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진, 오슈비엥침, 트레블린카. 이름조차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테레진(Terezín)은 프라하와 드레스덴의 중간쯤에 있는 체코 공화국의 작은 도시, 오슈비엥침(Oświęcim)은 폴란드 남부의 한적한 시골 도시다. 트레블린카(Treblinka)는 바르샤바 북동쪽에 위치한 자그만 도시. 이 세 도시는 한적한 유럽 시골 도시라는 것 이외에 공통점을 하나 더 갖고 있다. 바로 세계 2차 대전 당시 강제수용소가 위치하던 도시라는 점이다.11. 아우슈비츠

다들 아는 이야기겠지만, 독일은 세계 1차 대전에서 패한 이후 어마어마한 양의 빚을 떠안게 됐다.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과 갚아야 할 빚이 합쳐져 사회 분위기는 침체됐고, 자연스럽게 독일 국민의 분노는 커졌을 것이다. 차오르는 분노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변환시키고 국민을 단결시키기 위해 나치 정권이 택한 해답은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대상으로 지목돼 가장 큰 고통을 겪은 민족은 유대인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나치 정권은 독일의 영향 아래 있던 모든 영토에서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직장에서 해고하고, 끝내는 강제수용소에 모아 놓고 강제 노동을 시키거나 생체 실험을 하고, 영양실조로 죽게 내버려두거나 직접 죽였다.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약 900만 명의 유대인 중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이 중 100만 명은 어린아이였다). 이뿐만 아니라, 폴란드, 체코, 러시아 등 독일 근방의 슬라브 민족, 집시, 정치범, 전쟁 포로 등 홀로코스트 기간에 살해당한 이의 수는 1,700만 명에 육박한다1)학자마다 계산이 다르다. 1,100만 명이라는 학자부터 2,000만 명을 넘긴다고 주장 학자까지 다양하다. 어찌 되었건 어마어마한 수임에는 틀림없다.

이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난 강제수용소, 그중에서도 최고 규모의 강제수용소가 있던 곳이 폴란드의 오슈비엥침, 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Auschwitz)다.

아침 일찍2)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단체 가이드투어만 입장 가능. 오전 8시부터 10시, 오후 3시부터 폐관시간까지는 무료입장이다 오슈비엥침행 버스에 올랐다. 안전벨트도 없는 미니버스였다. 어떤 차에 타도 무조건 안전벨트부터 하는 습관을 가진 터라, 밀려드는 긴장에 차가 출발하고도 한참을 손잡이를 꽉 붙잡고 있었다. 긴장을 풀려고 옆자리에 앉은 히로키씨와 대화를 시작했다. 히로키씨는 영국에서 수학중인 교토 분으로, 같은 도미토리에 묵는다. 어제 호스텔에서 만나 대화 중 서로 일정을 맞춰보다 둘 다 아우슈비츠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이왕 갈 거면 같이 가기로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오슈비엥침. 히로키씨는 일본어 가이드투어를 예약해 놨다고 한다. 박물관 앞에서 이따 보자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오슈비엥침에는 수용소가 두 개 있었다. 상대적으로 작은(작다 해도 28개 동 규모다) 제1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제 2수용소 브졔진카(Brzezinka)3)독일어로는 비르케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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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마흐트 프라이.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4)왜 연대 슬로건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가 생각나는지라는 뜻이다. 끔찍하지 않은가?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하고, 주거 환경도 개판인 곳에 강제로 끌려와 노예만도 못하게 일하다, 영양실조와 독가스로 죽게 되는 사람들에게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고 주입하다니. 심지어 저 표어도 한 유대인 수용자에게 직접 만들게 시킨 것이라고 한다.

그는 항의의 뜻으로 ARBEIT의 B를 거꾸로 달았다. 다른 B와 달리 위가 뚱뚱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항거였으리라 생각한다. 반대로 뒤집힌 글자에서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 개나 줘 버려. 다 가짜야. 현실은 그 반대라고!’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언뜻 보면 수용소는 주택 단지 같았다. 벽돌 건물이 세 줄로 예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꽤 큰 평수의 빌라 단지처럼 보였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다.

머리카락이 전시되어있는 모습.

머리카락이 전시되어있는 모습.

수용소 내부는 충격이었다. 위 사진은 나치가 보관하고 있던 여성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이다.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이 머리카락으로 꽉 차 있다. 너무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감각이 무뎌진다.

수용자들이 들고 온 짐가방, 수용소에서 직접 사용된 독가스 통, 영양실조로 죽은 이들을 적어 관리하던 명부, 수용소에서 아사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구출된 여성들의 사진, 수용소에 끌려온 어린아이들의 옷가지까지. 하나하나 전부 충격이었다. 어린아이들의 옷을 보았을 때는 숨이 턱 막혔다. 옷가지 위에는 어린아이들의 사진과 나이,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날짜와 죽은 날짜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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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아이들과 그 소지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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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에서 구출된 아사직전의 여성들

이들이 뭘 그리 잘못했는가. 아니 설령 잘못한 일이 있다더라도 이것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인가. 막막했다.

당시 나치 정부는 ‘폴란드인, 러시아인, 집시, 유대인으로부터 게르만을 구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홀로코스트를 정당화했다고 한다. 구해내야 한다. 사회를 어지럽히는 저 더러운 집시, 악착같은 유대인, 열등한 슬라브민족으로부터 우수한 게르만을 구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구역질이 올라온다.

특정 민족이 사회를 어지럽힌다며 민족 혹은 인종이라는 큰 틀 아래 묶인 모든 사람을 싸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결국엔 죽인다.

ISIS의 테러로 이슬람과 무슬림 전체에 쏟아지는 비난, ‘동남아 외노자’로 통칭되며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제대로 살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사회를 어지럽힌다며 닥치고 일이나 열심히 일해서 경제대국을 만들자는 이들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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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 역사는 되풀이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쓱 보고 지나치는 이 현판 앞에 혼자 한참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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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졔진카 입구

브졔진카는 53만 평의 대지에 300동이 넘는 건물이 세워진 대규모 수용소다. 서울시청 앞 광장이 4천 평에 조금 못 미치는 규모임을 생각하면 53만 평은… 상상도 하기 힘든 규모다. 대지가 넓은 만큼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해, 더 많이 살해한 곳이다. 이곳의 건물 대부분은 부서졌고, 그 부서진 잔해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 놨다.

아직 남아있는 가스실의 잔해

아직 보존해놓은 가스실의 잔해

이곳은 가스실이 있던 곳이다. 나치는 좁은 가스실에 몇 백 명을 몰아넣고 효과가 빠른 강한 약을 풀어 수용자들을 한 번에 죽인 다음 건물 위층의 화장장에서 화장했다. 거기서 나온 재는 근처의 호수에 버리거나 구덩이를 파서 버렸다. 나중에는 화장시설의 처리 속도가 죽은 이의 수를 따라잡지 못해 그냥 들판에 수십 구의 시체를 쌓아 놓고 태워버렸다고 한다. 밑의 사진이 그 들판, 사진 좌측에 있는 흑백사진이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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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태우던 들판 그리고 그 장면을 담은 흑백사진

제대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이 끔찍한 장면을 보존해 놓은 이유는 단 하나. 사람들이 역사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할 수 있게, 잘못된 지도층이 국가를 이끈 결과가 무엇인지, 전쟁이 불러온 참혹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시체 태워서 그 재를 버리던 연못

시체 태워서 그 재를 버리던 연못

아르바이트 마흐트 프라이. 다시 한 번 뱉어 본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유는 그렇게 아무 데나 막 갖다 붙이는 단어도, 느끼라고 강요한다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 테레진

테레진. 위에 언급한 아우슈비츠에 비하면 인지도는 많이 떨어지는 곳이다. 하지만 체코에서 테레진은 나치 독일군이 통째로 지도상에서 없애버린 도시 리디쩨와 함께, 나치의 만행이 잘 남아있는 대표적 장소로 유명하다.

테레진에는 큰 큐모의 게토도 그대로 남아있다. 또, 도시 한 켠에는 게토의 생활과 그곳에서 꽃 피었던 예술 등을 그대로 전시한 유대인 박물관도 있다. 작은 아우슈비츠 같은 기분에 드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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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 나치에 협력했던 세력을 확실하게 축출했고, 또 독일부터가 국가 차원에서 나치가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단 점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관련자를 확실히 처벌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지구 반대편, 세계 2차대전의 또다른 축을 담당했던 나라와 그 나라에 능욕당했던 나라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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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이 이루어지던 벽

같이 간 미국 아이들은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보고 듣고 느끼며 사라진 생명을 위해 묵상하는 듯했다. 나도 그들과 같은 것을 느끼는 동시에 가슴 한 켠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바로잡을 수는 있나, 아니 나 자신부터 이를 바로잡을 의지가 있나. 

얼마 전 모 도시에 위안부 소녀상을 건립한다는 소식에 ‘뭐 이딴 걸 우리 집 앞에 만드느냐’며 일부 주민이 시위를 벌였다는 뉴스를 접한 적 있다.

테레진에 다녀온 날, 미쯔비시중공업에 징용당해 고통받고 아직까지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분들이 나고야 본사를 직접 찾아갈 예정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아직까지도 위안부 할머님들은 매주 수요일 끔찍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일본 대사관 앞에 선다. 

돌아오는 길, 한 미국 친구가 ‘참 오늘 여러모로 답답하고 힘든 여행이었어. 밤에 술이나 잔뜩 마셔야지’라고 말했다. 그에게 동의의 뜻으로 웃어 보이며 생각했다. 너의 답답함은 과거의 일이니 술로 날려보낼 수 있지만, 내 답답함은 현재진행형이니 술로 해결이 안 될 거라고.

3. 서울

sunset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 역사는 되풀이된다.

4. 뱀발

아우슈비츠에서 크라쿠프로 돌아와 시가지를 걷다 술을 몇 병 사서 방에 들어왔다. 히로키씨는 먼저 돌아와 쉬고 있었다. 일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역사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아우슈비츠에서 히로키씨를 몇 번 마주쳤지만 처음 마주쳤을 때만 인사하고 그 다음부터는 모른 척했다. 감상에 방해될까봐, 라고 포장하려 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나치 독일이 점령국에 행했던 만행의 기록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한국이 겪었던 36년의 세월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히로키씨가 먼저 ‘이안후’ 문제를 일본 정부가 직시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안후? 이안후가 뭐지? 당황한 내게 그는 慰安婦라는 글자를 보여줬다. 위안부. 세 글자가 날아와 박혔다. 뒤이어 군함도, 미쯔비시, 강제징용, 아베, 박 등의 단어가 오갔다.

이야기의 결론은 양국이 역사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였다.

왜 이야기하면 할수록 내가 비참해지는 걸까. 우리가 예전에 잘못을 저질렀다, 일본 정부와 관련 기업들은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왜 답답한 기분이 드는 걸까. 얼마 전 위안부 생존자들에 대한 지원금 삭감을 추진하다 여론의 반발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나와 같은 도시에 있다. 이 사실을 알려주는 지인들에게 ‘싫어서 떠나왔는데,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스토커네 허허’하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중 한 명이 진심이냐 되물었다. 웃으면서 진심 섞인 농담이라고 답하고 뒤돌아서서 진심인가, 되돌아봤다. 과연 그분은 평범한 어린아이인 내가 되돌아보는 것의 절반은 되돌아볼까5)판사님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 역사는 되풀이된다.

 

교정 및 편집/ 저년이

글, 사진/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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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자마다 계산이 다르다. 1,100만 명이라는 학자부터 2,000만 명을 넘긴다고 주장 학자까지 다양하다. 어찌 되었건 어마어마한 수임에는 틀림없다
2.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단체 가이드투어만 입장 가능. 오전 8시부터 10시, 오후 3시부터 폐관시간까지는 무료입장이다
3. 독일어로는 비르케나우
4. 왜 연대 슬로건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가 생각나는지
5. 판사님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