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개의 자소서를 쓴 남자, 14년 하반기
3편 : 너무 아픈 사주는 사주가 아니었음을 / 코스모스에도 가시가 있을까

너무 아픈 사주는 사주가 아니었음을

“개 병장님, 제가 사주 한번 봐드리겠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후임 중에 부대 안에서 혼자 사주를 공부하기 시작한 놈이 있었다. 어느 날 자기 연습도 할 겸 사주를 봐주겠답시고 생활관 병사들 사주(생년・월・일・시)를 물어보고 다녔다. 나하고는 매일 점심도 같이 먹고 담배도 함께 태우는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내 사주도 털어갔다. 사실 우리 모친께서도 사주팔자를 볼 줄 아시기 때문에 내게는 이게 ‘신기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친께는 뭘 여쭤도 잘 알려주질 않으셔서 답답한 게 많았다. 젊은 사람은 그런 거 함부로 보는 게 아니라나?……. 어쨌든 아직 실력이 미천한 입문자일지라도 이번 기회에 궁금한 거나 속 시원하게 실컷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특히나……


“나 여자 언제 생기는지 좀 봐줘 봐.”


그래, 여자. 내겐 여자가 필요했다. 스물이 되면서부터는 한동안은 이렇다 할 공백 없이 거의 항상 애인이 있었다. 26살 초까지는 그랬다. 그러다가 2012년 1월에 마지막 여자친구랑 헤어졌고, 한동안 행정고시 공부에 매진하다가, 4월에 1차 탈락 결과를 접하고선 입대 신청을 했고, 7월에 입대한 뒤 쭉 여자가 없었다. 이놈이 내 사주를 물어본 게 2014년 봄이었으니 연애를 한 지 무려 2년이 넘어가던 때였다. 2년이라니! 성인이 된 뒤 단 한 번도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 적이 없었는데 2012년과 2013년은 2년 연속 외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래도 내가 군인 신분이었던 거니까 어쩔 수 없던 거라 자위를 했고, 전역을 하고 난 뒤인 2014년 크리스마스는 반드시 옆구리에 인간 난로 하나 끼고 있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후임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냉혹했다.

“포기하십시오. 32살까지는 여자가 안 들어와 있습니다.”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내 사랑스런 후임이자 동생은 그 날 내 샌드백이 됐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그의 예언은 시험대에 올랐다. 일반 휴학 1학기에 군 휴학 4학기, 총 5학기 만에 한 전공 수업에 들어가 앉았다. 06학번은 나밖에 안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나보다 두 살 많은 동기 형도 같은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서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를 나누다 교수님이 들어오시고 나서는 우린 최대한 모범적인 자세로 강의에 임했다. 최고 학번, 최고령자들로서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순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10분 정도 흘렀을까? 순간 내 두 눈이 왼쪽으로 쏠렸다. 누가 갑자기 크게 움직였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서가 아니다. 아무 이유가 없었다. 논리적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본능적으로, 아니면 하늘에 뜻에 의해 눈이 제 멋대로 움직였다.


내 눈이 나를 이끈 곳은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10시 방향에 있는 한 여인이었다. 나보다 앞쪽이었기에 앞모습은커녕 옆모습도 겨우 살짝만 보였지만 내 심장은 철없이 BPM을 높여갔다. 심장도 내 느낌을 바로 이해한 듯했다. ‘정말 닮았다.’ 3년 전에 야속하게 날 떠나간 옛 여인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얼굴을 앞에서 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내가 닮았다고 하는 건 이목구비가 아니라 그 여인이, 그리고 서너 해 전의 옛 여인이 풍기던 그 ‘느낌’이다. 화려한 건 없지만 세련되게 귀 아래로 선이 똑 떨어지는 단발머리, 얼핏 보면 수수하지만 너무 끼지도 너무 헐렁하지도 않게 몸을 잘 감싸던 의상, 그리고 연약해보이지만 심지만은 질겨 그 누구도 섣불리 꺾을 수 없을 듯한 알 수 없는 강인함……, 민들레 같았던 그 옛사람과 정말 닮아 있었다.


그렇게 그 여인에게 시선이 꽂힌 상태로 멍하니 앉아 있는데 그녀가 힐끔 내 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내 눈은 0.5초 정도 뒤에 도망갔다. 뭐, 눈이 맞은 김에 눈빛으로 무언의 작업이라도 좀 했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너무 당황스럽기도 했고 내 나름대로 생각 정리도 필요했다. 하지만 복잡한 내 머리와 상관없이 심장은 이미 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눈이 마주쳤던 그 짧은 순간을 통해 내 마음을 못해도 1%는 들켰다. 내가 머리로 어떤 판단을 내리든 과연 이성이 감정을 억누를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었다.

코스모스에도 가시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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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 McLean의 ‘Crying’이란 노래를 아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가수도 노래도 웬만한 한국인에게는 듣보잡일 거다. 장르도 미국 컨트리다. 우리나라에서는 들어볼 기회가 아예 없다고 해야 할 거다. 난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4에서 캐리 언더우드(Carrie Underwood)가 부르는 걸 보고 이 노래를 알게 됐다. 캐리 언더우드는 실제 컨트리 출신의 소녀로 컨트리 노래가 장기였고, 우승해서 데뷔한 후에도 컨트리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솔직히 캐리가 아니었으면 10년 넘게 진행된 아메리칸 아이돌에서도 이 노래가 나올 확률은 매우 희박했을 거다. 하지만 어쨌든 난 이 노래가 좋았다. 아주 신나거나 슬프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가사가 머릿속에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지는 컨트리 특유의 감성이 느껴졌다. 곧 이 노래는 내가 혼자 노래방에 갔을 때 즐겨 부르는 노래 리스트에 끼어들게 됐다. 나만 아는, 나만 듣는, 나만 부르는 노래였다.


2010년 11월, 일찌감치 추위가 찾아온 어느 날 한 바(bar)에 들어갔다. 구석 자리 하나를 잡고 앉아 코로나 한 병을 시켰더니 20대 중반 또래로 보이는 한 여직원이 맥주병과 재떨이를 가지고 와 내 앞에 섰다. 참 은은하게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아주 길지도 짧지도 않아 턱선 조금 아래에서 깔끔하게 떨어지는 단발과 어울리게 얼굴과 몸매에는 군더더기라는 게 없었다. 눈이 부리부리하게 크거나 코가 서양인처럼 높이 솟아 있지는 않았지만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군살 없는 몸의 선을 따라 살짝 붙어 내려가는 붉은 와인색 원피스는 정말 묘하게도 ‘수수’와 ‘화려’를 함께 담고 있었다.


이래저래 대화를 나눠보니 말에서도 마찬가지로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은은한 매력이 느껴졌다. 목소리 톤은 살짝 높은 편에다 말투도 조곤조곤해서 매우 여성스럽고 귀여운 편이었다. 하지만 말하는 내용이나 말씨에서는 알 수 없는 성숙함이 느껴졌다. 나와 동갑(빠른 88)이라는데도 마치 나보다 몇 해는 더 살아본 사람처럼 내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모두 이해하는 듯했고, 내가 내뱉는 모든 고민을 지혜로운 답변으로 포근하게 감쌌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냥 예쁘고 고운 길가에 핀 한 송이 꽃 같았지만, 속에서는 그 누가 짓밟으려 해도 눌리지 않는 잡초 같은 강인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한 송이 민들레꽃 같았다.


한참을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매우 익숙한 선율이 들려왔다.

♫ I was all right, for a while, I could smile for a while…… ♫


이게 무슨 노래였는지 잠깐 고민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한국사람 중에 0.1%나 알까 싶은 Don McLean의 ‘Crying’이 가게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개똥: 여기 가게는 음악 뭐로 트세요?

민들레: 보통은 멜론으로 틀고요, 가끔 그냥 제 MP3 꽂아두기도 해요.

개똥: 지금은요?

민들레: 아, 지금 이건 제 리스트에요.

개똥: 정말요??

민들레: 네……왜요??

개똥: 이거 ‘Crying’이잖아요? 이 노래 아세요?

민들레: 네, 좋아하는 노래라……이 노래 아세요??

개똥: 네, 가끔 노래방에서 부르기도 하는데…….

민들레: 와! 이 노래 아는 사람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개똥: 저도 이 노래 아는 사람 처음 봐요!

민들레: 신기하네…….


그날 밤 난 이 여인과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
었다. 사장인지 실장인지가 매순간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와중에 작업하기도 쉽지 않았고, 날 친구처럼 대하는 그녀에게 남자로 다가가는 건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한 달 정도 뒤인 12월 19일, 우리는 연인이 됐다. 그리고 내 바람대로 크리스마스를 함께 따뜻하게 보냈다.


그래, 강의실에 앉아 있는 그녀는 이런 민들레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민들레보다는 분명히 어려 보였고, 아무래도 그만큼 민들레보다는 덜 성숙한 면이 있을 거 같기는 했다. 하지만 난생 처음 민들레에게서 맡았던 수수함의 향기가 그녀에게서도 나는 듯했다. 민들레 잡초처럼 내면이 강인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민들레꽃보다 조금 더 화려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코스모스 같았다. 민들레와 코스모스 사이에 생물학적으로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지는 잘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내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 마음속에 새겨진 느낌이 코스모스였다.


하지만 예전에 민들레를 보고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겠다고 마음먹었던 때와는 내 처지가 달랐다. 난 남들보다 뒤쳐져 있는 순탄치 않은 길 위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바삐 가야만 했다. 어떻게 그녀와 잘 돼서 만나게 된다고 해도 연애라는 게 내게 도움이 될지 독이 될지도 알 수 없었고, 그 길을 가는 동안 내 곁을 지켜줄 사람에게 과연 내가 행복을 전해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 온전히 그녀를 향해 있는지, 아니면 예전 그 민들레꽃의 잔상을 쫓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겉으로 봐서는 마냥 예쁜 코스모스였지만 섣불리 손을 가져다 댔다가 보지 못했던 가시에 찔리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코스모스에도 가시가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다가가서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거였지만, 분명한 건 내 몸과 마음은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이미 나도 모르는 새 움직이고 있었던 거 같다. 취업과 여자, 이 둘은 그렇게 함께 꼬여가기 시작했다.

편집 및 교정/ 이점

글/ 개똥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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