 그것도 합격했을 때와 떨어졌을 때를 나눠서 쓰라고? 환장할…

대환장쇼

대환장쇼

그래도 어쩌겠는가? 창작력창의력이 아니다! 창의력이!을 최대한 발휘해서 어떻게 채우긴 했다. 결국 내가 던지고자 한 메시지는 ‘원래 소프트웨어 하고 싶긴 했지만 문과로서 기회가 없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SCSA라는 기회를 만났다’ 정도였다. 물론 구라다. 내가 SCSA가 뭔지 알아보기 시작한 뒤로 진심으로 SCSA에 합격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긴 했지만 그 정도로 날 뽑아줄 삼성이 아니었다. 그 전부터 간절히 원한 거라는 거짓 메시지를 던져야 했다. 설사 그게 거짓말이라는 게 티가 난다고 해도 그렇게라도 구라를 치는 게 최소한의 예의였다. 어쨌든 난 그렇게 억지로 포트폴리오와 에세이를 작성해 제출하고선 면접을 기다렸다.

삼성전자 DS부문 SCSA 면접은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삼성 반도체 단지에서 치러졌다. 당일 아침 일찍 강남 쪽(양재였나?)에서 집합해 정해진 시간에 다 같이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두 시간 정도 걸려서 면접 장소에 도착했던 거 같다. 면접 날 면접 대상자들이 거쳐야 하는 과정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인성검사1)컴퓨터로 진행됐다, 둘째는 PT면접, 셋째는 인성면접이었다. 순서는 조에 따라 달랐다. 내가 속한 조는 앞에 말한 그 순서 그대로 거치게 됐다.

인성검사야 그냥 무슨 컴퓨터실 같은 데 들어가서 마우스로 클릭해가며 봤고, 그 다음은 PT면접이었다. 미리 제출한 PPT 파일을 스크린에 띄워놓고 실무진 앞에서 그 내용에 대한 발표를 하는 거였다. 그리고 발표가 끝나면 몇 가지 추가 질문을 받고 마쳤다. 솔직히 너무 긴장을 많이 해서 그 자리에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일단 애초에 PPT 자료 자체를 개똥같이 만들었기 때문에 발표 내용도 개똥같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래도 그렇게 좌절하지는 않았다. SCSA에 2지망으로 합격한 사람이 면접 대상자 가운데 절반은 됐고, 그들이 애초에 소프트웨어에 관심이 있어서 그 자리에 서게 된 게 아니란 걸 면접관들도 뻔히 알고 있었다. 헛소리를 지껄이더라도 소신과 패기만 보이면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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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과 패기!!! …이게 아닌가

문제는 인성면접이었다. 사실 ‘인성면접’은 ‘임원면접’과 유사어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인성면접 면접관들은 임원급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도 면접관들 나이대로 봐서는 그런 듯했다. 들어가자마자 앞에 나이가 꽤 돼 보이는 면접관 3명이 앉아 있는데, 그들이 주는 압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PT면접을 하면서 긴장이 어느 정도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인성면접을 들어가면서 다시 새로운 긴장감이 올라왔다. 어쨌든 난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았고, 내 이력서와 자소서, 나중에 제출한 에세이를 토대로 온갖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역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오랜 공백이었다. 2006년도에 입학한 놈이 2014년까지 졸업을 안 한 상태니 그에 대해 묻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행시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답변을 하면 행시에 관한 질문이 쏟아지는 것도 당연했다. ‘행시는 왜 했나?’ ‘왜 안 됐나?’ ‘왜 그만뒀나?’ ‘더 이상 미련은 없나?’ ‘하면서 배운 점은 뭔가?’ 전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질문들이었지만 그래도 공세가 이어지자 슬슬 진땀이 광대를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내 고시 경험에 대해, 그리고 내 해명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시를 하다가 기업 공채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일단 냉정하게 말해 기본적으로 ‘실패자’다. 하지만 고시 공부를 하며 남들에 비해 더 쌓은 지식도 분명히 있을 거다. 과연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 건지는 면접관 마음이었다. 난 뻔한 질문들에 뻔한 답변들을 했고, 그 해석이 어떻게 이뤄질지는 운에 맡겨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난 고시 관련 질문이 아닌 엉뚱한 데서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내 이력서를 보다가 한 면접관이 미국 이민 생활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난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2001년 1월) 식구들과 함께 미국으로 넘어갔다가 고등학교 1학년 시작할 때(2003년 3월)에 한국에 돌아왔다. 분명히 이민으로 간 거였는데 2년 조금 넘기고 돌아오게 된 거다. 면접관이 그 이유를 물었다. 답변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질문이긴 했지만 어려울 건 없었다. 그냥 그때 상황을 솔직하고 편안하게 풀어서 얘기하면 될 일이었다.

“사실 그때 저희 가족만 갔던 게 아니라 다른 친한 집안이랑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간 지 2년 정도 됐을 때 그쪽 집 어머님이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셔서 그쪽은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걸 계기로 저희 집에서도 한국에 돌아올지 말지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미국에 계속 있고 싶어 하셨고,

미국 생활을 좋아하지 않으시던 어머니는 돌아오고 싶어 하셨습니다. 두 분 사이 의견 갈등을 조금 지켜보던 저는 하루는 아버지에게 ‘저 사실 정치하고 싶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대학도 나오고 군대도 다녀오고 싶어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정치에 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가 의견을 말하면서 균형이 깨져 돌아오게 됐습니다.”

사기업 면접에서 정치에 대한 꿈이 있었다는 소리가 위험할 수는 있겠지만 10년도 더 지난 어릴 적 일이니 별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을 거다. 문제는 ‘정치’가 아니었다.

“집안에서 목소리가 센가봐.”

아뿔싸!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별 생각 없이 지껄이다가 나도 모르는 새 스스로를 ‘조직 내에서 내 고집을 관철시키는 사람’으로 포장해버리고 만 거다. 면접관의 시니컬한 답변을 들은 난 그제야 내가 실수한 걸 깨닫고 이런저런 해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사실은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내가 열심히 해명하면 할수록 면접관들은 날 외면한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앞에 놓인 문서들을 살피며 다음 질문을 어떤 걸 할지만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내뱉은 말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난 벽을 쳐다보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생애 첫 면접을 삼성전자라는 거대 기업으로 치렀다. 예행연습 기회는 없었다. 이건 사실 좋은 걸 수도 있고 나쁜 걸 수도 있었다. 면접의 생리에 대해 잘 모르는 상황에서 별 생각 없이 들어가서 남들과는 다른 호기와 패기로 면접관을 매료시키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면 반대로 ‘면접식 답변’이 어떤 건지 잘 몰라서 면접관들이 원하는 포인트에서 벗어난 헛소리만 늘어놓다가 나오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불행히도 난 후자였다. 남다른 호기와 패기를 보이기에 나는 너무 움츠러들어 있었다. 계속된 고시 실패와 남들보다 늦어진 나이를 스스로 너무 강하게 인식한 나머지 ‘들어가서 다 씹어 먹겠다’는 패기를 부리지 못했다. 면접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난 내가 한없이 작아져 있음을 느꼈다.

글/ 개똥그릇

편집 및 교정/ 이점

< 이전화, 99개의 자소서를 쓴 남자, 14년 하반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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