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세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연희관 015B 4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자위에는 국경도 성별도 없다

미국에서 3월은 자위의 달이다. 듣자마자 황당하다면, 그 자위가 맞다. 미국인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스트레스받을 때, 심심할 때, 한동안 섹스를 못 했을 때, 태어나서 섹스해본 적이 없을 때, 집이 비었을 때 혹은 아무 때나 하는 그것 말이다. 그런데 자위에는 국경이 없는 만큼 성별 또한 없다. 이 말은 즉 여자들도 자위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여자의 자위는 다소 자극적이고 미스터리한 소재로 느껴진다. 심지어 여자인 나한테까지 말이다.

모르겠어 나는. 그게 뭐야?

모르겠어 나는. 그게 뭐야?

미디어 속 남자의 자위는 섹시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그냥 그들의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쾌락으로 비춰질 뿐이다. 하지만 여성의 자위는 판타지로 점철되어있다. 꽃잎이 뿌려진 욕조에서 야한 코스튬을 입고 반쯤 풀린 눈과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를 내는 포르노 배우의 모습처럼 말이다. 정말 이렇게 자위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존경할 만한 나르시시스트임이 틀림없다. 또 다른 한편으로 여성의 자위는 여성에게조차 비밀스럽다. 내 주변에는 어떻게 하는 지는커녕, 여자가 자위하는지 모르는 여자들도 있다. 혹은 알아도 모르는 척하기에 바쁘다. 그럼에도 여자가 자위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이 놀랍다면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들의 자위 또한 남성의 것처럼 개인적이고 평범한 하루의 10분이라는 점!

섹스와 자위의 경계에서

자위는 성별을 막론하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얘기할 수 있는 소재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남자의 자위는 건강한 성장 과정과 자연스러운 욕구 해소 방법으로 받아들여지며 섹드립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남자아이들은 2차 성징의 문이 열리기 무섭게 서로 자위에 대한 경험을 나누고 야동 야사 야애니 등을 공유하며 자신들의 욕구를 손안에 넣는다. 반면 대부분 여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친구들과 섹스 얘기는 하지만 자위 얘기는 하지 않는다. 나만 해도(참고로 나는 친구들과 섹스에 대해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편이다) 20대 중반에 이르도록 자위를 대단한 비밀처럼 여겼고 내 친구들 역시 그러했다.

그러므로 여자의 자위는 자연스러움에도 자연스럽지 않고 평범함에도 평범하지 않다. ‘성’에 대해서 얘기하기 가장 편한 집단인 친구들 사이에서도 입을 열기 어려운 이유는 다들 자신이 ‘혼자’일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얘기를 꺼냈다가는 “여자도 자위를 해?”, “여자 자위는 어떻게 해?”, “기구로 해? 으…” 같은 반응들이 나오기 쉽다. 물론 그렇게 반응하는 친구들의 처지도 이해가 간다. 자위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편견과 오해로 가득 찬만큼, 자신들도 그 일반적인 집단의 일부가 되어 자위를 비정상적이고 불결한 것처럼 취급하고 싶을 것이다. 자신은 온전히 안전한 위치에 있기 위해서 말이다. 실제로 자신이 자위를 하건 하지 않건 그 심리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면 다르겠지만).

200

그 생각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는 것은 나 또한 그랬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섹스 앤드 더 시티>를 감상하던 중 사만다 존스가 바이브레이터로 자위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녀가 환희의 신음을 지를 동안 나는 충격의 비명을 삼켜야 했다. 여자가 자위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그 첫인상이 좋진 않았다. 아니, 더러웠다. 이후 나는 섹스에 대해 편견과 오해로 가득 싸인 채 무성욕자처럼 지냈다. 그러나 외롭고 힘들었던 재수생 시절 나는 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자위하는 방법을 우연히 발견한다. 하지만 그 힘겨운 시절의 유일한 자위는 결국 자학으로 이어졌다. 사만다를 향했던 화살이 이제는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대학생이 되고 어쩌다 남자친구들이랑 자위 얘기가 나와도 나는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숨겼다. 그들과 섹스는 하지만 내가 그들처럼 자위한다는 사실은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말하게 되는 순간 뭔가 그들이 나를 다르게 볼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오랜 시간 아무 말도 하지도 듣지도 못한 채, 침묵 속에서 나 자신을 수치스러워했다.

무엇이 나를 디스 하는가

실제로 자위를 하는 많은 여성이 자신이 ‘심각하게 밝히‘거나 ’변태‘가 아닐까 걱정한다. 왜 여성들은 자위를 자위답게 할 수 없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욕구의 주체’로서 교육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같은 인간임에도 여성의 성욕은 항상 남성의 성욕과 다른 위치에 있었다. 즉 남성은 성적 주체로서 자신의 쾌락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여성은 그 객체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수 천 년 동안 여성의 성은 결혼과 출산에만 국한되어왔고, 이 가부장적 틀 밖에서 여성의 쾌락은 금기시되고 통제되어왔다. 그 결과 우리는 ‘자연스러운 욕구’에 대해서 배우기보다 ‘순결’을 강요받아왔다.

순결같은 소리하고 있네..

순결같은 소리하고 있네..

21세기 우리의 상황도 많이, 아니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나는 누군가가 ‘지켜야 할 대상(성녀)’도 아니고 ‘정복해야 할 대상(창녀)’도 아니지만 부모님은 도대체 25살이나 된 딸의 통금을 풀어주지 않으시며 여행갈 땐 인증샷을 요구하신다. 새내기들은 누구와 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잘나가는 포르노 배우 대신 그 이름이 오르내리고, 아이유가 병문안 간다는 건 세상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여성에게 섹스와 관련된 것들은 숨기는 것이, 아니 어쩌면 아예 안 하는 것이 여전히 여성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길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많은 여성이 자율적으로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쉽게 일상생활 뿐 아니라 미디어에서도 여성들이 자신이 남성에 의해서 보호받거나 훼손되는 물건이 아니며, 내가 즐겁기 위해 섹스한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미국에서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열풍이 불었던 것처럼 우리 사회도 이제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나 기대가 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여성들 자신도 오래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우리가 나고 자라면서 받은 교육은 생각보다 우리의 깊은 곳에 내면화되어있다. 왜 파트너와의 섹스는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지만 혼자 하는 섹스는 수치스러워할까? 왜 ‘더럽다’ ‘으’ ‘헐’과 같은 반응이 너무나도 쉽게 나오는 것일까.

 이로 인한 수치심은 그만큼 아직 여성들이 파트너 의존적이고(말하자면 수동적이고) 성적 주체가 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위는 여러 섹스의 형식 중에서도 가장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욕구 충족의 형태이다. 어떻게 봐도 상대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 나의 욕구와 나의 행위만이 존재한다. 남성에 의한 섹스도, 남성을 위한 섹스도, 남성과 함께하는 섹스도 아니다. 그만큼 나의 욕구와 주체성을 가릴 수 있는, 가령 연애 혹은 사랑과 같은 샤랄라한 베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순도 100% 나의 욕정이다.

그런데 이게 부끄러운 일인가? 오장육부 없는 인형이 아니고서야 조신한 몸가짐과 ‘아무것도 몰라요’ 표정에 자신의 내면까지 가둘 필요 없다. 사회의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면 왜 나를 그 틀에 맞춰야 하나. 그들의 존중을 받지 못한다고 나 자신을 수치스러워 하는 것이야말로 나 에 대한 디스다.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욕은 누구에게나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 수치스러워하고 편히 즐기자. 상대방의 만족도에 대한 걱정도, 가짜 신음소리와 표정으로 연기할 필요도, 심지어 임신과 성병에 대한 걱정도 없는, 나만의 해피타임이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상위 1%라고 착각하기 넘나 쉬운 것

여성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 수치심은 계속해서 많은 이들의 행복한 성생활과 자기 존중을 방해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어디서 배우지도 못했고 스스로 알아가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이제는 너도나도 굳이 숨기고 거짓말할 게 아니라 서로 얘기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이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욕구보다는 순결의 중요성을 배워왔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쓸데없는 지식은 버리는 편이 좋다. 이제 여성의 자위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얘기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위 자체가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기나긴 침묵은 24살이었던 해 술자리 진실게임에서 깨졌다. 나와 친구들은 돌아가면서 자신이 저지른 가장 ‘난잡한’ 것들을 말해야 했고 그때마다 유사경험이 있는 사람은 잔을 비워야 했다. 흥건하게 취해있던 우리의 아드레날린은 최고치였고 음담패설도 더 이상의 정점을 찍을 수 없을 만큼 고조되었다. 끝을 보길 바라는 인간의 욕심은 너무나도 쉽게 나의 안면을 몰수하였다. 아니면 마음 한켠으로 항상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난 그렇게 뜻밖에 고해성사를 했고, 더 뜻밖에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여자가 잔을 비웠다. 그때 잔을 비워준 친구들 덕에 나의 오래된 죄책감도 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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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우연한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운이 좋았으나 그러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무작정 입을 열라고도 할 수 없다. 사실 친구들과 ‘입’에서 ‘입’으로 얘기하는 것은 상당히 고전적인 방법의 하나다. 요즘처럼 스마트한 시대에 얘기하기 어려운 것들은 먼저 인터넷에 검색하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다. 그러나 인터넷의 강국 한국에서 ‘여자의 자위’를 검색하는 순간 ‘정보의 바다’라는 이름은 무색해진다.

구글의 검색 결과 중 쓸 만한 정보는 다섯 손가락에 꼽으며 20% 정도가 유머사이트에 올라오는 글이나 댓글이고 나머지는 거의 다 음란물이다. 당장에 여성들이 자신의 성에 대해서 알아가기 위한 벽이 너무나 높다. 우리나라가 아직 대중매체 개발에 있어서 ‘여성’에 대한 담론이 뒤처지는 것은 항상 느껴왔지만, ‘여성의 자위’라는 극단적 영역에서 그 수준은 처참해진다. 이는 대중매체를 개발하기에 앞서 가장 기본적인 학문적 토양조차 제대로 가꾸어지지 않은 점이 문제이기도 하다. 국내 학술지를 검색했을 때 여성의 자위를 연구한 논문은 딱 한 편밖에 구할 수 없으니 말이다.

무려 뉴스입니다 뉴스..!

무려 뉴스입니다 뉴스..!

태평양만 건너가면 아니, 언어의 벽만 넘는다면 훨씬 풍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여성의 유아 시기의 자위, 청소년 시기의 자위, 심지어 수감자의 자위 등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있으며 대중매체에서 편리하게 접할 수 있는 정보 또한 풍부하다. 구글에 ‘Female Masturbation’ ‘Women Masturbation’으로 검색해보면, 여성 자위에 대한 거짓된 정보를 가리는 기사와 여성 자위의 장점을 소개하는 기사 같은 유익한 정보뿐만 아니라 여성 자위에 대해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섹드립도 접할 수 있다.

이러한 대중 담론의 오픈된 분위기는 실제로 여성들의 당당한 태도를 반영하고 조성한다. 뭐가 닭이고 달걀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최근 2012년에 이루어진 영미권 설문조사에서 여성 중 92%가 자위를 한다고 응답했다. 1953년 40%, 1979년 62%가 자위를 한다고 응답했지만 실제로 증가한 수치는 자위하는 여성의 수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내게 된 여성의 수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 이루어진 대부분의 통계가 따르면 대략 30%의 수치를 보고한다. 아무리 통계조사라도 ‘예’라고 대답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사실과 다르게 ‘아니요’로 대답하는 수도 적지 않았을 테다. 그러므로 이 설문이 얼마나 정확성을 반영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궁금한 건 앞으로 다시 통계를 낸다면 과연 그 결과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섹스 긍정주의자의 판타지

남성들에게도 자위가 수치이던 시절이 있었다. 18, 19세기를 통틀어 서양은 자위행위에 대해 거대한 증오를 보여 왔다. 기독교 전통이 자위를 성적 오용으로 간주해온지 이미 오래였지만, 빅토리아 시기의 엄숙주의와 대각성에 이은 여러 차례의 종교적 운동의 바람이 이러한 터부를 더욱 고착화했다. 작자 불명의 책 《자위:자기 오염이라는 증오스러운 범죄, 그리고 그 공포스러운 결과》(1724)나 Samuel Tissot의 논문 <자위가 유발하는 질병>(1832)은 자위라는 ‘성적 부도덕’을 의학화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곧 자위는 도덕적 타락일 뿐 아니라 치료를 요하는 신체적 정신적 질환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흐르는 물을 막으면 엉뚱한 데로 세는 법이다. 빅토리아 시기는 영국이 성적으로 가장 문란했던 시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역사상 영국에서 창녀가 가장 많았고 성범죄가 난무했다. 게다가 우편제도의 보급은 성의 또 다른 유통체계를 만들었다. 그 전까지는 은밀하게 손에서 손으로만 전달되던 음란물이 세계 곳곳에서 거래되었고 사진과 영화의 발명은 이러한 열기를 더했다. 결국 빅토리아 시기의 여러 규제와 사상들도 20세기의 성 개방을 막지 못했다.

이거이거 음란마귀가 가득 꼈구만!

이거이거 음란마귀가 가득 꼈구만!

여성들에 대한 성적 통제와 억압도 계속될 순 없다. 물론 여성에 대한 규제는 과거 남성에게 가해졌던 규제보다 훨씬 교묘하다. 과거에는 성에 대한 대대적인 억압이 펼쳐졌지만, 그 금기의 언어를 통해 성에 대해 말하고 또 말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성에 대한 담론이 활발해졌다.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에 상자를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절대 열어보지 마라”고 하는 순간 호기심은 증폭된다. 지금 여성들에 대한 성적 통제는 그 상자의 존재를 아예 알려주지 않는 것과 같다. 마치 여성의 성욕 혹은 여성의 자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여성들 스스로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노려보거나 외면하려고 애쓸지라도 말이다.

물론 모든 여성이 그 상자를 열어 볼 필요는 없다. 상자의 정체를 알아도 굳이 열어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다. 또한 내가 그 상자로 뭘 하건 남들이 알 바가 아니라면 억지로 입을 열 필요도 없다. 다 ‘각자의 취향’이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모두가 자신의 욕구와 선택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상자를 여는 열쇠는 어쨌거나 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손에 있다. 자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인 만큼 남들이 이래라저래라 하거나 멋대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는 비단 자위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섹스라이프, 젠더 성향 모두에 해당하는 얘기다. 인간은 복잡하고 섹스의 스펙트럼은 넓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스펙트럼을 긍정할 수 있고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한 섹스 판타지 아닐까.

 

교정 및 편집 / 저년이

글 / 한가지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