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개의 자소서를 쓴 남자, 14년 하반기
6편: Expecto Patronum / 시한폭탄

Expecto Patronum

“나 오늘 교수님이 한잔 하자고 오셔서 늦을 거 같으니까 그냥 너 먼저 자.”

2011년 12월, 아니면 2012년 1월이었다. 방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새벽 3시 반 쯤 내게 문자가 왔다. 대학도 안 나온 그녀였지만 신기하게도 우리 과 교수 한 분이랑 아는 사이였다. 그냥 아는 사이도 아니고 (교수 쪽에서 일방적이었지만) 의남매도 맺었단다. 그녀는 영화 컴퓨터그래픽 쪽 일이 하고 싶어서 그걸 배우고 있었는데, 그 교수는 영화 쪽에 관심이 많아 인맥이 넓었던 모양이다. 난 수업을 들은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기러기 아빠에 술을 워낙 좋아해 밤마다 학생들을 불러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도 여학생에게 이상한 짓을 한 적은 없다고 하더라. 그래도 어쨌든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컴퓨터그래픽 학원을 다니느라 회사를 나와 밤마다 바(bar)에서 일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새벽 4시에 일이 끝나면 내가 데리러 가서 방으로 함께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그 교수가 가게에 찾아온 거였다.

“일단 알겠어. 그래도 어쨌든 끝나면 연락 줘.”

다행히 내일이 주말이라 학원은 없었지만 피곤할텐데 추운 겨울 늦은 밤에 억지로 어른 술을 받아줘야 할 그녀가 안쓰러워 잠이 오지 않았다. 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그녀의 연락만 하염 없이 기다렸다. 그러다가 5시 반 쯤 됐을까? 그녀에게서 자리가 다 끝났다는 문자가 왔다. 난 곧바로 내가 가진 옷 중에 따뜻한 점퍼를 걸쳐 입고 그녀에게 입혀줄 가장 따뜻한 점퍼를 손에 들고는 뛰쳐나갔다. 그녀가 있다는 쪽으로 가면서 드문드문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문자가 오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술을 여간 많이 마신 게 아니었다. 본 적 없는 오타 투성이의 문자를 보며 난 초조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자기 집 주변이라는 문자를 끝으로 더 이상 답이 오질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나는 뜨겁고 가쁜 입김을 내뿜으며 그녀의 집 주변으로 달려갔다.

당시 그녀는 허름한 상가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전세방에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촌 4명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난 부리나케 그 건물 앞으로 갔지만 그녀가 보이지 않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너무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계단을 올랐다. 자기네 집에서 한두 층 아래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두 다리 사이에 처박고 잠이 든 거 같은데, 내가 다가가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발밑을 보아하니 정신도 못 차린 채 물토를 조금 뱉어낸 모양이었다. 난 바로 내가 들고 있던 오리털 점퍼를 그녀 몸에 걸쳐준 뒤 옆에 붙어 걸터앉았다. 그녀는 깨지 않았고, 난 기다렸다. 중간 중간에 잠깐씩 깨서 토인지 침인지 알 수 없는 걸 뱉어냈지만 옆에 사람이 있는 걸 눈치 챌 정신도 없이 바로 다시 잠들곤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쯤 지났을까? 그녀가 깼다.

민들레: 어? 너 언제 왔어?

개똥: 아까 왔지. 네가 안 깨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뭔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민들레: 응, 좀 마셨어.

개똥: 얼른 올라가자. 감기 들어. 이미 걸렸겠다.

민들레: 개똥아.

개똥: 응?

민들레: 넌 왜 사서 고생해?

개똥: 뭐?

민들레: 개똥아.

개똥: 응?

민들레: 넌 왜 사서 고생해?

개똥: 무슨 소리야?

민들레: 넌 왜 사서 고생하냐고…

그녀는 다시 잠들었다. 다시 고개를 떨구고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면서 내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왜 사서 고생을 하냐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었을까? 원래도 속을 알기 어려운 여인네이기는 했지만 이번 대사는 정말 어려웠다. 그냥 ‘왜 나랑 만나서 이 추운 날 새벽에 내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느냐’ 정도였을까? 아니면 내가 눈치 채지 못한 다른 아픈 비밀이 있던 걸까? 내 이런 복잡한 심경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야속하게도, 또 한편으론 가엽게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어떻게 조금이라도 저 편하게,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만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지만 그녀에 대한 내 애착은 커질 대로 커진 듯했다. 문득 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좀 더 잘 담고 싶어졌다. 그녀 옆에 붙어 앉아 있던 난 한 계단 밑으로 내려와 그녀를 올려다보고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하염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30분 쯤 지났을까? 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퀭한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어? 개똥이다!”

그리고는 내가 다가와 입을 맞췄다. 처음이었다. 뽀뽀나 키스는 그 전에도 했다. 잠자리도 여러 번 가졌다. 하지만 한 달 가까운 시간 동안 그녀가 먼저 내게 다가와 입을 맞춘 적은 없었다. 입에서 술 냄새도 많이 났을 거고 토도 묻어 있었겠지만 그 순간 난 그 어떤 역한 냄새도 맡지 못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이 모두 마비된 채 촉각만 곤두서 있는 순간이었다. 그 어떤 첫 손깍지보다, 그 어떤 첫 포옹보다, 그 어떤 첫 입맞춤보다, 그 어떤 첫 정사보다 강렬한 순간이었다. 쉴 새 없는 내 구애에 지는 척하며 사귀게는 됐지만 아직 내게 마음을 온전히 열지 않던 그녀였는데 이제 그 마음을 열어 보이기 시작한 거다. 그때의 그 입맞춤은 예전 내 첫 고백에 대한 진정한 답변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내 마음 속에 민들레꽃이 피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면 ‘패트로누스(Patronus)’라는 마법이 있다. 인간의 행복한 기억, 더 나아가서는 영혼까지 흡수해 빨아먹는 디멘터(dementor)라는 존재들을 물리치기 위한 마법이다. 마법사는 자신의 가장 행복하고 가장 강렬한 기억에 집중해 ‘Expecto Patronum’이라고 주문을 외친다. 그러면 지팡이 끝에서 패트로누스라 불리는 빛으로 이뤄진 일종의 수호신 같은 게 나오는데, 그 형태는 시전자의 심층 세계를 반영한다. 주인공인 해리 포터의 패트로누스는 그의 아버지를 따라 수사슴이었고, 해리의 엄마인 릴리 포터를 짝사랑했던 세베루스 스네이프 교수의 패트로누스는 그녀를 따라 암사슴으로 변했다. 만약 내가 마법사였다면 ‘Expecto Patronum’을 외치면서 건물 복도 계단에서의 그 입맞춤을 떠올릴 거고, 내 패트로누스는 민들레꽃일 거다.

시한폭탄

그런 옛 민들레를 닮은 여인이 강의실에 앉아 있으니 수업 때마다 미칠 노릇이었다. 강의실에 들어가서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관찰하기 가장 좋은 각도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선 같이 듣던 동기 형도 강제로 옆에 앉혔다. 강의를 듣는 중에는 내내 내 눈이 교수님과 교과서, 그녀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도 궁금했고, 그녀의 고요한 호흡에도 괜히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심지어 강의 중간에 고개를 까딱이며 꾸벅꾸벅 조는 모습도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자꾸 쳐다보게 됐다. 그래, 난 혼자 미쳐가고 있었다. ‘내가 저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 걸까’ 깊이 고민해보겠다 마음 먹어놓고선 어느새 이미 그러고 있었다.

궁금쓰

(빤)

그날도 살짝 뒷자리에 앉아 멍 때리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눈이 마주쳤다. 그녀와 마주친 게 아니라 항상 그녀와 수업을 같이 듣던 옆자리 친구가 뒤를 돌아봤고, 날 쳐다보기에 내 눈도 저절로 그쪽으로 틀어졌다. 난 금방 마주친 눈을 피했지만 상대방이 눈이 마주친 걸 모를 리 없었다. 그 친구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귀에다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친구의 얘기를 잠시 듣더니 이번에는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아뿔싸, 또 눈이 마주쳤다. 들통 났다. 그동안 수도 없이 쳐다봤더니 결국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이 날 이후로 내가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이 둘은 (특히 그 친구가) 나를 항상 쳐다봤고, 그러고 나서는 꼭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그 친구랑은 다른 전공 수업도 같이 들었는데, 그 수업에서도 날 쳐다보며 또 함께 듣는 다른 친구들과 뭘 꼭 속닥거렸다.

그들은 그렇게 시한폭탄(필자) 스위치를 눌러버렸다. 난 원래 마음에 드는 상대가 보이면 본능적으로 바로 움직이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발정난 수캐마냥 괜찮은 여자만 보이면 덤벼들고 한 건 아니다. 내가 움직일 정도로 마음에 드는 여성이 내 앞에 나타나는 건 평균적으로 1~2년에 한 번 꼴이었다. 그러니 애인이 없더라도 기껏해야 1~2년에 한 번 움직였는데, 그나마도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입대 반 년 전부터 연애를 안 하다가 군대 2년 동안 연애세포가 완전히 죽어버린 데다 취업 준비에 여자한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이 여인네는 옛 사람을 닮았다는 이유로 끌리기 시작했으니 왠지 모르게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와 그 친구가 내가 관심이 있다는 걸 눈치채버렸으니 내 의도와 상관없이(?) 상황이 시한폭탄 스위치를 눌러버린 꼴이었다. 난 아마 나도 모르는 새 조만간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거라 직감했다.

난 우선 기본 신상부터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름을 알아내는 건 쉬웠다. 같은 수업을 들으니 출석을 부를 때 조금만 신경 쓰면 될 일이었다. 이름을 알아내고 난 뒤에는 페북을 뒤졌다. 물론 나왔다. 신상정보가 다 공개돼 있지는 않았지만 포스트와 댓글들을 보고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게 많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몇 살인지와 남자친구가 있는지였다. 우선 남자친구는 없었다. 좀 거슬릴 정도로 가까워 보이는 남정네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정황 상 연인 사이는 아닌 듯했다. 그리고 둘이서만 친한 게 아니라 여자 한 명이 더 껴 셋이 친한 듯했다. 그 정도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만했다. 나이도 정보에 안 나와 있어 바로 알 수는 없었지만 게시물들을 보니 삼수 13학번인 듯했다. 삼수 13학번이라…그럼 92년생…나와 학번은 일곱 학번, 나이는 5살 차이었다. 음…이게 애매한 건지 아닌지 그 당시에는 판단이 잘 안 섰다. 별로 감이 없었던 게, 난 연하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던 데다 위로도 2살 차이가 최고였다. 하지만 어쨌든 이미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난 한발 더 나아가 그녀의 동선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 나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가 잡기도 힘들었고, 설사 잡는다고 하더라도 아마 항상 뭔가 때문에 바쁠 거라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사실 그 전에도 같이 듣든 그 강의와 상관없는 시간대, 상관없는 장소에서 규칙적으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시간에 맞춰 그녀의 뒤를 밟는다든지 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그리 한가한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그리 했다가는 잘못하면 스토커로 찍히기 십상일 테니 말이다. 대신 난 그녀의 시간표를 파악하는 데 열중했다. 알고 지내는 과 후배들 가운데 학교에 다니고 있을 만한 애들 모두에게 카톡을 보내 그녀와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이 있나 물었다. 하지만 다들 그녀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답변만 보내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상당히 하이 레벨의 아싸란다. 그런데 시간표를 파악하는 건 슬슬 포기해가고 있을 무렵 한 후배에게서 예상치 못한 카톡이 왔다.

timetable

위 시간표는 실제 시간표가 아님을 밝히는 바이다

거하게 술을 한잔 샀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 내가 시한폭탄이 됐음을 느꼈다.

편집 및 교정/ 이점

글/ 개똥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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