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프의 꽃들과 벌거벗은 임금님

조지아 오키프를 아시는지. 그녀는 1887 태어난 미국의 화가이다. 주로 자연물을 독특한 방식으로 화폭에 담아낸 작품들을 남겼다. 특히 그녀에게 유명세를 가져다 준 것은 그녀의 무수한 꽃 그림들이었다. 거대하게 확대되거나, 색이 재해석 되거나, 특정 부분만 포착된 꽃들. 그들은 기이한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았다. 동시에 화가인 오키프에게 떨떠름한 고민거리를 안겼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입에 담기 어려운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꽃들은 여성의 성기를 모티브로 한 것입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오키프의 작품에 호의적이었던 비평가들에게 이 의문은 아무렴 난제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

화가였던 오키프 자신은 어땠을까. 그녀 역시 자신의 작품에서 성적인 뉘앙스를 찾으려는 시도에 꽤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내 꽃들을 이해했다면, 그것은 꽃에 대해 당신들이 느끼는 연상을 내 꽃들에 반영한 것입니다.’ 꽃에 대해 뭐라 생각하든 그것은 그 자신의 마음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오키프의 이러한 일침은 제법 효과적이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도 그녀의 그림에 관한 해석에는 그녀 자신의 그 같은 변이 늘 따라 붙는다. 다만 오키프의 일침의 이면에는 한 재미있는 일화가 숨어있다. 그림이 걸린 회랑에서 거침없이 “VULVA!” 라고 말을 외친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소녀는 <기저귀부터 데이트까지(From Diapers to Dating)> 의 저자 데브라 해프너의 생후 18개월 된 딸이었다. 우리 나이로 겨우 1살 반. 음문/외음을 뜻하는 vulva라는 단어의 파괴력을 미처 다 깨닫지 못할 나이이다. 그러니 그녀는 외칠 수 있었을 것이다. 오키프의 대표작 중 하나가 걸린 조용한 갤러리 안에서, 그림을 향해 당당히 손가락을 내밀며, “엄마, 저거 “보지”에요!” vulva는 엄밀히 말해 “보지”로 번역되지 않는 용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화랑 안에 울려 퍼진 외침의 파급을 전하기엔 그만한 단어가 없을 것이다.

궁금하다.

그날 갤러리 안에서 소녀의 외침을 들었을 사람들의 표정이. 20세기의 일이니 아마 누군가는 꽤 떨떠름한 표정을, 누군가는 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자신의 그림에서 성적인 요소가 읽히는 것을 달갑지 않아했던 오키프가 소녀의 외침을 직접 들었더라면 뭐라고 대꾸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소녀의 모친인 데브라 해프너만큼은 18개월 된 딸의 외침을 예사롭지 않게 넘겼던 것이 분명하다. 그 날 갤러리에서의 그 해프닝은 그녀로 하여금 성교육 지침서 <기저귀부터 데이트까지(From Diapers to Dating)>를 쓰게 만들었다. 이후 이 책은 소녀의 일화와 함께 오키프의 꽃 그림에 의미심장한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일조하게 된다. 오키프는 뚜렷한 페미니즘적 행보를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은 결국 여성의 성기를 해석, 수용하는 사회적 태도를 논할 때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소재로 자리매김했다.

“거기”를 떠올리는 음탕한 마음?

오키프 자신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혹자는 오키프의 꽃이 “보지”를 전혀 연상시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두고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들은 벌거숭이를 보고도 나체라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 속 어른들처럼 위선적인 겁쟁이들이라 주장한다. 그들을 겁쟁이로 만드는 것은 아마 앞서 나온 오키프의 냉소적 일침일 것이다. 화가의 말에 따르면 그렇지 않던가. 그녀가 그린 꽃을 보고 여성 음부를 떠올리는 이들은 즉 그들 자신의 마음을 투영해 그림을 보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보지”를 떠올려 버릇 하는 마음이니 꽃에서도 “보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런 음탕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면 음부 얘기는 꺼내지 않는 편이 좋다. 혹시 머릿속에 그런 꺼림칙한 말이 스치더라도 침묵하는 게 답이다.

 다만 이러한 판단에는 좀 묘한 구석이 있다. 여성 “보지”를 떠올리는 것은 아무래도 좀 음탕하고 음란한 데다 꺼림칙한 일이라는 전제가 읽히는 것이다. 더욱이 향기롭고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인 꽃을 보고서 그런 걸 연상하다니. 그건 아침 이슬을 머금고 빛나며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꽃과는 사뭇 다른, 어둠 속의 은밀한 부위 아니던가. 결국 음부에 대한 암묵적인 터부가 전제되고서야, 오키프의 부정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림과 음부를 연결하려는 어떠한 상상도 죄의식으로 귀결시킨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명의 반란자가 등장한다. 앞서 말했던 우리 나이 1살 반의 소녀, “보지”라는 단어에서 죄의식을 발견할 까닭이 없었던 데브라 해프너의 딸이다. 그녀가 음부를 친숙하게 여기며, 마음에서 그것을 떠올린 까닭은 단순하다. 그것이 그녀의 몸이기 때문이다. 깨끗이 씻고, 잘 닦고, 행여 다치거나 망가지지 않게 잘 살펴줘야 하는 그녀의 신체.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함께 해오던 자신의 몸에 죄의식을 느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손을 닮은 것을 보면 손을 떠올리듯, 성기를 닮은 것을 보면 성기를 떠올린다. 그것이 여성 성기라 해서 다를 이유는 없다. 적어도 소녀에게는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남녀 불문 성기는 터부다?

어른과 아이는 무엇이 다를까. 차이는 무수하겠지만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체면에 관한 인식일 것이다. 아이는 사회를 통해 죄의식을 물려받기 전까지, 보다 자유롭게 만물을 바라본다. 어른은 다르다. 체면과 권위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점잖은 척 해야 할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한다. 대부분의 어른에게 갤러리는 전자에 속한다. 그렇다면 꽃 그림을 보고 난데없이 “보지”를 연상하는 것은 과연 점잖은 일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질문을 달리해 자문해보자. 갤러리에 걸려 있는 “보지” 그림은 점잖은 것인가? 그것은 올바르다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반론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본질적으로 따져 볼 때, 군중 앞에서 노골적으로 성기를 드러내는 일은 올바를 수 있는가? 여성의 성기가 아닌 남성의 성기라 해도 마찬가지다. 성기를 전시하고, 성기를 상상하고, 성기를 비평하는 일은 꺼림칙한 짓이다.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짓이자, 남녀 양성을 불문하고 적용될 수 있는 터부다.

그러나 혹여 이 말에 공감한 사람이 있다면 다음 사진을 보시라.

미켈란젤로 다비드상

남성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다비드상이다. 조각가는 무려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 조각가이자 건축가, 화가, 시인이었던 그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예술의 한 축을 담당해 오고 있다. 맥박이 뛰는 것처럼 섬세한 핏줄부터 꿈틀거리는 근육의 묘사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놀랍도록 정교하다. 그러한 작법은 남성의 성기를 표현할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진 속 다비드가 지닌 음모를 보라. 한 올 한 올 조각 되어 있지 않은가. 현대 미술의 물결이 범람하기 전까지, 인류의 미술사 속 무수한 여성 누드 작품에서 쉽게 찾아 보기 힘든 음모 묘사이다. 제법 섬세하게 형상화된 다비드의 성기를 보고 야하다며 눈살을 찌푸릴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예술계의 누드란 본래 그런 것이라는, 당연하고도 무던한 인식이 우리 마음 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지는 않은지.

미켈란젤로처럼 까마득한 옛작가에게만 이러한 관용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저작권으로 문제가 될까 글에 싣지 못하는 그림 중에는 루치안 프로이트나 앤디 워홀의 그림도 있다. 1922년 태어나 2011년 눈을 감은 루치안 프로이트는 저명한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이다. 20세기 중반, 그는 남성의 성기가 노골적으로 묘사된 남성 누드를 전시한 바 있다. 이 작품들은 당시 꽤 논란이 되었고, 더러는 아이들의 관람을 금지하는 처분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대에 문제시 되었던 그림들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으로 볼 경우 보이는 것은  성기만이 아니다. 어느새 과거의 문제작들을 해석하는 오늘날의 기준이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예술계에서 성기와 실존을 관련 짓는 경향이 나타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고작 남자 성기를 보았다고 야하다며 얼굴을 붉히는 일은 소위 ‘예술에 좀 관심 있다는 이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가 되었다. 고급 관객만이 아니다. 이것은 현대 미술에 노출된 현대인들 사이에서 점차 확산되어가는 태도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에게 이 그림은 어떨까.

귀스타브 쿠르베, 세상의 기원

귀스타브 쿠르베 작, ‘세상의 기원’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인 쿠르베는 한 귀족의 개인적 취미를 위해 귀족 개인의 소장용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한다. 대중에 공개된 이후 이 작품은 미술사의 가장 문제적인 여성 누드로 손꼽히게 되었다. 온라인에 검색한 결과, 이 그림과 관련된 포스팅 중에는 그림의 역사나 방향성을 설명하는 글 외에도 야한 콘텐츠의 떡밥으로 이 그림을 애용한다는 식의 글이 꽤 섞여 있었다. 떡밥의 필요충분조건은 흥미. 눈이 번쩍 뜨이고 무심코 흥미가 동하는 그것이 아니고서야 떡밥이라 하기 힘들 테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아무렴 떡밥이 될 만큼 흥미로운 “보지” 그림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혹시 앞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볼 때와 달리 이 그림을 보며 멈칫하신 분은 없으신지.

이 글의 요지는 바로 그 멈칫하는 순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상 다비드상과 ‘세상의 기원’을 나란히 두고 논의를 펼치기엔 좀 무리인 감이 있다. 전자는 전신을 대상으로 한 르네상스 기의 조각이고, 후자는 오로지 성기만을 대상으로 한 19세기의 그림이니까. (저작권이 문제되어 보다 쓸만한 다른 그림을 올릴 수 없는 것이 좀 안타깝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남성의 성기를 볼 때와 여성의 성기를 볼 때, 둘 다 예술로 인정 받은 작품이란 걸 차치하고 드는 아찔한 차이는 없었는지. 하다 못해 전자는 갤러리에서 좀 많이 본 “거기”인데 후자는 야동에서나 더 많이 본 “거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지.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그 자체로도 충격적인 작품이자, 그와 관련된 여타의 작품 및 활동들에도 굉장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작품이다. 여성 작가 생 오를랑이 쿠르베의 작품을 남성 성기로 패러디한 1989년 작 ‘전쟁의 기원’은 ‘세상의 기원’과 더불어 가장 많이 회자되는 파생 작품일 것이다. 그 밖에도 벨기에 예술가 드보라 로베르티스는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중앙에 전시된 쿠르베의 작품 앞에서 ‘기원의 거울’이라 명명된 퍼포먼스를 펼친 바 있다. 그녀가 한 행위는 치마를 걷고 다리를 벌려 관람객들에게 성기를 노출한 것이었다. 이는 예술로 대우 받는 “보지”와 그렇지 않은 “보지”를 대비시키는 효과를 자아냈고, 대중을 경악시켰다.

기원의 거울

기원의 거울

“거기”, 떳떳합니까?

여러 이야기가 나왔지만, 결국 묻고 싶은 것은 한 가지다. 개방적인 성 문화가 시대의 또 다른 얼굴처럼 당연해진 시대. 그러나 여기에도 맹점은 자리한다. 떳떳해져 가는 것은 “성”이라는 포괄적인 이름으로 포장된 남녀 성교뿐인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섹스 용도로 해석되는 여성 성기의 면모는 나날이 부각되어 간다. 그만큼 성적인 터부의 허들은 낮아져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 성기 그 자체가 신체의 일부이자 소중한 몸으로서 갖는 정체성은 여전히 위태롭다. “보지”는 섹스 기구만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다비드상의 “자지”가 떳떳이 있어야 할 곳에 붙어 성적인 뉘앙스와 무관하게 당당하듯 “보지” 역시 그럴 권리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인류의 노출증에 관한 우스꽝스러운 농담이 아니다. 이제부턴 예술 작품마다 노골적으로 성기를 그려넣자는 그런 권유도 아니다. 그저 권리와 인식에 관한 모호한 문제 제기일 따름이다.

원치 않는 타인에게 성기를 노출하는 행위는 분명한 위법이다. 그러나 예술적인 의도로 성기를 표현하는 일은 위법이라 보기 어렵다. 이 간극에서 모호함이 발생한다. 모호한 나머지 권리를 보호 받지 못하는 것들도 생겨난다. 예컨대 “자지”와 “보지”의 위상 차이가 그렇다. 다비드상의 “자지”는 예술의 일부이며 유치원생들에게 보여 이상할 것 없는 부위이지만, 루치안 프로이트의 누드 속 음모를 드러낸 여인은 어쩐지 아이에게 보여줄 모습이 못 되는 것 같다. 심지어 다리를 벌린 여인이라니. 그렇게 하면 보여선 안 될 곳까지 모조리 보여버리고 말 텐데. 쿠르베의 “보지”라면 뭐, 더 얘기할 것도 없다.

시대착오적인 것 같은 이러한 인식은 암암리에 공고히 자리한다. 또한 이 같은 인식 하에서, 다리를 벌리면 드러나는 그 부위가 여성 성기의 엄연한 일부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치 않아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직까지 휘날리는 머리칼을 움켜쥐어 곱게 “거기”를 가린 보티첼리의 비너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지 보호” 혹은 “보지 공포증”은 한국의 성교육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터무니 없이 “자지” 중심적으로 성차별적인 시선을 고수하는 한국 성교육의 지난 만행을 떠올려 보자…

......

단호하게 거절하며 지켜야 하는 보지의 안녕

교육부터 이런 실정인데, 예술계라고 뭐가 다를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차별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구체 관절 인형을 만들던 여성 작가가 자신의 인형에 구체적인 여성 성기를 더해주자, 그날로 판매 불가 조치를 받았다는 소식이 외국에서도 전해 들려 오는 실정이다. “보지”의 정체성은 여전히 모호하고, 아슬아슬하다. 아무리 예술이라 불리는 테두리 안에서 여성 성기를 담아낸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해도 어쩌면 상황은 변함 없을 것이다. 예술이 점유한 한정된 공간, 예컨대 갤러리를 벗어난 순간 다시금 “보지”는 일상의 법칙에 지배 받는 까닭이다. 일상의 사고가 그것의 정체성을 섹슈얼한 해석에 한정하거나, 혹은 출산을 위한 기구로 국한하는 이상 “보지”는 결코 “자지”와 동등하게 읽힐 수 없다. 

성기 뿐인가.

이것은 여성이 지닌 다른 신체 부위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문제이다. 결국  이 글을 매듭짓기 위해서는 성기를 넘어 여성의 다른 부위들(?)까지 언급할 수 밖에 없다. 최근의 이슈를 떠올려 보자. 토플리스.

photo 4a

난데없이 옷을 벗고 가슴을 내보인 여자들. 이들에게는 “젖” 역시 지배 받을 수 없는 영토이다. 최근 자주 소식이 들려오는 여성들의 토플리스 운동은 본질적으로 위에서 구구절절 풀어놓은 이야기와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여성의 신체가 뼈와 살과 피를 지닌 누군가의 몸이기 이전에 성적인 상징이자 자극제로 해석되는 것, 그 해석으로 지배당하는 것. 토플리스 운동이 문제 삼고 있는 지점은 결국 그것이다. 그러니 옷 밖으로 나오기를 꿈꾸지 못하는 “젖”들은 결국 미술사의 위축된 “보지”들과 닮았다. 이들에겐 정당한 자유가 필요하다.

 

글/ 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