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똔의 술술술술 02

서울대입구 완산정, 모주

집이라고 집인 게 아니고, 집이 아니라고 집이 아닌 게 아니다. 내가 술을 마시고 싶을 때, 술을 내어줄 수 있는 그곳이 술집이다. 따라서 술집은 국에 밥을 말아 쌉쌀한 소주 한 잔에 밥 한 술을 넘기는 국밥집일 수도, 마음이 허한 새벽 맥주 한 캔을 손에 쥐어주는 편의점일 수도 있다.

 

모주는 그 어떤 술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술이다. 그것은 모주가 대단히 독특한 맛을 낸다거나 훌륭한 풍미를 지닌 명주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모주에 그런 것을 기대했다가는 별 것 아니라면 별 것 아닌 들척지근함에 실망하고 말 것이다.

모주는 취하기 위한 술이 아니라 취한 다음 날의 술, 술 마신 다음 날을 위한 술이다. 그렇기에 모주는 특별하다. 술기운에 얼근하게 취하기 위해서 모주를 마시는 사람은 없다. 모주는 해장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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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탄수 for Misfits

어젯밤 달렸다면 꽝꽝 울려대는 머리와 쓰린 속을 안고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 완산정에 들어가자. 계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숙취에도 불구하고 속에서는 마음 한켠을 가볍게 하는 기대감이 커져간다. 완산정은 모주만큼이나 해장에 제격인 콩나물국밥을 파는 곳이다. 완산정에 가기에는 손님들이 자그마한 식당을 벅적거리도록 가득 메매운 오전의 아침이나 점심 즈음이 적당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느긋한 가운데 콩나물국밥을 먹어서는 맛이 안 난다. 그리고 한 잔이나 아예 한 항아리의 모주를 시키기에도, 옆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거나 북적거리는 맛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완산정이 콩나물국밥 집이긴 하지만, 아마 콩나물국밥보다는 모주 맛에 이곳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모주 없이는 완산정의 콩나물국밥이 완성되지 않는다. 혹은 외려 모주를 들이키기 위해 콩나물국밥도 끼워서 먹어주는 것 아닐까. 이래서야 반주가 아니라 주반이다. 전주 사는 누구였을는지는 전혀 상상조차 가지 않지만, 어쨌든 콩나물국밥에 모주를 곁들일 생각을 해낸 그는 멋진 술꾼이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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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국밥(사진/한탄수 for Misfits)

주인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손님의 머릿수를 보고 콩나물국밥을 내온다. 일단은 때를 놓치지 말고 모주를 시키자. 한 순간이라도 곁에 모주를 두지 않고 콩나물국밥만을 뜨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테이블에 날라져 오는 순간까지도 보골보골 끓고 있는 콩나물국밥의 국물은 외모만 가지고도 알코올에 절임당한 속을 후끈하게 풀어줄 수 있을 것 같다. 한 숟갈 떠 보면 뜨끈한 국물 속에서 느껴지는 콩나물 특유의 시원함과 그 위에 얹어지는 칼칼한 맛에는 국밥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본연의 카타르시스가 있다고 할까. 그야말로 ‘시원하다’는 아이러니한 표현보다 적당한 말이 있을 수 없는 부류의 맛인 것이다. 게다가 밑반찬으로 나오는 나물의 감칠맛도 훌륭한 까닭에, 숙취 탓에 잃어버렸던 입맛이 살아난다. 이 시원한 국물에 밥을 말아 뜨거운 줄도 모르고 훌훌 먹고만 싶어진다.

하지만 콩나물국밥이 제 아무리 훌륭한들 모주 없이는 무슨 소용이 있겠느냔 말이다. 마침내 모주가 나온다. 부옇고 하얀 색의 모주를 술 마신 다음 날 한 모금 넘기는 순간, 목 안을 흘러 지나 속을 부드럽게 감싸는 모주의 감촉은 아무리 맛있고 비싼 술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 막걸리에 10여 종류의 한약재를 넣고 끓인 뒤 식힌 모주에는, 탄산이 든 막걸리 특유의 톡 쏘는 맛은 사라지고 쌀로 빚은 술의 순수한 부드러움만이 남아 있다. 호들갑스러운 수사에 미리 용서를 빌어야 하겠지만, 탁한 우윳빛을 띤 한 잔의 모주 안에는 조용하고 우아한 은하가 있다. 그 어떤 모난 별도 포용할 것처럼 온유한, 그야말로 은하수 같은 맛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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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은하수 같은 맛의 모주(사진/한탄수 for Misfits)

한편, 지난 날의 숙취를 모주로 해장하며 오늘은 또 어떤 술을 마실까 고민하는 술꾼에게는 각자의 취향이 있으니 섣불리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한 가지 추천을 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희부연 모주를 그대로 마시는 것도 좋지만, 모주를 다시 한 번 끓여 마시는 일이다.

따뜻하게 주세요, 라는 말에 이내 주인은 모주에 흑설탕을 넣고 부글부글 끓이기 시작할 것이다. 따뜻하게 내온 모주는 홍차 라떼 같이 은은한 엷은 갈색으로 변한 후이고, 잔 위에 보드라운 거품의 층이 끼게 된다. 모주를 끓임으로써 그나마 모주 안에 남아 있던 알코올이 더 날아가는 대신, 모주는 달짝지근한 풍미와 농밀한 질감을 지니게 된다. 입 안으로 모주가 들어오기 직전의 찰나, 먼저 코끝에 달달하고 따뜻한 김이 훅 끼쳐오고, 곧바로 진하고 거품 많은 모주의 촉감이 입 안을 따스하게 채운다. 이 달콤하고 따스하며 몽글몽글한 끓인 모주 앞에서, 그 전날의 술이 제 아무리 성질이 고약하다 한들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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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탄수 for Misfits

국밥과 모주는 뜨끈하고, 어느덧 국밥과 모주를 남김없이 비운 술꾼의 속은 홧홧하다. 술꾼이 별 수 있나. 그렇다면 술꾼은 모주가 남긴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이제 다시 또 다른 술을 마시러 발길을 옮기면 되는 것이다.

 

교정 및 편집 / 저년이

사진 / 한탄수

글 / 안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