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자시죠?”

태어나서 이런 질문을 경험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도, 심지어 말 한 마디 안 해보고 스쳐 지나간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들 내가 이성애자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를 이성애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동성애자일 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테다. 일반적으로 이성애자의 비율이 동성애자를 비롯한 여타 성소수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건 사실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성애가 아닌 다른 성적 지향은, 명백히 존재하지만 내 주변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엇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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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인다고 없는 거 아님

보이지 않는, 혹은 보여선 안 되는 사람들

“남자친구 있으세요?” 평소와 다를 것 없었던 이 질문에 한 번은 속으로 ‘내가 동성애자면 어쩌려고?’하며 괜히 딴지를 걸었다. 만약에 내가 동성애자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없으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성 애인이 있다면 마냥 없다고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거기에 대고 나는 동성애자고, 애인이 있다고 커밍아웃을 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 같다. 그냥 “네, 만나는 사람 있어요” 정도까지가 최선이었을 것 같다.

일상에서 이뤄지는 별 뜻 없는 대화에도 이성애주의는 뿌리 깊게 자리해있다. 소개팅의 상대는 항상 이성이고, ‘애인’이라는 중성적인 단어를 쓴다 해도 이미 우리는 그 사람이 이성 일거라 쉽게 가정한다. 커플이라고 하면 항상 여성 한 명과 남성 한 명이 등장하고 ‘남남케미’나 ‘걸크러쉬’ 같은 단어 역시 이성애가 아닌 것을 배척하는 과정에서 존재한다. ‘게이 같다’거나 ‘레즈 같다’처럼 노골적으로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는 표현도 있다. 어느 누구도 ‘이성애자 같다’는 표현은 쓰지 않는데 ‘동성애자 같다’는 말은 그렇게나 자주, 꼭 부정적인 방향으로 쓰인다. 사회의 요구 수준에 준하는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어쩌면 동성애자일지도 모르는 사람들로 ‘구별’ 당한다. 그리고 이 구별이 차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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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자고 한 소리인데 뭘 그렇게 받아들여”라고 생각된다면 안 웃기니까 하지 말자.

중고등학교 때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자아 정체성을 한창 형성해나가는 그 시기에 동성의 학생들 밖에 없는 교실에서, 또 학교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연애하면 안 되니까” 남녀를 ‘구별’하는 분반의 이유를 직접 이렇게 말해준 선생님이나 부모님은 없었지만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남녀공학에 다니면 ‘딴 데’에 정신 팔려서 공부를 못하니까, ‘사고 쳐서’ 임신할 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남학교와 여학교로, 혹은 남녀 분반의 교실로 매일 등교해야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남녀 분반이라는 단순하고도 오래된 구습 역시 지독한 이성애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성애가 아닌 성적 지향을 가진 학생들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혹은 있어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멍청한 교육 방식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성인 자녀가 커밍아웃을 하면 여전히 많은 부모들이 남학교나 여학교, 혹은 군대를 그 ‘문제’의 원인으로 꼽는다. 이성을 만날 기회가 더 많았더라면 네가 동성애자가 ‘되진’ 않았을 거라는 낡은 의식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는 내용의 군형법 제 92조 6항이 헌법재판소에서 합헌 결정을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11년 당시 헌법재판소는 “젊은 남성 의무복무자들이 이성 간의 성적 욕구를 원활하게 해소할 방법이 없는 상대에서 장기간 폐쇄적인 단체생활을 해야 해 동성 간 비정상적 성적 교접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라고 판결소지를 밝힌 바 있다. 지위를 이용해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저지르는 것은 성별을 불문하고 어디에서나 항상 일어나는 폭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항문 성교’를, 실제로는 항문 성교로 대표되는 동성애를 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하다 보니, 동성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도 군형법으로 처벌받아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스페인에서는 정말 많은 10대들이 성정체성의 혼란과 그로 인한 차별 때문에 자살을 한다. 한편 OECD 국가 청소년 자살률 1위 자리를 몇 년 째 내놓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자살의 압도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물론 사실이다. 그 어떤 나라도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밤 열 시까지 학생들을 붙잡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청소년들이 자살하는 이유로 성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꼽히지 않는 건 아마 그들이 ‘고작’ 성 정체성 때문에, 공부가 아닌 이유로 자살을 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정답’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고, 혹은 여대를 졸업하고. 각 개인이 일정 시간 인구의 절반과 격리된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사회에 나오면 결혼제도라는 또 다른 이성애주의의 ‘괴물’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은, 아니 아마 앞으로도 오랜 시간동안 이성애자들을 위해서만 존재할 이 사회 제도는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 구성원으로 다시 한 번 ‘구별’ 짓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확하게는 제도가 허락해주지 않는 결혼 상대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차별 받는다.

나이가 많든 적든, 능력이 얼마나 뛰어나든, 심지어 내가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인생에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마치 진정한 어른이 되는 의식을 건너뛴 사람처럼 여겨진다.

개소리는 집어치웡...

그래서 우리 대통령님도 그 대단한 대통령 자리까지 가서 가정을 안 꾸려봐서 뭘 모른다고, 살림 안 해봤다고, 애 안 키워봤다고… 별 희한한 잔소리를 다 듣지 않는가

요즘이야 많은 사람들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결혼을 예전만큼 필수적인 무엇으로 느끼지 않는다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결혼을 삶의 ‘정답’처럼 제시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정답’을 택한 한국인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많지 않다. 유럽에 와서야 “아, 결혼이라는 게 이렇게 순수하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결혼처럼 개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적 압박에 떠밀려 했다면 당연히 그 생활이 행복할 리 없다. 그래서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이 근사한 행복은, 한국 사회에서 고작 ‘무덤’ 따위로 불린다. 결혼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로맨틱하면서 안정적인 제도이지만, 누군가는 결혼으로 자신의 청춘을 묻고, 경력을 묻고, 자신 스스로를 묻는다.

웃기지도 않다.

웃기지도 않다.

간혹 누군가가 결혼 생활을 행복해 하기라도 하면 “시간 지나봐”, “애 낳아봐” 하며 언젠가 너에게도 불행이 닥쳐올 것이라 공연히 말한다. 이렇게 불행한데도 모두가 하나 같이 결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결혼이 자신이 이성애자임을, 그러니까 사회가 말하는 ‘보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하고 대중적이며 강력한 선전이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이미 동거 제도나 동성혼이 합법화 된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결혼 ‘적령기’에 초조해하지 않는다. 방법이 어찌됐든 사랑하는 사람과 내 인생의 순간을 함께하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외국의 결혼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과 보다 안정적으로 함께하기 위한, ‘순수한 선택’으로 성립된다. 하지만 한국의 결혼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찾은 결과로 성립되곤 한다.

레디메이드 인생과 차별사회

적당한 나이에 졸업해서, 적당한 곳에 취직하고, 너무 늦지 않은 나이에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오순도순 사는 것, ‘평범한 삶’을 얘기할 때 그려지는 이미지는 대개 이렇다. 하지만 이 평범한 삶에는 ‘이성애자로 태어날 것’이라는 치명적인 조건이 숨어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라는 의무 교육 과정을 거치고, 의무는 아니지만 의무처럼 느껴지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해, 안정적인 직장을 찾은 서른 무렵, 만약 우리의 인생에 결혼이라는 선택지가 없다면, 그 때는 어떻게 살아야 평범한 삶일까.

한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이런 식이다. 사회가 원하는 정답에 맞춰가기 위해 단계를 밟고, 이왕이면 그 단계마다 좋은 성과를 내야하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무능력하다거나 이상하다는 소리를, 단 한 순간도 원해보지 않았던 사회로부터의 불쾌한 평가를 들어야 한다. 그 중 하나는 ‘게이 같다’거나 ‘레즈 같다’는 소리일 것이고, ‘왜 이렇게 뚱뚱하냐’, ‘관리 좀 해라’ 같은 외모에 대한 간섭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보통의 체형, 보통의 외모, 보통의 인생을 위해 살아야 한다. 아마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우리의 일생은 보통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순간의 연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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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견 하지 마

하지만 사실 한국에서의 ‘보통’은 모순적이게도 항상 보통 이상이다. 우리가 소수자에 대해, 비주류에 대해 눈을 닫고 사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창 흙수저와 금수저가 논란이 됐을 때 모두들 자신의 불행한 삶에 대해 경쟁하듯 한탄했지만 정작 사회에서 이미 흙수저로 ‘구별’당한 사람들은 이 논란 자체에 끼질 못한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게 이성애자에겐 별다를 것 없는 보통의 삶이지만, 동성애자에게 보통의 삶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종차별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유럽 여행에서 겪는 인종차별이 서럽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피부색으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한다. 차별의 대상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애초에 인정하질 않으니까, 우리 사회가 차별적이라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다.

도대체 내가 스무 해 넘게 발을 붙이고 살아온 이 한국이라는 사회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소수자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차별하면 안 된다는 ‘차별금지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조차 성소수자들이, 또 다른 누군가가 차별 당한다. 그들을 위해 복지제도를 시행한다거나 무언가를 하겠다는 법안이 아니라, 차별을 비롯한 어떠한 사회적 행동도 하지 말자는 법안이 21세기, 그 잘난 OECD 국가에서 몇 년 째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 소수자의 삶은 무엇이며, 평등이란 가치는 무엇일까.

결국 나는 이 지독한 이성애주의 사회에서 이성애자라는 이유로, 사회 불평등이 극심한 사회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내 삶의 무게를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는 그 삶의 무게를 절대 나눠 질 생각이 없다. 대신 나에게, 그저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 짐은 소수자의 몫이라고, 그들을 괴롭히라고 끊임없이 조장한다. 이것이 우리가 차별이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 계속 차별을 하게 되는 이유, 한국 사회가 한결같이 불평등 사회인 이유다.

편집 및 교정/요정

글/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