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를 좋아한다는 말을, 나는 섣불리 낯선 이 앞에서 꺼내지 않는다. 친구들 사이에선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낯선 사람 앞에서는 조금 꺼려진다. 지금까지 내 취미를 모르던 사람들에게 홍차를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면 거의 비슷한 반응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홍차는 좀, 비싸지 않아요?”

그리고 이 말은 종종 그런 “고급” 취미를 가지다니 “고급” 좋아하나 보네, 라는 암묵적인 편견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나보다 더욱 뛰어난 자신의 “고급” 취향을 자랑하며 “고급” 홍차 브랜드와 다구 브랜드를 줄줄 외우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홍차는 “고급”이라는 개념을 동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고급”이니 “저급”이니 하는 수식어를 취미에 결부시키는 건 내게 거북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뭘 좀 좋아하고 즐긴다는데, 그걸 남에게 말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거기에 대한 평가가 돌아오는 것. 더불어 나에 대한 평가 역시 그 취미의 영향력 하에서 결정되는 것. 부담스러웠다. 다른 취미도 아니고 홍차 같은, 아직 한국에서 대중화되었다고는 보기 힘든 취미를 굳이 입에 담는다며 내게 은근히 아니꼬운 시선을 보낼까봐 두렵기도 했다.

두렵두렵

두렵두렵

사실 내가 홍차를 좋아하게 된 건 너무 단순한 계기였다.

그러니까, 홍콩에서였다. 밀크티를 마셨다. 그게 처음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밀크티는 종종 마셨던 적이 있었다. 신촌 등지에서 꽤 유명하다는 가게에 갔던 적도 있었다. 차를 좋아한다던 친구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나도 덩달아 차가 좋아진 건 아니었다. 적어도 홍콩 전까지는 그랬다. 차? 별 감흥 없는 마실 거리였다. 게다가 잘못 취미를 붙였다간 돈이 꽤나 깨질 거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내 사정이 궁핍하고 말고의 문제이기 이전에, 감정적으로 몰두하게 될만한 돈 드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게 대학생인 나의 현실 감각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홍콩 전까지는 그랬다.

운명의 밀크티

그곳 현지 밀크티는 제법 유명하다고 했다. 여행 전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밀크티 찻잔이 몇 번 눈에 밟혔다. 귀염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심플하고, 색이 명쾌한 찻잔. 젖소 그림. BLACK AND WHITE라는 표기와 똑같은 표기의 소서(찻잔 받침). 도톰한 찻잔에 호감이 갔다. 실은 그때부터 나의 홍차 ‘덕’력은 쌓여 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홍차에 취미를 붙이면서 찻잔에 무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내겐 차에 대한 덕질 이력은 없었어도, 유독 도자기를 비롯한 식기들에 관심이 많은 엄마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 관심의 결과물들을 하며 자라난 덕에 나는 어딜 가든 식기에 유독 눈길을 주는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찻잔에 그랬다. 그 안 내용물이 뭐가 됐든 찻잔은 되도록 예쁜 게 좋았다. 그리고 홍콩의 밀크티 찻잔은 내 기준에서 귀여웠다. 현지에서 한 번쯤 사용해보고 싶었다.

바로 이것

바로 이것

그래서 실행에 옮겼다. 그때 나는 일주일 간 홍콩에 머물렀는데, 첫날부터 밀크티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실은 대단한 기회랄 것도 없었다. 길거리 웬만한 음식점들마다 그 밀크티를 팔았다. 바로 그 찻잔에 내주는 곳이 다수였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명한 찻잔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홍콩의 차찬텡(비교적 저렴한 음식점)은 내게 한국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진하고 걸쭉한 밀크티와 그걸 담은 젖소 찻잔으로 기억되었다. 홍콩에서 보낸 일주일 내내 그 진한 맛에 중독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멀미가 심해 버스를 잘 못타는 나는 홍콩 곳곳을 대개 도보로 오갔는데, 지친 다리를 쉴 겸 자릴 잡은 차찬텡에서 마시는 밀크티 한 잔은 여행 중 최고의 기쁨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게 서막이 오르고

커피와는 다른 차의 매력에 빠진 채 한국에 돌아온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홍콩 여행을 같이 갔던 동생 역시 차에 푹 빠진 상태였다. 처음엔 그저 집에서도 밀크티를 만들어 마시겠다는 일념에서 출발해, 밀크티를 만들기 좋은 차들을 섭렵해 나갔다. 밀크티는 기본적으로는 홍차에 우유를 곁들인 차를 말한다. 이때 베이스가 되는 홍차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밀크티의 맛과 향이 결정된다. 밀크티를 만들기에 좋은 베이스 차를 고르면 그럴싸한 밀크티가 완성되고, 너무 정석적인 베이스 차를 고르지 않더라도 감각이 좋다면 색다르고 그럴싸한 차를 선택할 수 있다. 다만 너무 용감할 경우 초장맛 우유와 같은, 굉장한 물건이 나올 수 있다.

대충 이런 느낌

대충 이런 느낌

우리는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홍차 카페에 가입하기를 택했다. 그것으로 홍차 덕질의 서막이 오른 셈이었다. 그 뒤로 우린 밀크티는 물론 평소 잘 마시지 않던 녹차나 좀 더 값이 나가는 백차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주변의 몇 안 되는 홍차 덕후(?) 지인들 덕분에 티룸이라 불리는 차 전문점에 들리기도 했고, 차를 마시는 방법이나 다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와중에 여러 이름에 친숙해졌다. 마리아쥬 프레르, 딜마, 포트넘 앤 메이슨, 트와이닝, 루피시아, 다만 프레르, 그리고 한국에서 비교적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오설록 등등 홍차 브랜드는 무시무시하게 많다. 그 브랜드들에서 나오는 차의 종류 역시 무시무시하게 다양하다. 브랜드마다 이름을 지어 판매하는 갖가지 가향차들을 구분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홍차에 관해 숙지할 몇 가지 정보들이 있다.

예컨대 홍차는 찻잎의 원산지에 따라 크게 몇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는 것. 스리랑카 전역에서 재배되는 실론은 과일과 꽃의 향기를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무난하고 정석적인 홍차라서 블렌딩에 두루 이용된다. 우바 역시 스리랑카에서 나오는 홍차다. 스리랑카 남동부의 우바 고산 지대에서 생산되며 다즐링, 기문과 함께 세계 3대 홍차로 꼽힌다. 홍차의 샴페인이라고 불리는 다즐링은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기슭에서 생산된다. 낮 밤의 일교차로 인해 생기는 이슬 덕분에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닌다. 중국 기문 지방에서 생산되는 기문은 솔잎과 난꽃향을 지니며 차에 따라 훈연향을 지니기도 한다. 우유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홍차인 아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홍차이다. 인도 아쌈 주에서 생산되며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구수하고 달콤한 군고구마나 밤 같은 맛을 느낄 수 있다.

향과 맛뿐만이 아니다. 수색(찻물의 빛깔) 역시 홍차 마시는 기쁨 중 하나이다. 각각의 홍차들은 각각의 수색을 지니며 홍차를 즐기는 사람들 가운데는 차마다 가진 수색을 암기(?)하거나 기록해나가는 사람도 대부분이다.

티센터 오브 스톡홀름 스파이스 블랜드

티센터 오브 스톡홀름, ‘스파이스블랜드’의 맑은 주홍빛 수색

이쯤 되면 홍차가 취미이자 공부가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 값비싼 홍차를 마음껏 소비하며 부를 과시하고 “고급” 취미임을 내세우는 이들도 생겨난다. “고급” 다구에 “고급” 브랜드의 홍차를 마시며 각종 화려한 차 관련 액세서리들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만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고급” 취미를 하나 즐겨보겠다는 일념에 홍차를 마시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남들에게 경쟁심을 품는다. 보다 “고급”이고자 애쓴다. 홍차는 어쩌면 그런 욕망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취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런 사람들만 있었다면 나 역시 이런 글을 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취미는 즐겁게 했으면…

홍차를 마시게 된 후로 인생의 소소한 즐거움이 늘었다. 내 미각이 특별히 섬세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음료는 카페에서 약속이 잡히면 자릿세 내는 셈 치고 마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무심히 넘겼던 어떤 섬세한 요소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서 기쁨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좀 민망하긴 하지만, 대충 그런 셈이다. 금전적인 여유가 생기면 평소 관심 있게 보아 두었던 종류의 홍차를 구입하고, 주말 오후면 자취방에서 weekend in venice나 English afternoon 같은 차를 마시며 다가올 미래의 어떤 좋은 부분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나 말고도 이런 사람들이 꽤 많다. “고급”이니 “저급”이니 하는 얘기는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게 미각과 후각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걸 좀 비일상적으로 자극해보고, 때로 그런 감각들이 섬세하게 발전해나가는 걸 느끼는 것. 그건 놀이에 가까운 일이다. 놀이의 영역에까지 등급 따지는 숨 막히는 기준을 들이대고 싶지 않다. 들이대는 이들에게 피곤한 짓 관두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뭐, 그런 진지한 소리 하는 게 좀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돌려 말한다. 부자들만 하는 거 아니예요. 홍차 덕질, 꽤 괜찮으니 무서워 마세요.

글/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