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개의 자소서를 쓴 남자, 14년 하반기
8편: Make-up Exam

Make-Up Exam

한창 인적성 시험들이 몰려 취준 바닥이 정신없을 무렵, 난 붙은 게 별로 없어 별로 바쁘지 않았을 무렵 어느덧 중간고사 시즌이 다가왔다. 보통 취준을 병행하는 마지막 학기에 4과목 12학점이면 그리 부담스런 양은 아니었다. 게다가 일부러 학점 따기 쉬울 거 같은 과목들로 골라 신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10월 중순이면 아직 마감하지 않은 기업들 자소서를 쓰는 한편 슬슬 몰아치는 인적성 시험들을 준비해야 할 시기라 중간고사 준비가 만만치만은 않았다. 특히 우습게 생각했던 ‘대학생중급영어’라는 과목이 복병이었다. 어휘 위주로 시험을 낸다고 했는데, 단어 수준이 생각보다 높았다. 영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나였지만 따로 시간을 내서 공부하지 않으면 반타작도 겨우 할 판이었다.

난 수업 시간에 들은 대로 플래너 10월 페이지를 열어 수요일에 ‘대학생중급영어, 19:00’라고 적어놓았다. 시험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셨는지 원래 강의 시간이 아닌 저녁으로 잡혔다. 취업 준비에다가 다른 과목들 시험 준비까지 다 겹쳐 있던 터라 난 시험 바로 전날부터 벼락치기에 들어갔다. 솔직히 100점을 맞을 자신은 없었다. 모든 단어들을 완벽하게 암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낮은 편인 내 평점(3.64)을 마지막 학기에 더 깎아내릴 순 없었기에 최대한 똥줄을 조이며 준비했다. 시험 날 잠이 부족해 비몽사몽 상태로 하루를 버틴 난 저녁 7시가 다가오자 시험을 보기로 한 강의실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던 터라 건물 내부는 조용했다. 난 내 발자국 소리가 빈 복도 벽에 부딪혀 메아리치는 걸 들으며 시험 강의실로 걸어갔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강의실 근처까지 다가가도 복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늦었어도, 아무리 수강생이 많지 않더라도 분명 누군가는 화장실을 가든 뭘 하든 복도에 보여야 할 텐데, 이상하게 한 명도 없었다. 내가 늦었나? 급히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지만 아직 7시가 되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난 막판에 급히 발걸음을 빨리해 강의실 문고리 위에 손을 올리고 조심스레 열었다. ‘음…….’ 쉽게 사태가 파악되지 않았다. 강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단 한 명도 없었다. 불도 꺼져 있었다. 몇 분 뒤 7시에 이 강의실에서 중간고사를 치를 모양새가 아니었다.

무언가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 되었다는 이 직감

무언가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 되었다는 이 직감

난 급히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틀고는 학교 포탈에 접속했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오른손 검지가 조금씩 떨려왔지만 난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위로했다. 아마 내가 실수로 강의실을 잘못 받아 적었을 거라 생각했다. 강의실을 다시 확인한 뒤 급히 그리로 가서, 조금 늦게 도착하더라도 서둘러 시험을 보기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아뿔싸! 중간고사 공지 글을 확인한 순간 머리가 멈췄다. 강의실을 잘못 적은 게 아니었다. 날짜를 잘못 적었던 거다. 수요일인 줄 알았던 중간고사는 하루 전 화요일에 이미 봤던 거다.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시험 날짜를 착각하다니…. 그 순간 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그때 그 자리에서 몇 분이나 멍 때리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내가 됐다’는 느낌이 서해 바다 밀물처럼 서서히 밀려 들어오던 그 더러운 기분만 기억이 난다. 너무 당황한 난 뭐가 옳은 행동인지 판단할 여유도 없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며칠 전 조별 발표 관련해서 교수님에게 전화를 받았던 게 생각났던 터였다. 난 통화 목록을 뒤져 교수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 아니, 누르려다가 문자 발송 버튼을 눌렀다. 문자 창이 떴다. 하지만 뭐라고 적어서 문자를 보내야 할지 몰랐다. 제가 날짜를 착각해서 시험을 못 봤으니 다시 보게 해주세요? 제가 불쌍한 취준생이라서 그러니 시험 안 봤어도 기본 점수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 뭐라고 적어야 하지? 정답이 나올 턱이 없었다. 사실 애초에 시험 날짜를 놓쳐서 교수에게 문자를 보낸다는 거 자체가 콧방귀나 나올 일이었다.

swingsaveme

그래도 보내야 했다. 옳은 행동이든 잘못된 행동이든 일단 보내는 봐야 했다. 이대로 F를 띄울 순 없었다. F를 띄우게 되더라도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살할 것만 같았다. 결국 난 이런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대학생중급영어수업듣는개똥입니다!
선생님정말죄송한데
혹시중간고사어제저녁에본건가요?
이런질문드려서죄송합니다…

여기에 이 문자 내용을 적기 위해 휴대폰에 저장돼 있는 예전 문자를 뒤져 다시 읽었는데, 기분이 참…. 어쨌든! 이렇게 보냈다. 한참이 지난 지금도 이때를 생각하면 창피해서 손발이 오글거린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창피하고 나발이고도 없었다. 그냥 안 그래도 낮은 내 학점을 조금이라도 마지막에 끌어올려야 할 때 오히려 깎아먹게 생겼으니 너무 속상했다. 그리고 내 전체 평점에 영향을 별로 안 준다고 하더라도 일단 내 마지막 성적표에 ‘D’나 ‘F’가 찍혀 나올 걸 생각하니 정말 진심으로 눈물이 나려 할 지경이었다. 위와 같이 문자를 보내놓고는 난 몇 시간 동안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붕 떠 있었다. 간절히 답장을 기다렸다. 교수님에게 욕을 처먹더라도 일단 대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날 교수님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교수님에게 답장이 온 건 그 다음날 오전이었다.

“전화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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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여러 패턴의 답변을 상상했지만 이건 생각 못 했다. 한글 4자로 사람을 그리 두렵게 만들 수 있는 건지 몰랐다. 차라리 욕을 하시지…. 난 10분 정도 혼자 무서워하며 벌벌 떨다가 겨우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었다. 똥꼬와 발가락 끝에 힘을 잔뜩 주고 통화 신호음이 나오는 몇 초를 간신히 버텼다. 최악을 상상했다. 일부러 교수님이 받자마자 내게 한심하다는 듯 욕을 퍼부을 걸 상상했다. 그래야만 뭐든 버틸 수 있을 거였다. “여보세요?” 바……받으셨다. 올 것이 왔다. 난 급히 목을 가다듬고 안녕하세요 개똥인데요 어쩌고저쩌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교수님의 목소리나 말씀 내용은 내 예상을 매우 크게 빗나갔다.

“내가 가르치는 다른 강의 시험이 오늘 저녁인데, 그때 와요. 시험지 챙겨 갈게요.”

천사가 있다면 교수님일까? 하루 전에는 당황스러움에 눈물이 날 뻔하더니 이번에는 황송함에 눈물이 나려 했다. ! 물론 시험을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하루 늦었으니 제때 봤을 때와 같은 수준의 점수는 못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난 그래도 중간고사 0점은 면한 거다. 그게 어디냐? 이제 못해도 ‘C’ 정도 학점은 받을 수 있게 됐다. 시험을 정말 잘 보면 최고 ‘B+’까지도 가능하겠지……. 뭐가 됐든 난 제대로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그날 저녁 시험을 보러 갔다. 민망함이 가득한 채로 강의실에 들어갔지만 교수님은 감사하게도 다정하게 날 맞아주셨다. ‘요새 취업이 얼마나 힘들고 정신없으면 시험 날짜를 다 까먹니?’ 교수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눈빛으로 보내주시는 듯했다.

한참 나중 얘기지만, 난 결국 이 강의에서 ‘A’ 학점을 받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하루 늦게 본 중간고사와 제때 본 기말고사 모두 성적이 상위권이었다고 한다. 원래는 ‘A+’을 줄 성적이었지만 중간고사를 하루 늦게 봐서 ‘A’를 주신 거였다. 물론 한 단계만 깎인 게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이 강의가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 강의였다는 거다. 내가 분에 넘치는 학점을 받은 건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남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진 않았다. 참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게 솔직히 사실이다. 이 마지막 학기를 마친 뒤 내 전체 평점은 ‘3.64’에서 ‘3.65’로 모기 코딱지만큼 올랐다. 만약 결국 이 강의 중간고사를 보지 못했다면 내 학점은 오히려 내려갔을 거다.

 

만화/이점 for Misf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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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자소서 시리즈는 취준생의 자소서쓰기, 학교생활, 연애 등 취준을 하면서 겪은 일상에 대한 연재물입니다. 다음 주 연재분에서는  모두가 기다리셨던 자소서에 대한 내용이 나오니 기대해주세요!

편집 및 교정/ 이점

글/ 개똥그릇

<이전화, 99개의 자소서를 쓴 남자, 14년 하반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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