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1952)

 대한민국에서 수능을 본 사람이라면 한 번이라도 이 시를 보았을 것이다. 이 시는 생각보다 수많은 의미로 점철 되어있다. 또한, 여러 의미로 변주된다. 그것은 연애의 관점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문자 그대로의 꽃이기도 하다. 내포되어있는 많은 뜻 중에서 하나의 뜻을 고르라면 이 시에는 ‘호명’의 의미가 담겨있다. 호명이란 이름을 부른다는 뜻인데, 이름에는 많은 뜻이 있다. 이름을 가지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 이름에 대한 뜻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인정!

인정!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이름을 가진다. 태어나자마자 가지는 주민등록상 이름도 그렇고, 사회에 나가서 불리는 여러가지 ‘칭호’들도 그렇고,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이름도 있다. 나이의 차이 때문에 붙였다 떼어지는 이름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스트’ 또한 누군가의 이름이 될 수 있다. 페미니스트란 페미니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데, 한국에서는 흔히 ‘여성주의’로 해석된다. 역사적으로 약자의 입장이었던 여성의 입장을 보호하고 대변하기 위해 생겨난 학문의 갈래다.

 현 시대의 대한민국에서는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은 안타깝게도  본래의 뜻과는 한참 벗어난 이미지로 비춰진다. 어떤 한 주제의 학문이 그렇듯 페미니스트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그중 한 갈래인 극단적 페미니스트가 모든 페미니스트의 아이콘처럼 곡해받은 탓이다. 또한 ‘여성을 위한 학문’이라는 세간의 인식 때문에 ‘페미니스트’를 여성 우월주의자로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페미니즘은 무엇일까.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고,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생겨났다는 것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을 ‘보호’하고 ‘인권’을 지키는 것이 어느 정도 선이며 그 외의 인격체들은 페미니즘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한 학문이라면 여성의 반대편에 있는 ‘남성’의 존재는 ‘페미니즘’에서 싸워서 이겨야 하는 상대가 아닌가.

 페미니즘에서 남성은 이겨야 하는 상대가 아니다. 한국의 인식처럼 군림하고 있는 남성을 끌어내려 그 자리에 여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페미니즘의 본질은 여성이 여성으로 가지고 있는 특질들을 이해받고 남성 또한 남성이 가지고 있는 특질이 이해받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만 현시대에 여성이 남성보다 기본적인 인권이 낮으므로 여성의 인권에 더욱 주목할 뿐이다.

 나는 극단적 여초 사회에서 살았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여자가 남자보다 7대 3 비율로 많았다. 여성의 인권이 자주 이야기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많은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했다. 내가 겪은 것도 있었고, 내가 겪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여성으로서 겪는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엔 한목소리를 냈지만 그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단지 정의롭지 못한 것에 분노한 것일 뿐,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누군가가 자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얘기하는 경우는 개인적으로 많이 보지 못했다. 여성 인권에 대해 많은 쓴소리를 낸 사람의 경우에도 그랬다. 그들은 그저 페미니스트보다 그냥 ‘불편한 것을 이야기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들 중에 나도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나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나의 인권에 조금 더 관심이 많고, 나에게 관심이 많으니 여성 인권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줄 알았다. 나를 둘러싼 외모에 대한 평가, 성적인 농담, 그리고 예민하고 날카로운 편인 내 어투에 대한 이야기가 불쾌할 뿐만 아니라 바뀌어야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과 크나큰 연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페미니스트라는 것이 확실 한 것인가?

과연 이 생각이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을까?

 그러나 그것이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자각하지 못한 모든 이유는 아니었다. 사실 나는 내가 페미니즘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여초 사회라고 해도 자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인정해버리면 그 사람에 씌워지는 굴레가 있다는 것을 눈치껏 깨달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라고 낙인이 (낙인이라는 어감이 그다지 긍정적으로 들리지는 않지만 내가 본 페미니스트들의 등에는 ‘페미’라는 낙인이 찍혀있는 듯했다.) 찍혀버린 사람이, 어떤 부조리를 이야기해도 바로 그것이 깔때기처럼 페미니스트로 귀결되는 현장을 자주 목격했다. 인터넷에서도 ‘페미’라는 단어는 누군가를 겨냥한 욕이 되고, 그 욕을 뒤집어쓴 사람은 행여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나보다 더 확실한 자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비슷한 이유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부정하곤 했다는 이야기를 최근 들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나를 ‘페미’로 호명하는 것을 달가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페미니스트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을 조롱하는 많은 사람들을 모두 설득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지는 않았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그래서 침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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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조금은 써보았지만 대한민국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많은 오해가 팽배하고 있다.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한 학문이라는 점, 남성들을 배제하는 학문이라는 점, 여성우월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라는 점이 대표적인 오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의 필독서라고 불리는 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소설은 페미니즘이 갈 길을 알려주는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다. 이갈리아는 현실과 반대로 여성이 남성을 억압하는 구조다. 가부장보다 가모장이 일반적인 사회로, 현실의 남녀 포지션을 그대로 바꾸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곳에서 여성은 행복하지 않다. 서서히 양성 모두 무너져간다. 남성도, 여성도 일방적인 관계에서는 조금씩 망가져 간다. 페미니즘은 남성의 지위를 모두 깎아내린 채 그 자리에 여성이 올라가겠다는 외침이 아니다. 그 끝은 모두 파멸이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는 알고 있다.

 <해리 포터>시리즈의 주인공이었던 엠마 왓슨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페미니스트다. 그녀는 UN 연설에서 페미니즘의 의미를 적확하게 표현했다.

For the record, feminism, by definition, is the belief that men and women should have equal rights and opportunities. It is the theory of the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equality of the sexes. I started questioning gender-based assumptions a long time ago.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인 성의 평등에 관한 이론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성에 관한 고정관념에 의문을 품어 왔습니다.

When I was 8, I was confused about being called ‘bossy’ because I wanted to direct the plays that we would put on for our parents. But the boys were not. When at 14, I started to be sexualized by certain elements of the media, when at 15, my girlfriends started dropping out of their beloved sports teams, because they didn’t want to appear ‘muscle-y,’ when at 18, my male friends were unable to express their feelings, I decided that I was a feminist. And this seems uncomplicated to me. But my recent research has shown me that feminism has become an unpopular word.

제가 여덟살 때, 저는 부모님들을 위한 연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연극을 제가 주도하길 원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두머리 행세를 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남자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죠, 제가 열 네살 때, 저는 미디어의 특정 요소에 의해 성적 매력만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열 다섯 살이 됐을 때 저의 친구들 중 여자 아이들은 좋아하는 스포츠 팀을 그만두기 시작했습니다. 근육이 있는 몸을 갖지 않고 싶어해서였죠. 열 여덟살 때, 저의 친구들 중 남자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를 힘들어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저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최근 연구한 바에 따르면,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Women are choosing not to identify as feminists. Apparently, I am among the ranks of women whose expressions are seen as too strong, ‘too aggressive,’ isolating and anti-men, unattractive, even. Why has the word become such an uncomfortable one?

여성들은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저는 표현이 너무 강하고, ‘너무 공격적이며,’ 고립적이고 반남성적이고, 매력적이지 않은 표현을 하는 여성 순위에 들어 있을 것입니다. 왜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그렇게 불편한 것이 되었을까요?

I am from Britain and I think it is right that I am paid the same as my male counterparts. I think it is right that I should be able to make decisions about my own body, I think [applause break] … I think it is right that women be involved on my behalf in the policies and the decisions that affect my life. I think it is right that socially, I am afforded the same respect as men.

 

저는 영국에서 태어났고, 저는 남성들과 똑같이 대우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스로에 대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박수] 저는 여성들이 저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과 정책에 대해 저를 대신하여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회적으로, 제가 남성과 동등한 것을 제공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They may not know it, but they are the inadvertent feminists who are changing the world today. We need more of those and if you still hate the word, it is not the word that is important. It’s the idea and the ambition behind it. Because not all women have received the same rights that I have. In fact, statistically, very few have been.

그들은 알지 못했을 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오늘날 세상을 바꾸고 있는 의도치 않은 페미니스트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더 필요하고, 여러분이 여전히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면, 그 단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단어 뒤에 있는 생각과 열정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제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죠. 사실, 통계적으로는, 이런 권리를 누리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We don’t want to talk about men being imprisoned by gender stereotypes but I can see that they are. When they are free, things will change for women as a natural consequence. If men don’t have to be aggressive, women won’t be compelled to be submissive. If men don’t need to control, women won’t have to be controlled.

우리는 남성들이 성적 고정관념에 속박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원치 않지만, 우리는 그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자유로워질 때, 여성을 위한 것들도 자연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만일 남성이 공격적이 될 필요가 없다면, 여성들 또한 그것에 압도될 이유가 없겠죠. 만일 남성들이 여성들을 속박할 필요가 없다면, 여성들이 속박당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편집 및 교정 / 이점

글 / 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