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는 실망스런 블록버스터?

필리버스터는 한 편의 정치판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 할 만했다. 국회방송의 시청율이 개국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무제한 토론에 나선 발언자들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 꼭대기에 올랐으며, 야당(특히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도 일시적으로 상승했다. 수치는 생략한다. 찾기 귀찮다. 누구는 축제, 누구는 쇼, 누구는 재앙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우리 정치판에서 이만큼 국민 관심을 끌었으면 한 편의 흥행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필리버스터를 지지했던 이들 사이에서도 그 마무리가 문제됐다. 박영선 의원이 나와 ‘가증스런’ 눈물을 흘리면서 총선 표를 구걸하더니 테러방지법 수정도 이루지 못한 채 갑자기 필러버스터를 중단해버렸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이 본 필리버스터는 ‘용두사미(龍頭蛇尾)’였다.

왜 끝내는거야...

왜 끝내는거야…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이번 필리버스터 정국은 ‘시작은 창대했으나 결말이 실망스러운’ B급 영화였을까? 필리버스터가 진행됐던 192시간 동안만을 한 편의 영화로 놓고 보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땐 이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승전결’에서 필리버스터는 ‘승’에 불과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영화의 제목은 ‘필리버스터’가 아니다. 필리버스터는 한 ‘챕터’ 제목에 불과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이제부터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

더민주, 이제 정치 좀 하네!

안철수를 내보낼 때까지만 해도 야당은 끝인가 싶었다. 문재인을 비롯한 친노 세력이 눈이 멀고 귀가 막혀 정치를 망치나 싶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꿀 때까지도 난 그들에게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슬슬 뭔가 심상치 않아지기 시작했다. 문재인이 불쑥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 소장을 영입하더니 나름 상징성 있는 인재들을 줄줄이 영입했다. 이쯤 되니 당명 교체와 인재 영입이 마치 안철수를 비롯한 현 국민의당 세력이 빠져나가길 기다리며 계획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고 있었더니 그 마침표는 다름 아닌 김종인이었다. 한편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의 상징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도주의를 표방한 안철수 신당의 정당성을 누를 수 있는 그가 더불어민주당의 총선을 지휘하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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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여전히 힘들어 보였다.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천정배의 국민회의(가칭)를 흡수하더니 창당 직후 컨벤션 효과까지 등에 업고 호남과 수도권 민심을 꽤 가져가는 듯했다. 정동영 영입까지 성공했고, 정운찬의 입당도 코앞인 듯했다. 새누리당과의 프레임 경쟁 면에서도 설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이명박-박근혜의 10년에 대한 정권 심판론을 쓸 수 있었지만 총선용 프레임으론 부족했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여당은 ‘경제 활성화’ 법안들의 입법을 재촉했고, 야당의 저항은 ‘국회 마비’ 프레임만 키울 뿐이었다. 세월호, 국정교과서, 복면 시위 금지, 노동법, 테러방지법 등 여당과 정권을 공격할 재료는 많았지만 각각으로는 하나의 큰 프레임을 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필리버스터는 더불어민주당에게 불리한 이런 정국에서 이 모든 재료를 합쳐 하나의 새로운 프레임으로 만든 획기적인 작전이었다. 발언대에 오른 의원들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 꼭대기에 오르내렸고, 국민들이 테러방지법의 세부 내용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필리버스터를 응원하는 국민들이 더불어민주당의 깃발 아래 모이기 시작했다. 여당은 ‘국회가 몇 시간 째 마비되고 있다’는 내용의 피켓을 세워두는 외에는 뾰족한 대응책이 없었다. 프레임 싸움에서 맨날 새누리당에게 질질 끌려다녔던 더불어민주당이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들만의 프레임으로 국민 지지를 끌어내고 새누리당을 수동적 ‘대응’을 하도록 만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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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과연 더민주만의 프레임일까?

Warning: 여기서부터는 내 개인적인 상상의 나래를 더 활짝 편다.
사실적 근거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필리버스터가 과연 더불어민주당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거였을까?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엔 이번 필리버스터는 더불어민주당과 새누리당 모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전략이다. 이번 필리버스터는 ‘더불어민주당 띄우기’보다 ‘국민의당 죽이기’ 효과가 컸다. 테러방지법과 필리버스터 정국을 두고 국민들이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중 한쪽을 택해 갈라지는 와중에 국민의당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히 야권 분열로 부담스런 더불어민주당에게는 유리한 거다. 그럼 새누리당은? 국민의당이 힘을 잃어 그 표가 다시 더불어민주당에게 가면 새누리당에게 불리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정치 역사를 보면 야권은 언젠가 분명히 다시 통합된다. 지금의 야권 분열은 일시적인 건데, 그 와중에 만약 국민의당이 여당 텃밭 한 군데라도, 여당 인사 한 명이라도 가져간다면 그 지역이나 인물은 나중에 야권에 머무르게 될 가에능성이 크다. 어차피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제3당의 존재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유리하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친노와 비노 세력, 그리고 김종인 대표의 이해가 맞아떨어졌을 거다. 이종걸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한 불안한 비노 세력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재도약할 기회를 얻을 장이 필요했을 거다. 친노 입장에서는 비노의 노력을 차단하고 총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 지느니 차라리 그에 편승해 야권 지지자들로 하여금 운동권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만드는 게 나았을 거다. 김종인 입장에서는 필리버스터가 잘 되면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선거에 유리해지는 거고, 잘 안 되더라도 그 책임을 이종걸과 이에 동참한 이들에게 돌리면 될 일이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친노 세력이 필리버스터를 김종인에 대한 항의 수단으로 이용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김종인도 묵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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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도 자세히 뜯어보면 필리버스터는 사실 친박 세력에게 유리했다. 우선 필리버스터로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면 비박계인 김무성이 밀고 있는 상향식 공천이 힘을 잃게 된다.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회가 마비돼 있는 동안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국민 관심을 독점하며 새누리당 내 주도권을 키웠다. 뿐만 아니라 필리버스터 정국과 관련해 새누리당에 대한 비난은 모두 김무성 대표에게로 쏠렸다. 결국 이번 필리버스터 정국으로 가장 큰 손해를 본 건 안철수(국민의당)와 김무성(비박)이다. 나머지 세력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웃게 됐다고 본다. 이들 간 사전 물밑 작업이 전혀 없었을까? 이상하게 내 눈에는 짜고 치는 프로레슬링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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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는 시작에 불과

필리버스터가 종료되자마자 김종인은 국민의당에 ‘야권 통합’ 메시지를 보냈다. 김한길과 천정배는 ‘여지는 있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고 안철수만 혼자 ‘절대 불가’ 입장을 취했다. 물론 결국 국민의당은 통합 불가로 당론을 정리하긴 했다. 하지만 김종인이 정말 국민의당이 통합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물론 김종인 입장에서는 국민의당이 선뜻 통합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거기까지 기대하진 않았을 거다. 그러면 뭘 노린 걸까? 크게 세 가지 노림수가 보인다. 첫째는 국민의당 분열, 둘째는 지역별 야권 후보 연대, 셋째는 책임 회피다.

김종인이 야권 통합 제안을 던지자마자 국민의당은 분열 조짐을 보였다. 그럴 만도 한 게 애초에 김종인은 통합 제안에 안철수 대표는 제외했다. 명분상 안철수는 더불어민주당의 통합 제안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국민의당 의원이나 후보들은 입장이 다르다. 안철수처럼 좁은 명분의 틀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이번 총선에서 당선이 위태한 이들도 많다. 의원 총회 뒤에 국민의당은 ‘이견이 없었다’는 둥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거다. 이들은 앞으로도 수많은 의원 총회를 거듭하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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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국민의당이 한바탕 흔들린 상태에서 지역별 야권 후보 연대 가능성은 높아졌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당 전체 차원에서 통합이나 연대를 하게 되지 않더라도 개별 후보들 간에는 충분히 가능하다. 특정 지역에서 기호 3번을 달고 나오는 국민의당 후보가 어차피 승산이 없다고 여겨지면 사퇴를 하고 기호 2번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지지해주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는 거래가 여기저기서, 특히 수도권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거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국민의당 인력이 아예 더불어민주당으로 넘어가는 상황까지도 벌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실질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더라도 더불어민주당, 특히 김종인 입장에서는 설사 총선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비난의 상당 부분을 국민의당에 돌릴 수 있다. ‘우리는 분명 통합을 제안했지만 국민의당이 거절했다.’ 이런 소리가 가능해진 거다. 더불어민주당은 안철수를 내보낸 뒤 당명 교체, 인재 영입, 필리버스터, 통합 제안 등을 연속으로 진행하면서 안철수의 국민의당을 말 그대로 ‘짓밟고’ 있다. 국민의당은 중간에 정동영 영입 등이 있긴 했지만 창당 이후 꾸준히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고, 더불어민주당과 김종인은 앞으로도 국민의당 지지율 반등을 용납하지 않을 거다.

두 천재가 이끄는 더불어민주당

김종인이 친노의 적이라고? 김종인이 왕(王)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김종인이 되고자 하는 건 ‘킹’이 아니라 ‘킹 커’인 듯하다. 그러면 ‘킹’은 누구냐? 문재인이다. 언론을 통해 노출되는 김종인과 친노 세력 간 갈등은 그들 사이 조작된 것이거나 아니면 친노 가운데서도 그 거대한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이들에 의한 게 아닐까 싶다. 사실 난 처음에 문재인이 김종인을 영입했을 때 문재인이 자신을 대신해 국민들의 욕을 먹어줄 총알받이를 영입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좀 다르다. 둘은 애초에 한 배를 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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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

문재인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대표직을 내놓은 뒤에는 SNS를 통해 필리버스터를 응원했던 걸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다. 게다가 이번 총선에도 출마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재인이 정계 은퇴를 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지나가는 개를 붙잡고 물어도 문재인이 대권을 노린다는 걸 알 거다. 그러면 문재인은 어떻게 김종인이 주도하는 정국을 그냥 내버려둘 수 있는 걸까? 김종인은 총선만 끝나면 지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때가 돼서 자신이 다시 나서면 친노 세력을 중심으로 얼마든지 다시 주도권을 되찾아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걸까?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내놓는 ‘썰’은 ‘두 천재의 연합’이다.

김종인은 더불어민주당에 더 이상 친노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청소를 해놓을 거다. 그리고 국회에서조차 물러날 문재인이 대선을 앞두고 다시 국민 앞에 나섰을 때 그의 이미지는 한층 더 말끔해져 있을 거다. 이번 총선이 끝나고부터 다음 대선 시기까지 누가 더불어민주당을 이끌어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선거가 끝나고도 김종인이 더불어민주당을 이끌어가게 된다면 난 내 썰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질 거다. 아직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을 떠나는 대신 팝콘 한 통을 더 집어라. 이번 영화는 짧아야 내달, 길면 내년까지다.

편집 및 교정/ 이점

글/ 개똥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