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하오. 혹은 오하요. 이상하게도 내가 유럽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첫 마디는 중국어이거나 일본어였다. 이런 인사말이 아니더라도 ‘Are you from China?’ ‘Welcome, Japanese’ 같은 말들이 내 발길을 멈춰 세웠다. 그냥 못 들은 척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난 부러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아니요, 전 한국 사람입니다.”

내 국적이 유난히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다. 일본인, 중국인 취급받은 게 기분 나빠서냐고 물으면 아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 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 내 눈에도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사람들은 비슷해 보이니까. 내가 한국이라는 국적을 밝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좁은 시야, 그러니까 아시아인처럼 생긴 사람은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그네들의 게으른 태도가 기분 나빠서다.

누군가 유럽 내의 인종 차별에 대해 내게 묻는다면 아마 나는 ‘거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완전히 뿌리 뽑힌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인종주의가 얼마나 몰상식하고 잘못된 생각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충분히 이뤄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의 불편은 존재한다. 황인종이라서가 아니라 ‘아시아인’이라서 겪게 되는 것. 21세기에 현존하는 또 다른 차별주의,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백인, 흑인 그리고 아시아인

아시아인. 그래, 나는 아시아인이었다. 유럽에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정체성이었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서로를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으로 구별 짓는 일은 많았어도 동양인과 서양인으로 굳이 나를 구분 지어 생각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고 나니 나는 그들과 생김새도 언어도 생각하는 방식도 너무나 다른 완연한 이방인, 아시아인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인종주의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한 번도 ‘황인종’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흑인, 백인. 그 다음엔 아시아인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난 지금껏 인종주의엔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이 있다고 배웠는데 여기 사람들은 흑인, 백인이라는 말은 써도 황인종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대신 아시아인이라는 단어를 썼다. 결국 ‘황인종=아시아인’이라는 이상한 등식이 성립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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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인은 모두 ‘황인’?

“아시아인은 다 황인종이잖아, 황인종이면 아시아인이고. 뭐가 잘못됐는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흑인이 아프리카인이 아니고, 모든 아프리카인이 흑인이 아니듯 황인종과 아시아인을 동의어로 치환해 사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물론 아시아인 대신 황인종이란 말을 쓴다고 해서 인종주의가 바로잡히는 것이 아니다. 인종주의라는 낡디 낡고 성의마저 없는 분류 체계는 아시아인이라는 말로도 황인종이라는 말로도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문제다. 그럼에도 아시아인이라는 말에 딴지를 거는 것은 인종주의라는 이름으로는 조금도 용납될 수 없는 무식하고 무분별한 차별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름으로는 합리화될 수 있는 게 지금의 유럽 사회, 또 서양 사회이기 때문이다.

무지의 가면 뒤에 숨은 폭력

인종주의에 흑인, 백인, 황인의 세 가지 분류가 있었다면 오리엔탈리즘에는 동양과 서양, 두 가지의 개념만 존재한다. 베일에 가려진,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 그들이 아시아에 떠올리는 환상은 이런 것이다. 그들은 무지 뒤에 숨어 관심과 호기심으로 가장한 무례한 질문을 쏟아 놓는다. 정말 그들이 아시아에 관심이 있고, 진지하게 알고 싶다면 내게 웃음 섞인 중국어나 일본어를 첫 마디로 내뱉는 무례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하루는 친구에게 물었다. 왜 유럽 사람들은 나한테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이냐고 묻는 거냐고. 친구는 자기들이 아시아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런 거니까 내가 이해해야 한다고 답했다.KakaoTalk_20151222_005912564모르는 사람 치고 태도가 너무 당당했다. 물론 모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나에게 중국, 혹은 일본이라는 선택지를 들이민 이상 그들은 나를 외모적 특징으로 평가하는, 그러니까 피부색 따위로 인간을 분류하고 차별하려 했던 인종주의와 똑같은 실수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잘못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는 너무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인종주의자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오리엔탈리스트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본인의 무지에서 나온 실수가 어떻게 자신을 ‘나쁘고 몰상식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냐 불평할 뿐이다. 하지만 거듭 말하건대, 외모로 누군가의 출신지와 국적을 판별하고 호기심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직설적이고 불편한 질문을 쏟아내는 건 결코 성숙한 시민의식일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

유럽에서 아시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회적 소수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시아에서도 꽤나 잘 나가는 한국에서, 그중에도 수도인 서울에서, 남들한테 꿀리지 않은 대학 교육을 받으며 웬만큼 누릴 것 다 누리고 살던 나에게 유럽에서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언어 장벽은 고사하고 길거리를 걸을 때 느껴지는 시선이나 무례한 언행들, 친구 사이라 해도 이따금씩 ‘아시아인’인 나를 향해 던져지는 지루하고 기분 나쁜 질문들. ‘문화 차이’라는 간단한 말로 설명하고 이해하기에는 그 모든 것들이 내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친다 지쳐

지친다 지쳐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아시아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도 결코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하다. 우리가 길에서 백인을 마주치면 ‘외국인’이라고 인식하지만 같은 아시아인이어도 동남아에서 온, 그러니까 우리보다 피부색이 어두운 아시아인을 보면 지레 그네들의 경제 수준이나 사회적 지위를 넘겨 짚곤 하기 때문이다. 같은 대륙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구분 짓고 교묘하게 차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그러니까 같은 아시아인이 아시아인에게 가지는 오리엔탈리즘이다.

결국 내가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잊고 산 건 은연중에 내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고, 그들보다는 많은 걸 누리고 산다는 우월감을 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럽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을 탓하는 나 역시 한국에서 꽤나 뻔뻔한 차별주의자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적극적으로 차별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더라도 어떤 사회적 편견에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모두 조금씩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보다 단지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로 감히 그들의 교육 수준을 운운했던 우리를, 그런 말에 침묵했던 우리를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토록 나약한 우월감

우리가 사회에서 당연하게 누려왔던,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누리게 될 편리는 이따금씩 나보다 약한 다른 누군가를 격리시키고 차별함으로써 얻어지기도 한다. 내 밑에 누군가를 두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이 나약한 우월감이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마주한 오리엔탈리즘의 ‘진짜’ 맨얼굴일지도 모른다. 오리엔탈리즘이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나 역시 내 ‘밑’의 무언가를 상정하고 있는 이 모순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뻔뻔한 얼굴을 하고 무자비하게 가하는 폭력이, 우리가 유럽 사람들의 오리엔탈리즘을 탓할 때 마주하게 되는 가장 불편한 점이기 때문이다.

내가 차별당하듯이, 나도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차별당하듯이, 나도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가 타지에서 ‘아시아’라는 말을 들을 때, 그리고 뒤이어 ‘한국’을 설명할 때, 얼마나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캄보디아의 근사한 사원과 중국의 독특한 자연 경관을 상상하며 아시아에 가보고 싶다는 외국인에게 한국은 엄청나게 발전한 나라라고,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도, 매일 보는 TV도, 심지어 자동차도 만들어내는 게 우리나라라고 강조하는 내 모습을 돌이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역시 지금껏 이 오래된 폭력에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동조해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 잘못된 가치체계에서 폭력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어쩌면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 그네들의 것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바꾸기 어려운 문제는 아닌지 반성하는 것이 우리가 이 차별에 근본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선택지일 것이다.

 

편집자주: <구운몽-알고보니 다 꿈이었더라>시리즈는 미스핏츠에서 연재될 칼럼입니다. 한국에서 교육받고 생각해온 ‘헬조선’의 대학생이 유럽에서 느끼는 것, 유럽 사람들이 보는 한국, 그리고 한발 떨어진 곳에서 보는 대한민국에 대해 독자분들과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유럽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재밌게 읽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 및 교정/요정

글 및 사진/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