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개의 자소서를 쓴 남자, 14년 하반기
7편: SCSA가 뭔가염? 먹는 건가염? / 정신나간 제정신

SCSA가 뭔가염? 먹는 건가염?

행정고시 1차 전형인 PSAT(일명 ‘피셋’)는 보통 2월에 치러진다. 발표가 보통 4월이니 2달 정도 동안은 2차 시험을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결과가 나오고 합격을 확인한 뒤에 2차 공부를 시작하면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미리 가채점을 해보고(행시는 문제지를 가져올 수 있다) 합불을 짐작해본다. 물론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일반행정 직렬 기준으로 평균 80점이 넘으면 안정권으로 볼 수 있지만 70점대라면 골치가 아파진다. 붙는다면 바로 몇 달 뒤를 보고 타이트하게 준비해야 하고, 떨어진다면 내년을 생각해 다시 기초부터 다져야 하는데, 그걸 쉽게 알 수가 없다.

1차 시험 직후에는 ‘행시사랑’이라는 다음 카페에서 설문조사가 이뤄졌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대강의 커트라인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면 <법률저널>이라는 신문사에서 예상 커트라인을 내보냈다. 문제는 이 예상 점수들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커트라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안감에 떨 수밖에 없었다. 나도 입대 전 마지막으로 본 2012년도 시험 때 1차가 붙을 줄 알고 휴학 상태로 2차 준비를 하다가 한 문제 차이로 떨어져서 좌절했다. 1년에 한 번 밖에 없는 시험이기에 붙을지 떨어질지 잘못 판단하고 움직였다가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의 타격은 정말 크다.

ㅓㅏㅏ아ㅏ....어쩌지.........

ㅓㅏㅏ아ㅏ….어쩌지………

하지만 기업 인적성 시험은 행시만큼 그 결과가 수험생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않는다. 우선 1년에 한 번인 행시와 달리 대기업 공채는 1년에 두 번 있고, 얼마나 많은 회사에 지원하는지에 따라 수십 번의 기회까지도 가질 수 있다. 단 기업 인적성 시험은 행시보다 그 결과를 예측하는 건 훨씬 더 어렵다. 수험생이 문제지를 가져오지 못하고 다시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시험 보는 도중에 느낀 감으로 예측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행시보다 훨씬 어렵다. 행시는 단순히 세 과목 평균을 내서 점수대로 줄을 세우지만, 기업 적성평가는 직무 등에 따라 특정 과목에 가중치를 부여하기도 한다는 얘기가 있다. 게다가 인성검사까지 같이 볼 경우, 적성검사를 아무리 잘 봐도 인성에서 걸러질 수도 있는 일이다.

2014년 10월 18일 토요일 오후, 난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왜 학교를 가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성적증명서나 졸업예정증명서 같은 서류를 떼러 갔을 거다. 평소에는 버스 안에서 참 잘 자는 성격이지만 그 날따라 잠이 오질 않았다. ‘실버스타’님의 기사 때문이었다. 실버스타(이름에서 나온 별명)라는 한 신문사의 기자님께서 이틀 전인가에 그날 SSAT 발표가 난다고 기사를 냈는데 결국 그날은 나오지 않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날이 지나가고 바로 이틀 뒤에 발표가 난다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그날이 오늘이었다. 이번에는 실버스타님 기사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많이 났고, 각종 취업 관련 카페에서도 신빙성이 있다고 하고 있던 터였다. 난 버스에 앉아 발표가 안 나나 계속 카페 글을 새로고침하며 살펴보고 있었다.

…났단다! SSAT 결과 발표가 났단다. 난 바로 스마트폰으로 삼성 채용 사이트로 접속했다. 발 빠른 취준생들이 몰려서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다운되지는 않았다. 역시 삼성! 서버 용량도 아주 넉넉하게 해두고 있었나보다. 갤럭시 S4 ‘미니’ 모델에 쿼티를 썼던지라 좁은 자판으로 천천히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는 ‘결과보기’ 버튼을 눌렀다. 페이지 넘어가는 동안 동그란 회오리 모양이 화면 가운데서 빙글빙글 돌며 버퍼링이 되는데, 하도 심장이 떨려서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어 오른손으로 화면을 덮어 가렸다. 그리고 겹쳐진 화투 패를 천천히 쪼아보듯이 실눈을 뜨고 손을 서서히 내리며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맨 위에 적힌 문구를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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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았지만 합격이었다. 난 분명 시험을 망치고 나왔는데 어떻게 붙었지? 내가 내 천재성을 너무 과소평가 하고 있었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시험을 더 망친 건가? 그렇다면 그동안 그리 삽질을 했던 행시 1차 PSAT 공부가 취업에서는 또 빛을 발하는 건가? SSAT 합격 결과를 확인한 난 휴대폰 덮개를 덮고 혼자 흐뭇한(남들이 봤다면 음흉했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10초 정도 지난 뒤에 다시 덮개를 열어 문구를 확인했다. 합격이었다. 다시 덮개를 덮고 또 병신같이 혼자 웃다가 다시 확인했다. 이걸 한 열 번은 반복했던 거 같다. 우리나라 최고 수준으로 치는 삼성전자 면접을 가게 되다니! 게다가 삼성 면접은 하루에 다 끝나기 때문에 결국 최종 단계만 남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행정고시 한답시고 그리 고생하다가 드디어 내 인생이 조금은 풀리는가 싶었다.

하도 신이 났던지라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는 새 학교에 도착했다. 필요한 서류들을 떼고 학교 주변 복사집으로 스캔을 했던 거 같다. 아마 당시에 서류들을 파일로 업로드 제출하게 했던 데가 있었을 거다. 볼일을 마치고는 ‘콩밭’ 카페로 갔다. 내가 좋아하던 지금은 없어진 흡연석에 자리를 잡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켰다. 부팅이 되자마자 크롬 창을 띄우고 다시 삼성 채용 사이트에 접속해 로그인했다. 뭔가 전산 오류가 생겨서 원래는 불합격인데 휴대폰으로 접속하면 합격으로 보이는 사태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 합격에 대한 무의식적인 집착이 강해 착시현상이 생겨서 잘못 봤던 걸 수도 있다. 그래, 취준생이 되면 온갖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이 커진다. 어쨌든 접속했다. 떴다. 합격이었다. 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휴대폰으로 확인할 때는 위쪽만 읽어서 몰랐는데 내가 SCSA DS부문에 합격했다고 적혀 있었다? SCSA? DS? 뭐지? 난 영업마케팅으로 지원했는데……. 영업마케팅을 ‘SCSA’나 ‘DS’라고 부르기도 하나? 아니면 하나가 영업이고 하나가 마케팅인가? 그러면 뭘 줄인 말이지? 난 멘붕에 빠졌다. 혼란에 빠진 채 바로 인터넷에 검색해봤다. SCSA… ‘Samsung Convergence Software Academy’의 약자란다. 소프트웨어? 웬 소프트웨어? ‘DS’는 ‘Device Solutions’의 약자로,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부를 지칭하는 말이란다. 그럼 뭐야? 내가 반도체사업부 소프트웨어 직군으로 합격했다는 건가? 난 분명히 영업마케팅으로 지원했는데? 난 문돌인데? 소프트웨어??? 뭔 개소리지……

알고 보니 이랬다. 삼성그룹에 지원할 때는 한 계열사 한 직무로만 지원할 수 있는데, 지원서 작성을 다 마친 단계에서 예외적으로 몇 경우에만 ‘SCSA라는 것도 있는데 너 혹시 네가 지금 지원하는 데 탈락하면 이거라도 할래?’ 이런 식의 질문이 떴던 거다. 그리고 난 분명히 그러겠다고 클릭을 했을 거다. SCSA가 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무심결에 눌렀을 거고, 그래서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던 거다. 그리고 선택사항 중에 아무 생각 없이 DS부문을 선택했을 거다. 결과적으로 난 1지망으로 영업마케팅, 2지망으로 SCSA에 지원한 셈이었고, 그 중 1지망에서는 탈락(?)하고 2지망으로 합격했던 거다. 결국 난 소프트웨어(코딩)을 다루는 사람으로 삼성전자에 입사하기 위한 면접을 보게 된 거다.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난 바로 SCSA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아냈다.

– SCSA(Samsung Convergence Software Academy)는 이공계 출신이 아닌 인문계나 예체능계 출신을 선발해 6개월 간 소프트웨어(코딩) 교육을 한 뒤 S직군(소프트웨어)으로 보내는 프로그램이다. 다시 말해 문돌이(또는 예체능생)를 코딩 기계로 탈바꿈시켜주는 프로그램이다.

– SCSA는 삼성그룹 계열사들 중에서도 삼성전자와 삼성SDS 두 군데만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회사 문과계열 직무에 지원하는 사람들만 ‘2지망’이란 게 존재했던 셈이다.

– SCSA는 아예 지원할 때 1지망으로 선택해서 지원도 가능하다. 단 이렇게 지원할 경우 2지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 삼성SDS는 통합으로 선발하고, 삼성전자는 CE/IM부문(백색가전/모바일)과 DS부문(메모리반도체) 가운데 선택해서 지원할 수 있다.

– 총 선발 인원은 대략 50명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not sure) 그런데 1지망 지원자와 2지망 지원자 쿼터가 따로 있다고 들었다.

– 교육기간 6개월 중 처음 2개월은 150만 원, 나중 4개월은 250만 원을 받는다. (not sure)

– SCSA를 통해 입사하는 경우 2년 동안은 퇴사할 수 없다. 만약 중간에 퇴사하게 되는 경우 6개월 치 교육비를 토해내고 나가야 한다.

– 교육과정은 빡세다. 중간 중간에 여러 번의 시험을 보는데, 몇 회 이상 기준 미달이면 쫓겨난다. 이 경우에도 그동안의 교육비를 토해내고 나가야 한다.

음…참 골치 아프게 됐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소프트웨어 쪽으로 면접 준비를 해야 하다니…. 게다가 SCSA 전형 지원자는 면접에 들어가기 전에 회사 측에서 제공하는 파워포인트 파일의 포맷에 맞춰 포트폴리오(라고 하지만 사실 자기소개 PT)를 작성해 제출해야 하고, 면접에 가서는 이걸 이용해 발표하는 PT면접이 포함돼 있었다.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왜 SCSA에 지원했는지’ 등의 페이지도 포함돼 있었는데, 난 지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지원했냐고 물으니 뭐라고 작성해야 할지도 몰랐다. ‘소프트웨어에 대한 관심’도 표현을 해야 했는데, 관심이 없는데 뭔 관심을 보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여러 가지로 멘붕이었다.

그런데 멘붕에 빠진 와중에 내 마음 속에는 이상한 감정이 맴돌기 시작했다. 알지도 못하고 있었던 SCSA인데 이상하게 영업마케팅으로 지원할 때보다 합격하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커지고 있었던 거다. 소프트웨어라…. 문과생으로서 취업난을 너무 힘겹게 겪고 있었던 터였을까? ‘인문계 출신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는 삼성의 표현이 너무도 와 닿기 시작했다. 문송이로서 기껏해야 영업 쪽이나 경영지원 쪽밖에 지원하지 못했던 게 한편으로 서럽기도 했는데, 이공계생들만의 전유물인 영역에 발을 들일 상상을 하니 괜히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한번 코딩을 제대로 배워서 그 잘난(?) 이공계생들과 제대로 붙어보고 싶었다. 내 적성에 코딩이 맞을지 안 맞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새롭고 특별한 도전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 난 내 뒤통수를 후려친 SCSA와 참 답 없는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2014년 하반기 내 첫 번째 취준 목표는 삼성전자 SCSA로 설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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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함 해보자!

정신 나간 제정신

미국의 ‘American Idol’을 보면 처음 오디션 단계에서 별의 별 이상한 참가자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참 신기하게도 이들은 모두 실력과 상관없이 자신감이 넘친다. 애초에 이상한 참가자들만 방송으로 내보내는 건지, 아니면 우리와는 다른 서양 사람들만의 마인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청자들은 이들의 병맛 노래를 들으며 손가락질 하고 낄낄댄다. 우리나라에서는 ‘슈퍼스타K’가 이런 형식을 따라해 오디션 단계에서 몇몇 수준 높은 병맛들을 내보낸다. 반면 ‘K팝스타’는 이런 골 때리는 놈들을 방송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하지만 난 봤다. 어떻게? 내가 직접 갔으니까…

2차 ‘부스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오디션 장소에 도착했더니 내 눈앞에 TV에서나 봤던 신기한 풍경이 펼쳐졌다. 건물 안쪽은 물론이고 바깥에서부터 수많은 참가자들이 참가번호가 적힌 종이를 옷에 붙이고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다. 좀 수줍은 듯 구석에 박혀 조용히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주변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고 큰 소리로 불러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는 곧잘 부르는 사람도, 도대체 왜 여기 와 있는지 알 수 없는 음치들도 있었다. 복장도 가지각색이어서 특이하게 입은 사람들만 모아놓으면 집시 촌이 따로 없었다. 신기했다. 지금껏 한국 땅에 살면서 이렇게 많은 별종들이 한 자리에 모인 걸 본 적이 처음이었다.

보아하니 역시 1차 전화 오디션은 변별력이 매우 떨어지는 듯했다. 전화로 녹음해서 보낸 걸로 심사를 하니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경우도 많았을 거고, 솔직히 다른 사람이 대신 불러주는 것도 거를 수 없었을 거다. 결국 이번 2차 부스 오디션이 중요했다. 여기서 통과한다고 우승이나 생방송 출연에 크게 근접하는 건 아니었겠지만 최소한 ‘정상’ 범주에는 들 수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결국 ‘범인凡人’1)편집자 주. 범죄자가 아니다! 범죄자가! ‘별종’ 두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노래를 할 줄도 모르면서 자신이 스타가 될 재목이라고 착각하는 이들 사이에서 난 그래도 노래를 ‘한 가닥’ 한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그래야 난 ‘범인’으로 인증받을 수 있었다. 그 방법은 단 하나였다. 2차 부스 오디션에서 통과하는 것!

오디션장에는 총 15개 정도의 부스가 설치돼 있었다. (기억으로는 A부터 S 정도까지)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알파벳들이 순서대로 붙어 있는 접수대가 있었고, 이 가운데 아무데로나 가서 접수를 하면 그 알파벳의 부스에서 오디션을 보게 되는 시스템이었다. 공지된 시간보다 일찍 갔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행사인지라 도착한 뒤에 접수를 하고 못해도 3-4시간 정도는 대기를 했던 거 같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갔기 때문에 매우 지루하고 힘들었던 게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여기저기에 포진해 있는 또라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또 그 와중에 서로 친해져서 ‘님 너무 잘하세요’ 토 나오는 칭찬을 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눈을 돌리는 곳곳이 TV에서나 보던 장면들이었다.

한 3시간 정도를 그렇게 멍 때리며 충격의 장면들을 구경하고 있었을까? 어느덧 내 번호 순서가 다가왔고 난 부스들이 설치돼 있던 메인 대기장으로 향했다. 미리 설치돼 있는 모니터들을 통해 각 부스별로 다음 순서 대기자들이 떴고, 내 번호가 뜨면 그 부스로 찾아가 줄을 서서 기다리다 부스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내 부스에 가까운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하염없이 내 번호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웬 대갈통 하나가 내 시야 범위 오른쪽 끄트머리에서부터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웬 남정네 하나가 내 앞쪽으로 고개를 쑤셔 밀며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1초 정도 동안은 ‘뭥미?’, 그 다음 1초 동안은 ‘응?’,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엥?’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왠지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놈이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똥개초등학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는 놈이었다. 이놈과 난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당시 이 친구는 체격이 좋고 운동도 잘하고 얼굴도 꽤 생겼던지라 여자애들한테 꽤나 인기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참 못 보다가 다시 만나게 된 건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됐을 때다. 그때도 초등학교 때와 크게 변한 거 없이 꽤나 멋있는 애였는데, 한 가지 달라진 건 공부 실력이었다. 어디서 누구한테 머리를 얻어맞았는지 연필 한 번 안 잡던 놈이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해서 고등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 때 전교 1등을 차지해버렸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고 언젠가부터 학교에서 보이지 않게 됐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해외로 유학을 갔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대강 들은 내용은 이랬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계속 해오다가 가수에 대한 꿈이 있어서 작년부터 오디션에 도전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K팝스타’는 이번이 2번째고, ‘슈퍼스타K’나 ‘Voice of Korea’ 등에도 도전을 했다고 했던 거 같다. 이번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오디션을 보러 왔고, 현재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상태라고 했다. 게다가 한두 살 연상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자신을 응원해주기 위해 같이 와 있다고 했다. 음…좀 신기했다. 가수에 대한 꿈을 가진 거에 대해 비웃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꽤나 ‘멀쩡하던’ 놈이 늦은 나이에 가수에 도전하겠다고 온갖 또라이들이 집결해 있는 곳에 직장까지 그만두며 와 있다는 게 의외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 또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거다. 난 그와 대화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난 그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노력했다. 난 가수에 대한 꿈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합격할 거라 진지하게 기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취업 준비를 하는 와중에 심심해서 색다른 경험을 하기 위해 와 있는 거고…난 내가 평범한 ‘범인’ 범주에 있는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 온갖 밑밥을 깔았다. 그런데 참 웃겼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 댈수록 내 자신이 점점 찌질하고 초래하지는 것만 같았다. 사실 어쩌면 그 친구처럼 가수에 대한 진지한 꿈이 있어서 그 가능성 희박한 곳에 맨몸으로 부딪치기 위해 와 있는 사람들보다 내가 훨씬 더 하찮은 인간이었을지 모른다. 그와 짧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헤어지며 내가 내뱉은 말들을 다시 곱씹으면서 난 갑자기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난 도대체 여기 왜 있을까?’

어느덧 모니터에 내 번호가 떴다. 난 부스들이 설치돼 있던 곳으로 내려가 내 참가번호 앞에 붙어 있던 알파벳과 일치하는 부스를 찾아가 줄을 섰다. 부스 바로 앞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부스별로 5명에서 10명 정도였다. 그 적은 인원 사이에도 어김없이 ‘별종’은 껴 있었다. 일단 내 바로 앞 참가자가 그랬다. 조금 이국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고 영화 <겨울왕국> 풍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보다 더 앞에는 기모노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내 바로 앞 순서가 (내 기준에) ‘별종’이었기 때문에 난 나름대로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 바로 앞 순서가 그저 카메라 한 번 받아보겠다고 특이한 복장으로 온 참가자라면 그 다음에 내가 들어갔을 때 어느 정도 대비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내 차례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멀리서 남자 1명과 여자 1명으로 이뤄진 그룹 참가자가 우리 부스 쪽으로 다가왔다. 알고 보니 내 바로 앞 번호였는데 늦게 온 거다. 그들은 다가와 나를 뒤로 밀쳐내고는 내 앞에 있던 참가자와 내 사이에 섰다. 두 명 중 남자는 기타를 들고 있었다. 남자가 기타로 연주를 하면서 화음을 넣고, 여자가 메인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런 그룹 참가자였다. 남자 기타에 어깨끈이 없었던 관계로 그들이 들어가기 전에 부스 안에 의자를 갖다놓는 등 시간을 조금 끌다가 들어갔다. 시간이 지연되는 데 난 좀 짜증이 났는데 그들은 왠지 ‘우리가 들어가는데 이 정도 멍석은 깔아야지’ 하는 듯한 생각을 하는 것만 같았다. 뭔가 불안했다. 왠지 잘할 거 같았다.

솔직히 방음이 잘 되는 그런 부스는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앞 사람이 들어가 노래를 부르는 게 밖으로도 어느 정도 들렸다. 내 바로 앞의 그 두 명이 들어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데 확실히 잘하는 거 같았다. 게다가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였다. 안에서 심사위원들과의 대화를 대충 엿들어보니 자작곡이었나 보다. 한 곡이 끝나고 몇 초 동안 밖에서는 잘 안 들리는 대화가 오가다가 두 번째 곡까지 시작했다. 심사위원들이 다른 자작곡이 있으면 더 들려달라고 한 거 같다. 바로 앞 사람들이 잘하는 놈들인 데 점점 초조해지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카메라를 든 스태프 두어 명이 우리 부스 쪽으로 뛰어왔다. 그리고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우리 부스 안으로 카메라를 쑤셔 넣고 그들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안에서 심사위원들이 휴대폰으로 밖에다가 연락을 했나보다. 혹시나 얘네가 나중에 생방송까지 진출하게 되면 자료 영상으로 쓰려고 촬영을 하는 거였다. 젠장. 내 바로 앞 참가자들은 그렇게 난리를 피우며 날 초라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 그룹은 4곡 정도를 부르고서야 부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난 초라한 발걸음을 억지로 이끌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 대기 시간으로 지쳐 있기도 했지만 바로 앞 놈들이 카메라맨까지 소환하며 한바탕 휘몰아치고 간지라 자신감이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들어가니 책상에 앉아 있던 두 명의 관계자 뒤로 조그만 구멍 사이로 눈깔을 들이밀고 있는 카메라 렌즈를 발견했다. 갑자기 사지가 떨리기 시작했다. 난 누구? 여긴 어디? 정신 못 차리고 벌벌 떨고 있는데 심사위원들이 자기소개를 요구했다. “개똥입니다!” 이름을 얘기하고선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초 기다리다가 내가 더 이상 반응이 없자 내게 무슨 노래를 부를 거냐고 물었다. 난 SKY의 ‘영원’을 부르겠다고 했다. 불러보란다. 시작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솔직히 내가 가수 수준의 노래 실력을 가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노래방에 가면 같이 간 사람들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드는 정도는 하는 놈이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그냥 기본 실력이 부족했던 건지 목소리가 너무 떨려 음정도 흔들리고 바이브레이션 컨트롤도 하나도 안 됐다. 그래도 솔직히 심사위원들도 노래 초반에 너무 떨어서 제대로 못 부르는 건 많이 봐왔기 때문에 코러스 부분까지 기다려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버텼다. 그래, 사실 내 강점은 코러스 부분에 있었다. 왜? 난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목청을 지녔기 때문이다. 고음에서 시원하게 내지르는 내 목소리를 들으면 앞부분을 아무리 망쳤어도 심사위원들 생각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죄다 쓸모없는 기대였다. 심사위원들은 내가 코러스 부분에 들어가기도 전에 내 노래를 멈추고는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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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한국 땅의 온갖 병신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그 병신들을 구경하며 병신이라고 속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다가 결국 병신 인증만 하고 돌아오게 됐다. 그래도 그 직후에는 아직 정신을 덜 차려서 계속 스스로 자위를 하며 돌아왔다. ‘난 솔직히 노래 좀 부를 줄 아는데 너무 긴장해서 그런 거야. ㅋㅋㅋ’ ‘운이 너무 안 좋았어. ㅋㅋㅋ’ ‘난 그냥 재미삼아 갔던 거니까 괜찮아. ㅋㅋㅋ’ ‘그래도 좋은 경험 했어. 애초에 그게 목적이었잖아? ㅋㅋㅋ’ 이렇게 계속 스스로 위로를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그러면 그럴수록 내 자신이 점점 더 초라하고 한심해졌다. 탈락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 바로 탈락했다고 알려준 건 아니지만) 문제는 내가 다른 사람들은 실컷 병신이라고 속으로 비웃었는데 결국 나도 똑같은 놈이었다는 거다.

어쨌든 좋은 경험인 건 맞았다. 난 분명히 교훈을 얻었다. 그 이후로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함부로 병신 취급하고 비웃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때 이렇게 한 번 얻어맞고 나니까 확실히 그 이후 기업 면접장에 들어갈 때 마음가짐이 조금은 달라졌던 거 같다. ‘K팝스타’만큼은 당연히 아니지만 기업 면접장에도 골 때리는 행동을 하는 인간들이 꽤 있다. 하지만 이들을 비웃으면 안 된다. 그 사람은 붙고 난 떨어질 수도 있다. 면접관들이 그 사람은 예뻐하고 난 잊어버릴 수도 있다. 그 사람은 겸손하고 내가 거만한 걸 수도 있다. 병신같이 보이는 그 사람은 정상이고 내가 병신일 수도 있다.

난 그래도 내가 제정신인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날은 분명히 난 정신이 나가 있었다. 대신 내가 그렇게나 한심하게 여긴 ‘별종’들 사이에서 겸손을 배우고 왔다. 그리고 물론 난 탈락했다.

편집 및 교정/ 이점

글/ 개똥그릇

< 이전화, 99개의 자소서를 쓴 남자, 14년 하반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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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집자 주. 범죄자가 아니다! 범죄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