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사귀면 키스는 해?”

외국인 친구들과 이성관계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 불쑥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한번은 한 프랑스 친구가 “왜 한국 드라마는 항상 키스하고 나서 포옹을 해? 보통 키스신이 나오면 베드신이 자연스럽지 않아?”라고 묻기도 했다. 우리가 서양 사회에 대해 ‘성적으로 개방적’이라는 인식을 지레 가지는 것처럼 이들도 아시아 국가들은 성적으로 보수적일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의 ‘연애’를 한번 생각해보자. 사실 나는 이 단어를 정확히 대체할 수 있는 영어 단어는 없다고 생각한다. 상대를 알아가는 ‘썸’을 거쳐 ‘연애’가 시작되면, ‘기념일’을 꼽아가며, 서로가 생각하는 ‘진도’의 적정선을 맞춰가는 인간관계. 이를 romance나 love affair 같은 단어로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여성의 ‘순수’에 대한 한국적 집착

상대가 마음에 들면 연애기간 없이도 잠자리를 가질 수 있고, 결혼을 할 생각이 없더라도 동거를 하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여성의 처녀막 유무나 동거 경험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 설사 알고 싶어 한다고 해도 이를 잣대로 누군가가 ‘헤프다’라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처녀막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동거를 한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오랜 시간 공들이고 서로를 알아가려 했던 연애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배신’이라는 감정과 함께 끝나버린다.

쉽고 빠른 여혐의 길

쉽고 빠른 여혐의 길

오랜 역사 동안 한국을 비롯한 많은 사회에서 여성의 성욕은 존재하지만 존재하면 안 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아프리카의 할례라는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일상 속에는 이런 인식이 만연해있다. 일례로, 성경험이 많은 여성은 ‘헤픈’ 사람이 되는 반면 남성은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 남성들은 기꺼이 성적 쾌락이나 성욕의 주체가 될 수 있는데 여성은 겨우 인류의 보존을 위한 출산과 임신의 주체로 여겨진다. 그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이성애자 남성들의 가장 보편적인 호기심 중 하나는 ‘여성도 자위를 하냐’는, 그러니까 여성도 성적 쾌락을 위해 스스로 성욕을 해결하는 ‘성적 주체냐’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주된 주장 중 하나는 여성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성적 주체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성관계를 갖고 싶든, 그러고 싶지 않든 여성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정말 단순명료한 주장이다. 애인이 원해서, 혹은 사회가 처녀성을 강요해서 본인의 의사를 거스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많은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이 논의를 확장시키기 위해 ‘No means no’라는, 상대의 의사를 거스르면 강간이라는 더 단순한 명제부터 설득시켜야 했다.

사회가 여성들을 ‘거세’시키고 있다

‘강간을 비롯한 성범죄를 저지르지 말자’는 상식의 영역부터 시작해 여성과 남성 간의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자는 적극적인 주장까지, 한국의 페미니즘은 지난해 ‘메갈리아’라는 커뮤니티의 등장 이후 빠르게 그 논의를 확장시켜 나갔다. 현재의 메갈리아는 여혐혐에 대한 ‘미러링’이냐, 남성에 대한 ‘혐오 표현’이냐는 논란이 지속되면서 여타 페미니스트들의 사회적 지지와 실제 커뮤니티 유저들을 많이 잃었지만 ‘메갈리아’가 한국 사회 내에서 페미니즘 논의를 가속화 시키는 데에 기여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지난 1년 간 한국 사회 내의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메갈리아’를 통해 부쩍 활발해졌고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코르셋’을 벗어 던졌다. ‘개념녀’라는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했던 여성들에게 그런 것 따위는 집어던져도 된다고, 당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말해주는 페미니즘은 정말 멋지고 근사한 유행과도 같았다. 많은 여성들, 특히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서 결혼, 임신, 출산, 육아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찾기 시작했고 더 이상 아내나 어머니로서만 살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자연스레 독신주의 혹은 비혼주의1)비혼주의는 단순히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부하는 것이지만, 독신주의의 경우 연애와 결혼 등 모든 성적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다.를 주장하는 여성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지금 여성들이 외치는 독신주의는 막연히 자신의 선호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기저에는 일반 남성들, 특히 한국 남성들에 대한 적대감과 공포감이 깔려있다. ‘메갈리아’가 등장한 이후 여성들은 자신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언어적 폭력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소라넷에서 일어나는 강간 모의 등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성폭력에 대한 사례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지금의 독신주의는 혼자가 좋아서 독신이라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지만 사회적으로 그 욕구를 ‘거세’당한 것에 가깝다. 성경험의 유무로 ‘싸다’, ‘비싸다’는 평가받아야 하는 여성들에게, 그리고 이러한 평가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이제 성관계는 더 이상 낭만적인 연인 간의 행위일 수만은 없다.

지금의 한국 여성이 연애 관계에 있는 이성과, 혹은 남편과, 정말로 ‘낭만적인’ 잠자리를 갖기 위해서는 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과 성욕 이상으로, 이 사람이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과 안도감도 필요하다. 오랜 ‘썸’을 타고 ‘연애’를 하고, 이제 상대방을 알 만큼 안 것 같아도 상대방이 일베는 하지 않는지, 또 소라넷을 하는 건 아닌지, 여성 혐오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한 확신 없이는 늘 이 관계가 불안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할 것만 같았던 연애가 몰카나 성폭행 같은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계산과 탐색의 과정으로 채워진다는 것은 여간 슬픈 일이 아니다.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여성혐오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이 유명한 장면과 같은 논리로,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여성혐오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안전 이별이라는 가장 낭만적인 결론

여전히 수많은 여성들이 남편, 혹은 애인에게 폭행을 당하고 살해를 당한다. 2014년 통계 기준으로는 114명, 1.7일에 한 명 꼴로 여성들이 연인 관계에 있는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데이트와 폭력, 부부와 강간 이라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개념이 이제는 너무 익숙한 범죄의 한 유형이 됐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조차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덜컥 다 믿기엔 사회가 너무 험하다.

연애를 하면서도 여성들은 혹여나 이 사람이 나한테 술에 약을 타 먹이지는 않을까,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못된 짓을 하지 않을까, 나와의 성경험을 친구들에게 떠벌리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게 된다. 헤어져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여도 헤어진 뒤에 스토킹을 하는 건 아닐까, 연애 중에 몰래 찍어둔 성관계 동영상이 있는 건 아닐까, 친구나 가족에게 해코지하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 심지어 결혼을 한 사이여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아내’라는 게시판에 나를 몰래 찍은 사진을 공유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보는 건 아닐지, 내가 임신하면, 혹은 업무 핑계로 업소에 가서 성매매를 하는 건 아닌지, 한 번 시작된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오피스텔 마사지가 성행하는 이 시점에서 언제까지 여자들한테만 예민하다고 빼애애액 할겁니까?

오피스텔 마사지가 성행하는 이 시점에서 언제까지 여자들한테만 예민하다고 빼애애액 할겁니까?

그래서 지금 한국 여성들에게 연애에 있어 가장 낭만적이고 절실한 결론은 ‘그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동화책 속 결혼 생활이 아니라 안전이별이다. 어떠한 폭력이나 문제없이 안전하게 이별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지금의 연애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일인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페미니스트로서, 안전이별보다는 조금 더 낭만적인 일들이 우리의 연애에, 또 미래의 결혼 생활에 일어났으면 좋겠다. 상대방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으로, 혹은 어떠한 성적 긴장감으로 설레야 할 우리의 연애가, 의심과 공포감으로, 이 관계에서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불쾌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는 것은 아무래도 싫다.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고작 ‘안전이별’이나 꿈꾸고 싶지는 않다.

그대도 로맨티스트가 되어주길

분명 이 글을 읽고 ‘모든 남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 ‘일반화시키는 거 싫다’’여자들이 너무 예민하다’고 얘기할 거라는 거 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느끼는 공포심은 내 신변과 안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다. ‘한남충’이라는 표현 자체가 혐오의 정서를 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표현이, 또는 페미니스트들의 언행이 정말 남성 혐오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페미니즘에서 파생된 남성에 대한 ‘혐오 표현’이 실제 헤게모니로서의 ‘혐오’로 작용하고 있다면 지금쯤 많은 한국 남성들이 스스로가 한남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한남충’에 대한 남성 혐오 논란에서는 ‘난 한남충이 아니’라는 말보다는 ‘왜 한남충이라는 말을 쓰느냐’는 말이 더 많이 오간다. 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한정 짓지 못하는 혐오 표현은 그저 혐오의 정서를 담은 언어 표현일 뿐이다. 여성들이, 또 페미니즘이 ‘된장녀’라는 혐오 표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까지 10년이 걸렸다. 한국 사회가 ‘된장녀’를 욕하고 ‘개념녀’를 칭송할 때, 여성들은 ‘된장녀’라는 개념을 부정하기 전에 자신들을 ‘개념녀’에 끼워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이 혐오다. 만약 ‘한남충’이 파생시킬 남성 혐오가 정말 두렵다면 남성들은 오히려 더 적극적인 페미니즘 운동을 펼쳐야 한다.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부당한 사회적 특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모두가 나서서 더 안전한 사회가 되도록 하겠다고, 그래서 어떤 남성도 의심할 필요가 없도록, 그렇게 ‘한남충’이라는 표현이 없어지도록 하겠다고 나서야 하는 것이다. 모든 남성들의 사고방식, 혹은 생활 양식을 규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고 보편적인 사회적 압박이 있기 전까지는 남성 혐오라는 개념이 설 수 없다.

image

같이 배우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는 내 감정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기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기를, 두 사람이 함께 행복할 수 있기를, 그래서 조금은 낭만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에서 태어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까지 처녀막에 대한 사회적 강박에 시달리며 죄책감을 느낀다거나, 연애를 이어나가기 위해 동거 경험을 숨겨야 한다는 건 정말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다. 그리고 정말 낭만적인 연애를 위해서는 나 하나만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감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아직도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면, 아직 당신의 삶은 더 나아질 무언가가 남아 있다고 기꺼이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멋진 일 중 하나는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라고, 그래야 언젠가 안전이별이 아닌 ‘진짜’  로맨스를 꿈꿔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싶다.

 

편집 및 교정/요정

글/한명

   [ + ]

1. 비혼주의는 단순히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부하는 것이지만, 독신주의의 경우 연애와 결혼 등 모든 성적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