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이 밝긴 밝았는데

5시 즈음 눈을 떴다. 밖은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전날 족탕과 잎새주 덕분인지 꿀잠을 잤다. 새벽 중간 중간 ‘이’가 잠자다 자꾸 랩을 해대 가끔 깬 것만 빼면 좋은 잠이었다. 일어나 빠르게 세수하고 머리도 감았다. 과일과 가방도 다시 꾸렸다. 사실 이렇게 늦게 일어나 미적거려선 안됐었다. 버스 시간표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저 서울 버스나 생각하며, 뭐 새벽 6시 이후면 적어도 30분 단위론 다니겠지, 안일하게 굴었던 것이 실수였다. 후에 벌어질 일도 모른 채 즐겁게 짐을 꾸려 밖으로 나왔다. 새벽 6시 반 쯤 모텔을 나오며 카운터에 일하시는 분께 ‘성삼재 가는 버스 어디서 타요?’라고 물었더니, ‘6시 차는 이미 떠났고 다음 차가 8시 넘어서 있어요.’

넹??

넹?? 뭐라구여??

부랴부랴 구례공용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 시간 확인을 해봤더니 아래와 같았다.

출처. 구례군청

출처. 구례군청

아 이 노답들… 왜 이걸 대체 알아볼 생각도 않은 거지? 진짜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 와중에 어제 먹은 족탕이 어찌나 소화가 잘 되던지 전부 화장실을 다녀왔다. 8시 40분 버스를 탔다간 예약했던 대피소 구경도 못하고 강제 하산 당할 것 같아 택시를 탔다. 무려 3만 5천원이나 주고1)구례 터미널에서 성삼재까지, 택시비는 픽스돼 있다. 기사님께 여쭤보니 읍에서 정해준 거라고.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전, 1천 2백원의 입장료도 냈다. 그렇게 성삼재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렸는데, 재난영화 보는 줄 알았다. 비는 미친듯이 내리고 바람도 태풍처럼 불고 앞은 온통 안개 때문에 가시거리가 굉장히 좁았다. 아 진짜 인생.. 급하게 성삼재 대피소에 들어가 비옷을 입고 가방에 방수팩을 씌웠다. 옆에 한 아재들이 전에 막걸리를 먹고 있는데, 아 진짜 냄새.. 그냥 지리산이고 뭐고 앉아 같이 전이랑 막걸리나 먹다 집에 가고 싶었다. 아님 족탕 먹고 가든가.

그래도 어째저째 심기일전하며 서로를 다독이고 비옷, 그리고 주머니엔 트윅스와 양갱을 가득 채워 무장했다. 그리고 씩씩하게 올라갔다. 올라갔다.. 올라가는데.. 올라가고 있는데..! 내려오던 한 등산객들이

‘지금 입산이 통제됐다. 우리도 올라가다 제지 당해 내려가는 중이다.’

...

위기다ㅠ..ㅠ 정말 안 될 인생은 안 될 인생인가보다. 그럼 그렇지, 우리 같은 노답 인생들이 뭘 한다고. 하지만 그 순간 한 20% 정도는 나도 모르게 기뻤던 것도 사실이다. 족탕을 먹을까 전에 막걸리를 마실까..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근처를 서성이다, 확실한 정보를 듣고 확인사살이라도 당해야 겠다, 싶어 직접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 번호2)(061)780-7700로 전화를 걸었다.

“입산 통제가 됐었으나 현재 날씨가 좋아지고 있어 통제가 풀렸으니 등산하셔도 괜찮습니다.”

성삼재 주차장~노고단 대피소

nogodan

우리는 노고단 대피소까지

그렇게 지리산 종주를 시작했다. 처음에 길은 마치 잘 포장된 산책로와 같은 느낌이었다. 흔히 낮은 난이도의 산책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멘트에 모래가 콕콕 박혀있는 포장 도로. 가는 길에 가끔 “반달곰을 만나면 … 이렇게 하세요!”라는 팻말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찾아랏!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찾아랏! 출처. 지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

반달곰을 실제로 만나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며 굳어버리지 않을까.

그것으로 나를 찌를 건가

그것으로 나를 찌를 건가

야생초에 대한 소개가 담긴 팻말도 곳곳에 있었다. 그때만 해도 지리산의 길 수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다. 어쨌든 그 정도 길을 걸으면서, 아~ 이 정도면 뭐, 하루에 몇 시간씩 쉽게 걷겠네 싶었다. 슬슬 나무 계단이 나오는데 갑자기 경사가 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혼자만의 싸움이 시작됐다. 처음엔 실없는 이야기들로 서로 고통을 잠시나마 잊어보나 싶었지만, 점점 내뱉는 말들이 오히려 호흡을 가쁘게 해 입을 하나둘씩 닫기 시작했다. 꼴에 체력이 쓰레기인 걸 티내긴 싫어 혼자 훅훅 거리며 앞만 보고 걸었다.

이 코스는 그닥 힘든 코스가 아니라는데. 준비 운동을 제대로 안 한 탓인지, 이만큼인지 예상을 못해서였던 건지, 진짜 체력이 그지인 건지, 아님 종주가 처음이라 그런 건지, 이것도 아니면 첫 코스다보니 내리막 없이 거의 오르막이라 그런 건지 점점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18 못하겠어 까진 아니지만 내가 이걸 왜 하자 그랬지 점점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내려가자고 할까, 내려가서 족탕이나 먹자 할까. 족탕 때문에 노답 인생을 스스로 더 개노답으로 만들까봐 일단은 걷기만 했다. 점점 숨이 가빠오고 계단을 많이 올랐을 때 허벅이에 느껴지는 묵직한 알배김이 느껴졌다. 중간중간 ‘노고단 n km’ 팻말이 보이는데 아무리 걸어도 줄지를 않는다. 분명 500m 쯤 걸은 것 같은데 막상 팻말을 보면 고작 200m 정도 왔다. 직선거린가.. 왜 지리산에서 먹는 밥이 꿀밥인지 밥을 먹기도 전에 알 것만 같았다. 게살볶음밥을 먹을지 짜파게티를 먹을지 고민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오르막길만 걸은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노고단에 도착했다.

노고단 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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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본 적도 없던 노고단 팻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노고단 대피소의 취사대는 생각보다 좁았다. 어차피 여기서 쉬었다 갈 건 아니니, 내부 휴식 및 취침 시설은 어떠한지 알 수가 없었다. 입구 오른쪽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통이 있었고 내부는 마치 고등학교 시절 수돗가나 급식실의 조리실처럼 은색 철제로 테이블(?)이 마련돼 있었다. 수도꼭지에 나오는 물은 식수이며 음식을 하거나 마시기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양치질을 한다거나  설거지를 해서는 안된다는 말.

우선 우리가 미리 샀던 재료들 중 게살 필라프와 삼겹살이 상하기 가장 쉬운 음식이었다. 그래서 첫날 첫끼 아침으로 게살 필라프부터 먹기로 식단을 짰다. 코펠을 꺼내 기름을 두르고 게살 필라프를 볶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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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위기다. 난리도 난리도 바닥이 눌어붙고 타고 난리였다. 하지만 우린 팬을 챙겨가진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코펠에 최대한 눌러 붙지 않게 볶았다. 왠지 딱 하나 가져온 코펠이 곧 수명을 다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 1차 조리가 돼 있는 필라프다 보니 데우는 정도에 만족하며 고추 참치와 함께 먹었다. 고추 참치 존맛.. 사실 나는 야채 참치도 좋아한다. 야채 참치는 동원 미만 잡. 사실 코스트코 필라프는 게살보단 낙지 필라프가 정말 맛있다. 그렇지만 가격 차이로..ㅠ 하지만 산을 타고 먹는 밥은 게살이든 낙지든 뭐든 맛있다. 먹다가 너무 맛있어서 두 번째 필라프를 볶을 땐 코펠 상태는 생각하지도 않고 아예 필라프에 고추 참치를 한 데 볶아 먹었다. 좀 짜긴 했지만 진짜 맛있었다. 그렇게 쳐먹쳐먹 하고선 키친타올과 물티슈를 이용해 코펠과 수저를 닦아냈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든든한 배와 함께 다시 등산화를 고쳐 묶었다.

다음은 노고단에서 연하천 대피소까지의 코스다.

 

글 / 커밋

검수 및 사진 제공 / 노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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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례 터미널에서 성삼재까지, 택시비는 픽스돼 있다. 기사님께 여쭤보니 읍에서 정해준 거라고
2. (061)780-7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