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동창녀석 덕분에 본의 아니게 신불자 체험기

소비자들에게 카드를 골라 쓰는 재미가 생겼다. 항공권을 구매할 때는 2~3개월 무이자 할부를 해주는 L카드를 쓰고, 외식을 할 때는 무료메뉴를 서비스 받을 수 있는 C카드를 쓴다. 공연 관람할 때는 1만원에 인기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Y카드가 제격이다. 전자제품을 장만할 때는 캐시백 이벤트를 하고 있는 H카드를 챙겨야 한다.1)머니투데이, [신용1등급 ‘평균 5장’…똑똑한 우량고객 이시네요], 201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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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로도 골라 쓰는 재미를 톡톡히 즐긴다는 열린 가능성의 시대에 지금 난 신용카드가 1도 없다. 간혹 물품결제를 위해 카운터 앞에 섰을 때 “몇개월로 해드릴까요?” 란 점원의 질문을 받으면 약간은 우쭐한 기분으로 ”체크카드예요“라고 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대부분은 머릿속에서 남은 잔액을 떠올려보면 카운터앞까지 가는 경우가 희박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불만이냐고?

전혀….

모든게 일찍이 이 소비만능시대의 어둠을 경험케하여 새로이 태어나게 만들어준 친구느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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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신용카드대란을 아시는가? 경제활동인구 1인당 평균 4.6장, 총1억480만장의 카드가 발급되어 심각한 사회·경제적 파장을 가져왔더랬다2)물론 현재는 그때보다 발급량이 늘었다. 그리고 나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었던 것을 경험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시류에 편승하던 사람이었다.

개나 소도 다 발급해준다는 신용카드를 유독 발급받을 수 없는 희귀템 친구가 하필 내 중학교 동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난 마치 도서 대출증 빌려주듯 신용카드를 만들어서 빌려주었고, 당시 한도가 얼마 되지 않아 만약의 사태까지 나름 현명하게 각오했던 나를 비웃듯 신용카드 회사는 무한한 자비심으로 한도를 꼬박꼬박 늘려주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만물의 기운이 불연듯 쎄하게 느껴질 때 저축 늘리듯 한도를 늘려온 중학교 동창녀석은 행방이 묘연해졌으며 반대로 내 인생에서는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라고 누가 말했던가. 예전에 이 말은 그저 지나간 사랑과 관련된 말이었다. 지나간 추억을 소주잔과 되새김질 하다 나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어 한껏 애틋한 나와는 다르게 심드렁한 그 자식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야만 생생한 기억을 잊기 위해 폭음하고 다음날 아침에 중얼거리게 되는 주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기존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던 날들의 기억은 기특하게도 내안의 보호시스템이 셀프작동하여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때 느껴던 감정들은 잊을 수 있을까 싶다.

당시 22살, 어렸던 나는 적절한 도움을 청하는 방법도, 목돈을 마련할 방법도, 그 친구와 친한 친구에게까지 뻗치는 서운한 감정을 다스릴 줄도 몰랐다. 학업을 이어갈수도 없었고, 한창 세력을 넓히던 아메리칸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하루종일 ‘왜 남이 먹을 걸 내가 썰어주지?’란 물음에 답을 얻지 못한 채 립과 옥수수를 썰어야했으며, 모든 안주가 5천원이었던 잠실 포장마차의 신세계에서 닭똥집에 소주를 들이키며 발냄새가 진동하는 부은 발을 주물러야 했다. 마치 영화“나쁜 남자”의 여주인공처럼 순진한 대학생에서 거칠고 험난한 세상으로 추락한 것만 같은 절망이 나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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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3년은 정말 거짓말처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나와 제일 많이 소통했던 사람은 카드대금 독촉인이었는데 나는 그들에게3)한두명이 아니었기에 화를 내기도 했다가, 서러움을 나누기도 했다가, 그를 위로하기도 했다가 나중에는 전화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4)나는 진심으로 그들에게도 동정심을 느꼈으나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간혹 지인들에게 이 썰을 풀면 ‘그러면 그 친구는 어떻게 됐어?’라고 묻는다. 나중에 돈 갚고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노라고 얘기하면5)배아파서 결혼식장에 안 간 얘기는 빼고 왠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고 잠시 눈에 어렸던 호기심을 거두곤 한다. 어떤 극적인 것을 기대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극적이게도 그 친구는 엄마가 암에 걸리는 바람에 나 못지 않은 힘든 시기를 겪었으며 비록 5년이 지난 후이기는 하지만 돈을 분할로 갚고 싶어 했으며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길 희망했다.6)내가 빚 갚던 시기 겪었던 얘기만 해도 지가 더 화를 내서 술자리를 파토시키긴 했지만

친구에 대한 배신감과 자신의 무능력함에 대한 혐오와 사회에 대한 막연한 분노가 걷히고 한참 후 내가 그 시기에서 나름 성찰한 것이 있다면 그건 ‘절대 친구와 돈거래는 하지 말자!’가 아니라 ‘어떤 사람도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면 안된다’는 보편적 인식의 확인이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어떤 시련과 위기가 닥쳐도 끝내 이기리라~를 알기에 그에겐 그 위기가 내면을 다지는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 현실에서 닥치는 위기는 죽을 것 같은 공포와 절망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인간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애쓸 일이지 방조하거나 부추겨서는 안된다. 더욱이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라면, 절대로.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욕망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한, 친구가 아니라 가족, 사랑하는 사람, 또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은 일을 당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로..로봇까지?

롯데월드에 저렴하게 입장하게 해주고 덤으로 경품, 할인까지 얹어주는7)왜….왜 그러시는 거죠????!!!!!!!! 신용카드는 그 대가가 너무 크다. 일개 호갱간의 니탓 내탓이 그닥 의미가 없다. 우리 모두 나약하고, 가난해서 유혹에 빠지기 쉽고, 돈들일 많은 불쌍한 인간들일뿐이다.

그래서 나는 신용카드가 없다. 카드수수료 주기도 아까워 현금결제를 애용한다. 순풍산부인과의 미달이 아빠급 나만의 소심한 복수다.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금융정의연대'(www.kofica.or.kr)에서 ‘청년 부채 실태조사’의 일환으로 인터뷰이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신원은 절대 비밀로 하며, 인터뷰 해주신 내용은 청년 부채 문제 개선을 위해 소중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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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및 교정/ 저년이

글/ 안물안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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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니투데이, [신용1등급 ‘평균 5장’…똑똑한 우량고객 이시네요], 2011.04.20
2. 물론 현재는 그때보다 발급량이 늘었다
3. 한두명이 아니었기에
4. 나는 진심으로 그들에게도 동정심을 느꼈으나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5. 배아파서 결혼식장에 안 간 얘기는 빼고
6. 내가 빚 갚던 시기 겪었던 얘기만 해도 지가 더 화를 내서 술자리를 파토시키긴 했지만
7. 왜….왜 그러시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