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개의 자소서를 쓴 남자, 14년 하반기

2편 : 두근두근 첫 키스, 지겨운 뽀뽀 / 취준생 박람회 / 취준생에게 현대자동차란?

 

두근두근 첫 키스, 지겨운 뽀뽀

내 첫사랑은 고등학교 3학년 같은 반 학생이었다. 어찌어찌하다 잠깐 사귀게 됐지만 금방 차였고, 대학 입시가 지나간 스무 살 2월에 다시 고백해 만나게 됐다. 당시 우리 동네에 있던 ‘후레쉬베리’(과자 말고 카페) 매장은 우리 단골 데이트 장소였다. 최대한 구석 자리를 골라 옆으로 나란히 붙어 앉아서는 아직 뽀뽀도 못한 숙맥들이 손끝만 살짝 닿아도 서로 부끄러워하며 알콩달콩 잘도 놀았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가게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의 남녀들이 몇 시간 눌러 앉아 서로 만지고 쪽쪽 빨아 대는, 어르신들이 보면 발랑 까진 젊은이들의 퇴폐 공간일 수도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주머니가 가볍던 당시 우리에게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마음껏 나누고 쌓을 수 있는 고마운 보금자리였다.

“우리 내기 할래?”

그날도 그렇게 순수하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녀가 내게 불쑥 내기를 제안했다. 무슨 종류의 내기를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고, 뭘 걸었는지만 기억난다. 뭔가 게임을 하나 해서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에게 집에 돌아가는 동안 내내 볼에 뽀뽀를 해주는 거였다. 그러니까, 난 항상 여자친구를 집에 바래다주고 우리 집으로 갔으니까, 여자친구네 집을 향해 걸어가는 내내 진 사람이 자신의 입술을 이긴 사람 볼에 붙인 상태로 가야 하는 거였다. 거리를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민망함을 무릅써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진도를 어찌 빼야 할지 몰라 쩔쩔 매던 내게는 그보다 반가운 제안이 없었다. 난 흔쾌히 응했고, 내가 이겼다. 난 내 볼에 그녀의 입술을 붙인 채 사람들 사이를 걸어 그녀의 집 앞까지 다다랐다. 마침내 집 앞에 멈춰 서서 입술을 떼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작별을 나눌 때가 됐지만 난 그녀를 그대로 들여보낼 수 없었다. 1초나 걸렸을까? 난 나도 모르는 새 그녀의 입술에 내 볼이 아닌 입술을 가져다 댔다. 첫사랑과의 첫 입맞춤이자 내 생애 첫 키스였다. 내 심장은 태어나서 가장 격하게 뛰었다.

도키도키..!

도키도키..!

그로부터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당시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었다. 뽀뽀든 키스든 자주 하기는 했지만 예전의 가슴 떨리는 그 기분은 느끼기 어려웠다. 아랫도리가 빳빳해지는 건 여전했지만 그건 입맞춤의 설렘 때문이기보다는 내 몸에 닿는 그녀의 부드러운 젖가슴에 대한 육신의 반응 정도였다. 아, 물론 난 여전히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이 변했다기보다는 그냥 ‘키스’ 자체의 느낌이 달라진 거였다. 1년 전에는 키스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꿈의 목표 같은 거였지만, 이제는 만나고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 아니면 스티커사진을 찍을 때 취하는 기본 포즈 정도였다. 좀 더 삭막하게 말하면 좀 이따 예정돼 있는 격렬한 몸의 대화를 위해 미리미리 적립해둬야 하는 포인트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다. 오해하지 말자.)

2014년 9월,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날씨로는 아직 쌀쌀해지지 않아 쉬이 계절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대학가는 어김없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도 나름 갓 제대한 복학생이었던지라 몇 달 앞서 드는 대학 단풍에 몸을 퐁당 빠뜨리고 싶었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8월이 끝나갈 무렵부터 찔끔찔끔 채용 공고가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9월이 되자마자 무슨 댐이라도 무너진 마냥 공채들이 터져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공채 홍수가 제대로 취준생들을 덮쳐 피부에 와 닿는 건 9월 중순 즈음부터다. 9월 1일부터 공채가 쏟아진다고 해도 그것들이 바로 마감이 아니라 대부분 중순 마감이기 때문이다. 9월 중순이 되면 하루도 안 빼놓고 매일 원서 마감이 십 수 군데씩 겹치니 미쳐버릴 노릇이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건 마치 키스…! 같았다. 생애 첫 자기소개서를 쓸 때의 설렘과 기대감은 가히 하늘을 찌를 수준이다. 첫 키스는 현대자동차였다. 2월이나 8월에도 채용 공고가 여럿 올라오긴 하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3월과 9월 초부터고, 그 포문은 보통 현대자동차가 열어준다. 덕분에 대부분의 취준생들은 현대자동차 자기소개서에 다른 자소서와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의 공을 들이게 된다. 현차 마감일 이전에 다른 굵직한 기업 마감이 없기 때문에 이 하나에 며칠씩 투자하게 되는 거다. 게다가 시즌 첫 자기소개서이기 때문에 다들 야심찬 각오로 자신 있게 자기 어필을 해나간다. 나도 그랬다. 마치 내가 온 세상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처럼 일필휘지로 자소서를 써내려갔고, 며칠에 걸쳐 수정을 거듭하며 현대자동차 입사에 대한 꿈을 부풀렸다.

쪽팔리지만 당시 내가 썼던 첫 자소서를 한번 까보겠다.

 

<현대자동차 – 국내영업/서비스>

현대자동차 해당직무 분야에 지원하게 된 이유와 선택 직무에 본인이 적합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이유 및 근거를 제시해 주십시오. (최대 3000 자 이내로 작성)

편집_14년 하반기 현대자동차 자기소개서

편집_14년 하반기 현대카드 자기소개서 지금 와서 다시 보면 그리 잘 쓴 것도, 그리 못 쓴 것도 아니다. 진행 자체는 매끄러운 편인 거 같지만 ‘자소서’라는 장르로서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어차피 이걸 자소서의 좋은 예나 나쁜 예로 보이는 게 아니다. 내가 보이고 싶은 건 이 자소서에 묻어 있는 ‘호기’다. 내가 쓴 자소서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호기롭다. 그때는 내가 이걸 써놓고 최고의 자소서를 집필했다는 기분에 뿌듯했다. 내 머릿속에는 이 자소서에 푹 빠져 감탄을 연발하며 읽고 있는 채용담당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마치 연인과 첫 키스를 하고나서 내가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키스를 선사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정작 상대방은 내 미숙한 스킬과 어디서 왜 나는지 모르는 이상한 냄새를 신경 쓰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지만 첫 키스의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이어지는 자소서 홍수 속에서 난 영혼을 잃어갔다. ‘자소설’(자소서+소설)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다 거기서 거기인 듯 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조금씩 다른 수많은 자소서 항목을 채우다보니 어느새 내가 뭘 쓰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자판 위에 손가락을 놀리는 경지에 도달했다. 때로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감성적인, 때로는 한없이 무미건조한 자소서들을 하나하나 배설해나갔다. 처음에는 모든 자소서를 완벽한 작품으로 만들겠다 각오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복붙의 유혹도 커져갔다. 점점 질보다 양이 중요해졌고, 좋은 자소서를 쓰는 것보다 많은 수의 지원서를 제출하는 데 더 신경을 쓰게 됐다. 그렇다고 내가 자소서를 쓰는 회사들에 대한 입사 의지가 없거나 약했던 건 아니다. 난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고, 다만 키스의 의미만 달라졌을 뿐이다. 난 여전히 내가 지원하는 모든 기업에 합격하고 싶었고, 단지 자소서 자체가 달리 느껴지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BC카드-CRM>

1. 해당 부문에 지원하게 된 동기와 입사 후 10년 내에 이루고 싶은 목표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십시오. (700자 이내)저는 CRM이 하고 싶습니다.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라는 전공 강의를 들으면서였습니다. 이 수업에서는 설문과 실험을 통해 소비자 반응을 조사한 뒤 이를 SPSS를 통해 통계 분석을 했습니다. 소비자 행태를 사회과학 통계 기법을 통해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됐고, 저는 이를 활용하는 직무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 강의를 들은 이후 저는 온라인상 특정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평을 수집, 분류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이 프로그램에 들어갈 필터링 단어 조합을 만드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소비자의 반응을 조사해 파악하는 일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통계에 대한 이론적 깊이를 더하고자 ‘*****’이라는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BC카드는 국내 최고의 지불결재 서비스 제공 회사이고, 서비스 성질상 한 고객에 하루에도 여러 회에 걸쳐 이용합니다. 따라서 소비자 행태 분석과 관리에 관심이 있는 저는 제 역량을 BC카드 성장에 기여할 수 있고, 동시에 BC카드는 제게 풍부한 역량 발휘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특히 저는 기본적인 소비자 반응이나 행태 분석의 매뉴얼이나 자동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저는 10년 뒤 BC카드에서 이를 이뤄 CRM 인력이 보다 더 고차원적인 고객 관리 전략에 힘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2.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타인과 협업했던 경험과 그 과정에서 보인이 수행한 역할, 그리고 해당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십시오. (700자 이내)두 해 전 ‘*****’라는 제조업체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유기발광물질을 정제하는 장비를 만드는 기업이었고, 저는 회사외 해외 바이어 간 통역을 맡았습니다. 문제는 제게 첫 통역 경험이었고, 기술 관련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의 일원으로서 회사를 대변해야 했지만 그저 잘 모르고 낀 제3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떻게든 조직에 녹아들어 그들의 입이 돼야 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를 회사와 현실적으로 의논하며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우선 회사와 제품에 관한 자료를 있는 대로 모두 받아와 공부했습니다. 관련 용어를 숙지하고 장비 작동 메커니즘을 최대한 익혔습니다. 그리고 바이어들이 입국하기 전 제가 먼저 회사 측에 사전 미팅을 요청했습니다. 통역 상황을 미리 시연해보며 그들과 호흡을 맞췄고, 바이어들이 왔을 때 저는 제법 회사의 일원처럼 정보를 능숙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 새로운 직무, 새로운 분야에 빠르게 적응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값진 성과는 제가 직접 관련 없는 아르바이트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회사의 진정한 일원이 되려고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던 것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이런 경험을 했으니 앞으로 조직에 몸담게 되면 그 조직에 녹아들어 동료들과 협력하는 것은 이제 더욱 자신이 있습니다.

3. 예상치 못한 문제의 발생으로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을 때, 책임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경험과,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십시오. (700자 이내)‘*****’라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유명 사상가들의 저서에 대해 강사가 요약해주는 것만 듣기보다 직접 읽어보고 깊이 있게 이해하자는 취지에서였습니다. 첫 책을 존 롤스의 <정의론>으로 정하고, 스터디원을 모아 야심차게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작하자마자 큰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학점, 취업과 직접 관련이 없다보니 스터디 활동이 사람들의 우선순위에서 밀렸습니다. 그러다보니 결석과 탈퇴가 잦았습니다. 그리고 내용적 측면에서 우리말 번역 문제도 있었습니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생기면 스터디원 간 논의를 통해서도 해결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스터디 장으로서 이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선 저는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번 탈퇴한 사람도 나중에 자신이 읽고 싶은 책 순서가 오면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는 제 개인 시간을 희생해 우리말과 영어 모두로 읽었습니다. 이를 통해 번역이 이상한 부분을 영문판의 도움으로 설명해줬습니다.

한 조직의 리더로서 조직을 위해 특별한 희생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는 매우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팀원 관리가 다소 복잡해지고, 제 개인 시간이 들긴 했지만 이렇게 해서 스터디를 1년 이상 유지할 수 있었기에 뿌듯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다양한 책을 읽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4. 지원한 부문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핵심역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해당 역량을 갖추기 위해 본인은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십시오. (1000자 이내)CRM 업무에는 종합적인 시각과 능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소비자 행태에 대한 거시적 접근을 하는 동시에 구체적 수준의 분석을 해야 하고, SPSS와 EXCEL 등의 프로그램도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런 역량을 갖추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첫째로, 저는 *****을 전공하면서 소비자 분석이나 커뮤니케이션 전략에 관한 소양을 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학에 대한 기본 지식도 갖춰왔기 때문에 시장 동향 파악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때그때 효율적 소비자 관계 관리를 위해 어떤 문제에 집중해야 할지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소비자 분석에 관한 경험이 있습니다. 실제 SPSS를 통한 통계 분석을 해봤고, 이론적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한 경험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라인상 특정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평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소비자의 반응을 파악하는 일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셋째로, 저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SPSS와 EXCEL 활용 경험이 있습니다. 특히 EXCEL은 군복무 시절 법무실 행정병으로 근무하면서 소음소송 관련 중복 원고 색출, 환수금과 이자 계산 등의 작업에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SQL 등의 여역은 아직 생소한 것이 사살입니다. 하지만 BC카드에 몸담기까지, 몸담게 된 뒤 부족한 역량을 채워나갈 것입니다.

일단 글의 퀄리티 자체도 바닥일 기지만, 그보다도 의욕이 떨어져 있는 게 확 느껴질 거다. 그저 의무적으로 글자 수 채우는 데 급급해서 쓴 느낌이 많이 난다.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 그랬을 거다.

결과적으로 2014년 하반기에는 총 24개의 입사 지원서를 제출했다. 문송이(문과라서 죄송합니다……ㅠ) 치고는 좀 적게 쓴 편이지만 12학점을 들으며 자소서를 찍어내는 게 만만치가 않았다. 딴에는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내가 2014년 하반기 시즌에 지원한 회사들은 다음과 같다. (ABC, 가나다 순)

(2014년 하반기 취준 때는 직군이나 자소서를 잘 저장해놓지 못했다.)

지원회사명001

취준생박람회

9월 초에 학교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 갔다. 이 얘기는 짧고 간단히 끝내겠다. 솔직히 별로 얻은 게 없기 때문이다. 요즘 취업박람회는 ‘취업’박람회보다는 ‘취준생’ 박람회에 가까운 듯하다. 일단 상위권 대학에서 열리는 취업박람회에는 굵직한 대기업에 많이 참여하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취준생들이 심하게 많이 몰린다는 거다. 웬만큼 인기 있는 기업 부스에는 모두 어마어마하게 긴 줄이 형성돼 있고, 하루 종일 머물러도 상담할 수 있는 기업 수는 별로 안 된다. 취준생 입장에서 여러 기업들을 둘러보고 이것저것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업 입장에서 수많은 취준생들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다. 취준생 입장에서도 기업보다는 다른 취준생들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에 가깝다고 해야 할 거다.

내가 취업박람회에 가서 얻은 정보는 이렇다.

‣ LG그룹에 서브원이라는 계열사도 있다.‣ SK E&S에는 여러 도시가스 자회사들이 있고, 그중에 코원이라는 데는 본사도 서울에 있고 복지도 좋단다.‣ 넥슨은 돈을 적게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종의 특수성 때문인지 지조가 대단하다.‣ 기아자동차는 애초에 차에 관심이 많고 잘 아는 사람을 선호한다.‣ 박람회 직후 회자되는 기업은 좋은 정보를 제공한 곳이 아니라 좋은 사은품을 제공한 곳이 된다.‣ 사람 개많다. 취업이 힘들긴 힘든가 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난 정보를 얻겠다고 취업박람회에 참여하는 건 비추한다. 설사 많은 기업 부스에서 상담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 자리에 앉아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기업 정보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음과 같은 순서다.

① 몇 다리를 건너서라도 현직자를 찾아 직접 물어본다.② 인터넷 시대다. 인터넷으로 검색한다. 기업 홈페이지, 다트, 뉴스, 유투브 동영상 등을 뒤진다.③ 취업박람회 대신 개별 기업(또는 그룹) 설명회나 상담회를 찾아간다.④ 위포트 등의 사이트에서 제공(판매)하는 기업분석자료를 구해 공부한다. (특히 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경우)

나 같으면 취업박람회는 절대로 안 간다.

 

취준생에게 현대자동차란?

기업 인적성 시험이란 게 보통 서류 전형을 통과해야 볼 수 있는 건데, 요새는 서류 통과도 워낙 힘들어서 내가 어디 시험을 볼 수 있게 될지 미리 알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서류 발표가 날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면 발표 날짜로부터 시험 일까지 평균적으로 일주일 정도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짧으면 일주일도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일단 어느 기업 책이라도 사서 미리 연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기업별로 종류별로 책을 사다가 다양하게 풀어보기도 하고, 아닌 사람들은 한두 군데만 미리 풀어보기도 한다. 어찌됐건 취준생들이 인적성 연습을 할 때 가장 먼저, 가장 많이 푸는 건 보통 삼성의 SSAT1)지금은 GSAT라고 한다.다.

취준생들이 미리부터 ‘싸트’를 잡고 있는 데는 크게 4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① SSAT는 무조건 본다. 물론 2015년 하반기부터는 삼성도 서류 전형에서 지원자를 거르기 시작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본 요건(학점, 영어 성적 등)만 충족하면 무조건 시험을 보게 해줬다. ② SSAT는 여러 인적성 시험 가운데 가장 어려운 축에 속한다. 어려운 걸로 미리 연습하면 상대적으로 쉬운 시험들이 더 수월해지는 건 당연한 소리다. ③ 일류 기업이다. 삼성은 취준생들이 꿈꾸는 최고 수준의 기업 가운데 하나이므로 미리 준비할 가치가 있다. ④ 삼성은 합격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가장 인기 있는 기업이기에 합격 가능성이 낮을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채용 규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수준이기 때문에 허수만 이겨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삼성과 SSAT는 이렇게 여러 면에서 취준생들에게 의미가 크다. 그런데 현대자동차그룹도 삼성그룹 못지않게 취준생들에게 갖는 의미가 크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삼성보다 더 클 수도 있다. 현차그룹이 취준생들한테 고마운 존재인 이유는 크게 3가지다.

① 현대자동차그룹은 빠르다.

현대자동차(그룹 말고 계열사) 채용 공고는 보통 본격적인 공채 시즌이 시작되는 3월이나 9월로 넘어가자마자 뜬다. 메이저 급 가운데서는 거의 가장 빨리 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곳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미리 몸을 풀 수가 있다. 공고가 일찍 뜨다보니 다른 곳과 마감이 거의 겹치지 않고, 그렇게 때문에 오랜 시간을 투자해 자기소개서를 가다듬으며 앞으로 수많은 자소서를 어떻게 쓸지 대략 구상할 수 있다. 현대자동차뿐만 아니라 그룹 내 다른 계열사들 공고도 상당히 빨리 뜨는 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현대자동차그룹 인적성 시험인 HMAT2)일명 ‘흐맷’도 날짜가 매우 빠르다. 메이저 대기업 시험 가운데 거의 가장 빠르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자소서뿐만 아니라 인적성 시험도 현차그룹을 통해 미리 몸을 풀 수 있다.

② 현대자동차그룹은 중복 지원이 가능하다.

한화그룹은 계열사별로 채용 시스템이 따로 돌아간다. 계열사별로 채용 공고가 뜨는 걸 모두 지원할 수 있고, 통과할 경우 면접도 모두 들어갈 수 있다. 3)참고로 한화는 시험이 없다. LG그룹은 그룹 내에서 3개의 계열사까지 선택해서 지원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한 군데만 통과하면 거기 시험을 보러 가는 거고, 2개 이상 통과할 경우 시험을 한 번만 보면서도 여러 군데 시험을 동시에 보게 되는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서류 전형에서 LG화학과 LG전자에 통과했을 경우, 둘 중 한 군데(예를 들어 LG화학)만 시험을 보러가도 나머지 계열사(LG전자)에서도 그 결과를 끌어와 다른 LG전자 응시생들과 성적을 비교해 합격자를 거르는 거다. 시험 전형에서까지 복수로 합격했을 경우 면접은 모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예외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메이저 그룹들은 모두 그룹 내에서 1개의 계열사만 지원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현차그룹은 좀 특이하다. 일단 여기는 계열사별로 채용 공고도 따로 뜨고, 이에 모두 지원할 수 있다. 합격자를 거르는 것도 계열사별로 별도로 진행한다. 하지만 여러 군데 통과했을 경우 HMAT은 한 곳만 선택해서 볼 수 있다. 모든 계열사들 시험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해리포터>의 헤르미온느가 쓰던 시간을 돌리는 모래시계가 없다면 두 군데 이상 시험을 보는 건 불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한화보다는 못한 거지만 그래도 여러 계열사에 중복 지원할 수 있다는 점은 취준생들에게 큰 힘이 된다. 삼성의 SSAT를 볼 수 있는 확률이 100%라면, 현차의 HMAT 응시 확률도 80% 정도는 되는 거다. 4)그래서 현차그룹 모든 계열사 서류에서 탈락하고서는 좌절에 빠져 게시판에 울면서 푸념을 늘어놓는 경우도 종종 있다. LG그룹은 여러 군데 시험과 면접을 모두 볼 수 있게 해주지만 서류 단계에서는 3군데 밖에 지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험장에 들어갈 확률은 오히려 현차그룹보다 떨어진다.

현차중복지원001

③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들은 모두 ‘괜춘’하다.

현대자동차그룹에는 32개의 계열사가 있다. 이들 가운데는 일반인에게도 유명한 곳들(현대차, 기아차, 건설, 모비스, 카드/캐피탈 등)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들도 있다. 중요한 건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그룹 내 웬만한 계열사들은 대부분 안정적이고 연봉이 높은 편이란 거다. 따라서 설사 이름이 생소한 기업이라도 현차그룹이라면 웬만해선 지원해보는 게 좋고, 통과했을 때 메이저 계열사가 아니라고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다. 물론 이왕이면 현대자동차 같은 메이저 계열사가 욕심이 나겠지만 취업이 어려운 요즘 현대자동차그룹은 우리에게 많은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해주는 곳이다. 반드시 들어가고 싶은 기업이나 산업이 있거나 야망이 크면 모르겠지만 당장 취업이 급하다면 현차그룹 계열사들을 꼼꼼히 챙기길 권한다.

 

편집 및 교정/ 이점

글/ 개똥그릇

※편집자: 다음 주부터 <99개의 자소서를 쓴 남자> 시리즈는 매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 이전화, 99개의 자소서를 쓴 남자, 14년 하반기(1)

99개의 자소서를 쓴 남자, 14년 하반기 (3), 다음화 >

   [ + ]

1. 지금은 GSAT라고 한다.
2. 일명 ‘흐맷’
3. 참고로 한화는 시험이 없다.
4. 그래서 현차그룹 모든 계열사 서류에서 탈락하고서는 좌절에 빠져 게시판에 울면서 푸념을 늘어놓는 경우도 종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