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취업 준비생이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렇고, 사실은 백수다. 대학교도 졸업해버렸으니 진짜 빼도 박도 못할 백수! 백수!! 백수!!! 백수 경력은 7개월 차에 접어들었고 (어느새… 잠시 눈물 좀 닦고…) 취업 준비생이 된 지는 1년이 넘었다 (2차 눈물…). 뭐, 사실 그렇게 슬프지는 않다. 이런 정도의 이야기, 주변에 흔하다.

 

가장 불친절한 탈락, 서류 불합격

나름 차분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작은 취업 준비생을 건드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서류 불합격’. 이 불합격은 순전히 자기소개서만을 보고 정해지는 일이다. 여기서 자기소개서란 ‘소개’를 빙자한 스펙과 경험의 총망라다.

취업 준비생에게 자기소개서는 학교에서 보는 중간고사, 기말고사와 또 다른 차원의 압박과 부담으로 다가온다. 시험엔 답이라도 있지 않은가. 자기소개서에는 답이 없다. 그런데 기껏 제출하고 내가 받는 피드백은 합격과 불합격뿐이다. 합격해도 내가 왜 합격인지, 불합격하면 내가 왜 떨어졌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런 불친절한 시험을 봤나!

내가 좀 겪어봐서 그러는 거… 맞다.

 

자소서는 ‘자소설’이 된다.

자기소개서 잘 쓰기는 취업 준비생의 1순위 덕목이다. 제출 기한이 다가올수록 뒷목은 뻣뻣해진다. 내 인생의 무엇을 선택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심히 고민이 되는 것이다. 선택할거리라도 있으면 다행. 보통은 하얗고 네모난 칸 안에 꿈뻑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명상한다. 쥐어 짜낸다.

나의 모든 뇌세포를 동원하여 머릴 굴리면 어느새 완성된 것은 ‘자기소개서’가 아닌 ‘자기소개소설’. 즉 ‘자소설’이다. 자기소개서를 쓰는데 창작의 고통이 수반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 참, 우리는 자기소개서도 ‘창작’한다.

내 인생사는 거들뿐….

슬픈 건 그런 자소설 쓰기를 거듭하다보면 나조차 진짜 나를 잊는다는 거다. 그 안에 적히지 않은 내 모습은 안개에 뒤덮여가는 느낌? 내가 진짜 무엇을 좋아서 했고 어디에서 보람을 느꼈는지, 잊는다. 때로는 부정한다. 그렇게 적힌 자소설에 이제 염증이 난다.

안개에 가려진 자소설 밖의 내가 사라지기 전에, 나라도 나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위대한’ 자소설 집필을 위해 감춰둔 나의 ‘소소한’ 이야기를 좀 털어놔보려 한다. 이런 것도 ‘스펙’ 시켜주면 안되나요?

 

1. 초등학교, 48개의 상장

문제의 파일..! ‘상장이 끼어있는 파일’이라고 써있다. 메타몽(;;) 속에…

나에게는 초등학교 시절 받은 상장을 모아둔 파일이 있다. 오늘 꺼내 세어보니 총 48장. 1/6해보니 매년 8개씩은 상을 받았던 거다. 그 중에서도 ‘착한어린이상’ 같은 걸 학년마다 받은 걸 보니 선생님 말 잘 듣는 애였던 게 분명하다. 언제나 교실에 그림 같이 (정적으로) 앉아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는 칭찬인지 모를 칭찬 들었던 기억도 나고… 존재감 없다는 말을 돌려 해주신 걸까.

상은 주로 글쓰기, 그리기, 동요 부르기 대회에서 적립했더라. 지금 보면 놀라운 게 ‘수학경시대회 은상’, ‘우수과학어린이상’ 같은 것들을 받았다는 거다. 나는 완벽한 문과인데! 수학에 트라우마 있는데! 초등학교 때 똑똑하지 않았던 사람 없다더니. 초등학교 졸업 이후 중고등학교 때 받은 상은 합쳐봤자 열 손가락 전혀 모자라지 않다는 게 함정.

 

2. 중학교, 영국 사투리

여기 주인공들 말투랑 좀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영드 My Mad Fat Diary. 참고로 이거 명드임. 꼭 보셈)

중학교 때는 2년을 영국에 있었다. 그래서 연마한 건 영어…보다도 영국 지방 사투리? 해리포터 원서로 독해를 늘리고 학교에서 수업 듣고 친구 만나며 듣기와 말하기를 연마했다. 당시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6개월, 1년의 법칙’ 같은 게 있었는데- 6개월이면 귀가 뚫리고 1년이면 입이 뚫린다는 거였다. 2년 있었으니, 충분히 둘 다 뚫린 거다. 근데 문제(?)는 말이 사투리로 나왔다는 거.

영국 영어, 게다가 지방 사투리 쓰는 동양 여자애.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 매력 있기도 하다. 근데 그 때는 그게 좀 싫었는지, TV 보면서 표준어 연습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뒤엔 남다른 억양이 부끄러워 미국 영어 따라하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다는 슬픈 사연이…

 

3. 고등학교, 광우병보균의심자

제가 광우병보균의심자요?

고등학교 땐 1년에 한 번씩 학교에 헌혈차가 왔었다. 학생들은 자습 중에 자발적으로 나가서 헌혈을 하고 올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만으로 열여섯, 현혈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된 나는 친구와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피를 뽑는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평소에 워낙 건강했고 무서운 것도 몰랐기에 벅찬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검사를 마치고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마지막 질문지를 작성하는데…

간호사언니: 영국에 있었어요?

으스으: 네.

간호사언니: 얼마나요?

으스으: 2년이요.

간호사언니: … 소고기 먹었어요?

으스으: 네. (당연한 말씀을…)

그리고 ‘쾅’. 나는 헌혈 ‘영구금지’ 딱지를 받았다. 간호사언니는 나의 정보를 컴퓨터 화면에 입력하고 ‘영구금지’로 분류했다. 헌혈, 조심해야하는 건 당연한 거다. 하지만 이 일은 열일곱 내 마음에 스크래치가 되어 남았다. 큽. 나, 광우병…? (그리고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내 마음 속 쿠크다스를 더욱 뽀갰다. 아주 그냥 뽀샥뽀샥.)

 

4. 대학교, 23개 국적의 친구들

그 옛날의 인기 예능. 보고싶다, 친구야! (KBS2 야!한밤에)

나는 대학교를 다니며 일 벌이기를 좋아했다. 여기 저기 관심 가는 동아리, 단체에서 활동하길 좋아했는데 학교로 온 교환학생을 돕는 버디 활동은 그 중 하나였다. 그래서 만났던 건 정말 다양한 국적을 가진 친구들! 그 때 부터였나요, 제가 페이스북을 시작한 게. 2009년 말이었으니까 한국에서 유행을 시작한 시기보다는 좀 빨랐다. 그리고 2011년 교환학생을 떠나며 페이스북 친구 목록엔 더욱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이 쌓이기 시작했는데…

일본중국프랑스영국독일네덜란드스페인싱가폴대만벨기에미국이탈리아멕시코브라질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인도이라크아일랜드덴마크터키핀란드 친구들아 잘 있니! 보고 싶다! 놀러갈게! 돈 벌어서 갈게! 꼭! ㅠㅠ

 

5. 살아오면서, 1만 시간의 드라마

드라마 없이 나도 없지. 화면 붙잡고 우는 일 쯤이야, 흔하다구!

나는 많은 것의 덕후다. 덕후의 피가 타고 나는 거라면 나는 100% 순혈 덕후의 피를 타고 났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그냥 성골 덕후!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많은 시간, 끊임없이 좋아해온 게 뭔가 따져보니 드라마더라. 다른 것들도 그렇지만 유독 드라마 보는 일은 일생에 쓸모없는 일로 치부되곤 한다. 시간 아깝다나 뭐라나. TV는 바보상자야 어쩌고저쩌고.

근데 나는 ‘쓸모’는 없을지도 모르는 이 일이 좋다. 좋은 이유를 설명하자면 새로운 지면을 하나 파야할 수준. 얼마 전부터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화제다. 1만 시간의 노력이 한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만든다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드라마 전문가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가 자랑스럽다. 하지만 이것도 자기소개서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이야기.

 

오늘도 나는 쓴다.

이렇게 쭉 적고 나니 속풀이가 좀 되는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글을 완고하고 나면 또 써야할 것이다. 나를 감추는 자기소개서. 거기엔 내가 드라마 덕후이며 몇 십 년 안에 광우병이 발병할지도 모르는, 23개 국적의 외국인 친구들을 가졌으며 영국 사투리를 구사할 줄 아는, 게다가 초딩 때 받은 상장이 48개에 육박한다는 정보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살면서 가장 열정적으로 임한 일이 무엇이고 태어나 가장 큰 위기를 언제 겪었으며 그 모든 일이 있었을 때의 감정은 어땠고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대하여 ‘있어 보이는’ 열변을 토하겠지. 입사 후 포부를 적는 란을 통해 당신의 회사에 얼마나 잘 복종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증명을 해야 할 것이다.

아, 상상만으로도 또 뒷목이 땡겨 오지만- 어쩌겠는가. 빨리 돈 벌고 싶은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자기소개서 쓴다. 아니, 창작한다. 자기소개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