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벌써 자라 올해로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채 걷지도 못하던 신생아가 혼자 학교를 다니는 학생으로 자랄 만큼 긴 시간 동안, 자신의 잃어버린 권리를 위해 투쟁해온 사람들이 있다. 콜트콜텍 기타 공장에서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동안 근무하던 123명의 노동자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5월 9일 ‘콜트콜텍기타노동자 친구들 3000+ 페스티벌’ 전범선과 친구들 공연 (사진/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사 제공)

2007년 4월 9일은 월요일이었다. 대전 콜텍기타 공장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은, 주말이 지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 그러나 사무실 직원은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고 공장 문은 이유 없이 닫혀 있었다. 회사 측에서 일방적으로 공장 폐쇄를 명령한 것이다. 같은 달 12일에 회사는 계룡시에 있던 콜트악기 공장도 위장폐업하고 그 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도 방출당했다. 2008년에는 인천에 있던 콜트악기 공장마저 없어졌다.

콜트콜텍은 왜 그들을 해고했나

콜트콜텍은 전성기 때는 전세계 판매량 2위 팬더 기타의 하청 회사였고, 회장인 박영호 씨는 한국 재벌 순위 200위 안에 드는 거부였다. 콜트콜텍 본사 측은 그들을 해고하며 경영 상의 급박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이 지정한 회계사의 보고는 달랐다. 콜트콜텍 사에 그런 위기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콜트콜텍은 순이익만 90억 원이 넘을 정도로 경영 상태가 안정적이었다.

그들이 노동자들을 해고한 진짜 이유는 인건비 절감 때문이었다. 국내 노동자들을 해고한 뒤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낮은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공장을 설립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국내의 공장 문이 닫힌 후에, 콜트콜텍은 수라바야(인도네시아), 대련(중국)에 공장을 세우고 연간 백 만 대의 기타를 납품했다. 경영 상의 어려움이라는 말이 변명처럼 들리는 이유다.

노동자들은 해고 이후 자신의 노동권을 보장 받기 위해 기나긴 투쟁을 시작했다. 2007년 11월 콜트콜텍노조 사무장인 이동호 씨는 해고 철회를 외치며 분신 자살을 기도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의 손과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았다. 다음 해인 2008년에는 이인근 콜텍 노조 지회장이 15만4천 볼트의 고압 전류가 흐르는 40여 미터 높이의 송전탑에서 목숨을 걸고 고공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강서구 등촌동에 있는 콜텍 본사를 점거해 농성을 벌이기도 했고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으며 타격 투쟁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다른 노동자들도 계속해서 해고됐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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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점입가경…)

그렇게 그들은 ‘콜밴’이 되었다.

과격했던 시위가 전환점을 맞은 시기는 2008년이었다. 노동자들은 문화연대와 손을 잡았다. 일렉기타를 주로 생산하던 공장에서 일했지만 노동자들은 변변한 악기 하나 제대로 다룰 줄도 몰랐다. 이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서 평생을 바쳐 만들었던 기타를 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문화연대와 인디밴드들의 도움을 받아 ‘콜트콜텍 밴드’(이하 ‘콜밴’)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악기를 만드는 노동자에서 노동의 권위를 수호하려는 음악인으로 변신한 ‘콜밴’ 멤버들은 권력을 가진 회사 측의 눈치를 보는 법원을 비꼬는 노래 ‘서초동 점집’ 등의 노래를 만들며 자신들이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였다. 전국 투어를 꾸준하게 진행하고,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는 정기적으로 공연을 열었다.

내가 콜밴 공연을 처음으로 보게 된 곳은 지난 5월 9일, ‘콜트콜텍기타노동자 친구들 3000+ 페스티벌’이 열린 종로 보신각에서였다. 콜트콜텍 기타에 그림을 그려주고, 사진을 찍어주는 그 곳은 노동의 현장이라기보다 그들이 이야기한대로 ‘페스티벌’에 가까웠다. 공연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도 시종일관 경쾌했다. 겉으로 보기엔 무엇인가 축하하는 자리라고도 착각할 수 있을 만큼 흔히 생각하는 투쟁의 공간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발랄한 그 느낌은 ‘콜트콜텍 수요문화제’가 열리는 홍대의 라이브클럽 ‘빵’에서도 느껴졌다. 초청된 인디밴드들은 여느 공연과 다름없이 노래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콜트콜텍 밴드만 아니었다면 일반적으로 하는 음악 공연과 다를 바 없어보였다. 공연을 듣는 사람도, 하는 사람의 표정도 편안했다. 5월부터 계속 공연을 관람하던 나는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그들의 얼굴은 오랜 투쟁에도 밝은 것인가.

클럽 빵 대표 김영등 씨는 전화 인터뷰에서 “문화연대의 요청에 따라 처음 대관을 시작했다”라며 “아직까지 해결이 되지 않을 줄은 몰랐다”라고 운을 뗐다. 그는  “이 문제는 분명 사회적 문제이다. 이미 수면 위로 떠오른 문제를 사회,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게 그 이유”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콜트콜텍 투쟁을 하는 모든 것들은 특별하다”라고 말을 맺었다.

‘모든 것이 특별하다’라는 김 대표의 말에서 나의 의문은 풀렸다. 그들은 지난한 투쟁의 하루하루를 ‘특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9월 23일 새누리당 청사 앞에서 진행된 콜트콜텍 수요문화제 (사진/콜트콜텍공동행동 제공)

9월 23일 새누리당 청사 앞에서 진행된 콜트콜텍 수요문화제 (사진/콜트콜텍공동행동 제공)

그런 특별함이 바로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처럼 보였다. 2012년 대법원에서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해고가 부당하다고 판결한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길 위에 서있지만, 그들의 운동이 아직까지 진행되는 힘은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들은 특별했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말들은 특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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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및 글/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