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픽션>에는 재밌는 소재 하나가 나온다. 뭐 딱히 엄청난 죄는 아니지만, 보는 이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기엔 충분한 그것. 바로 여성의 털이 무성한 겨드랑이다. 여주인공 희진(공효진 분)의 털투성이 겨드랑이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소재로 활용된다. 남주인공 주월(하정우 분)이 사랑하는 여인의 정체성에 관해 떨떠름히 고민해보게 만드는 방아쇠이자, 스크린 밖 관객들마저 성공적으로 그의 고민에 동참시키는 훌륭한 떡밥. 자신의 겨털에 당당한 영화 속 희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녀의 겨털을 보며 주월을 따라 민망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그건 정말 무성하고 거름지며 낯뜨거운 털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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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픽션> 中, 떨떠름한 하정우의 손길을 보라.

베드씬 아닌 털씬?

침대도 나왔고 반 벌거숭이인 두 남녀도 나왔으니 베드씬이라 불리게 무난한 장면일 텐데, 베드는 지워지고 털만 남은 유명한 주월과 희진의 거사(?) 장면. 털만 뇌리에 남기고 지나갔으니 베드씬 대신 털씬이라 불려도 무방하겠다. 영화 속 소설가인 주월은 겨털 무성한 희진과의  정사를 계기로 ‘액모부인’이라는 찌라시 소설을 쓰기에 이른다. 액모부인이란 다시 말해 겨털부인. 육달월 부수의 겨드랑이 액(腋)자에 털 모(毛)자를 써 만든 말이다. 액모라니, 어쩐지 묘한 어감이다. 겨드랑이는 우리말로도 어감이 수상쩍은데 한자로 바꿔도 기묘하다. 액이라니. 뭐 액체 그런 게 새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하여간 액모라는 역경에도 불구, <러브픽션>의 남주인공 주월은 결국 연인 희진의 털을 비롯한 그녀의 전부를 끌어안기를 택한다. 영화는 둘의 관계를 밝게 비추며 막을 내린다. 해피엔딩을 사랑하는 한국 영화 속 주인공들다운 결말이다. 그러나 여주와 남주의 애정 전선이 어찌 되었든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에게는 영화 속 결말과는 결이 다른 한 가지 진실이 더 남겨진다. 여성의 겨드랑이, 거기 무성히 자란 털은 영화 한 편을 너끈히 전개해 나갈 수 있을 만큼 아찔하고 섬찟한 소재라는 것.

그나마 희진은…

그나마 <러브픽션>의 희진은  알래스카라는 그럴싸한 방어 수단을 지니고 있었다. 알래스카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그녀는 추위가 심해 모두가 털을 기르는(?) 그곳의 문화에 익숙하다. 그러니 한국에 와서도 그대로 겨털을 지니고 있기를 택한 것이다. 연인 주월 역시 알래스카 출신이라는 희진의 배경으로 인해 그녀의 겨털을 좀 더 쉽게 이해한다. 물론 그가 택한 겨털 수용의 배경에는 사랑과 정사와 그 밖의 기타 등등 여러 사정이 자리하고 있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 희진의 겨털을 방어해주는 구실은 알래스카라는 명분이다.

알래스카! 예!

알래스카! 예!

그렇다면 알래스카와는 거리가 멀고 먼 여타의 한국 여인들은 어떠할까. 그녀들 겨드랑이의 근황은 대개 <러브픽션> 속 희진의 그것과 꽤나 다를 것이다. 어쩌면 알래스카와 한국이 떨어져 있는 만큼이나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나 민소매 옷을 필두로 겨드랑이 노출을 전제하는 시원한 패션이 거리를 점거하는 여름철엔 더더욱, 겨털을 그녀들의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뭐, 애당초 애인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름과 겨울을 따질 것 없이 매일이 노심초사의 나날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뿐인가. 털이 미움 받는 현상이 벌어지는 신체 부위는 겨드랑이만이 아니다. 여성은 거의 모든 신체 부위에서 털과의 사투를 벌여야 한다. 허벅지, 종아리는 물론 팔과 등, 심지어는 얼굴까지. 그렇다. 바야흐로 인류와 털의 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21세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기 제일의 격전지는 역시나 여성의 액(腋)이다.

알래스카 아닌 한국의 액모들

현인류의 비극을 논하려거든 아프리카와 중동을 빠트릴 수 없는 것처럼, 인간 대 털의 전쟁을 논하려거든 여성의 겨드랑이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로써 화두는 다시금 <러브픽션> 속 희진의 털 무성한 겨드랑이로 돌아간다. 특히 한국에서라면 두 말 할 것이 없다. 주월이 최초로 희진의 액모를 목격한 순간 외쳤던 말을 기억해보자. “여긴 알래스카가 아니라 한국인데-!” 한국의 털전쟁사에서 겨털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자, 털계 제일의 장군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악명만큼이나 민감한 논의들의 도화선을 한 몸에 두르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용납 받을 수 있는 겨털은 대개 남성의 겨털, 용납 받을 수 없는 겨털은 대개 여성의 겨털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외에도 여러 국가에서(알래스카는 어떤지 몰라도!) 준수하고 있는 아/적 판별 기준이다. 그런데 이 기준의 포인트는 남과 여. 결국 털전쟁은 피 튀기고 살 찢기는 남녀 차별의 국면과 얽혀 들 운명에 처해 있는 셈이다.

 겨털녀의 등장은 실상 <러브픽션>과 같은 특정한 영화 외에도 일상에서 꾸준히 목격되어져 왔다. 일반인 겨털녀는 물론, 종종 검색창을 낯뜨겁게 달구는 연예인 OOO의 겨털 노출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실제로 유명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겨털을 쳐보면 금세 겨털 역사의 근황을 살필 수 있다. 겨드랑이를 활짝 연 여성 연예인들의 사진과, 겨털을 기른 채 AV에 출현한 그 계통 여배우들의 소식. 검색 결과의 대부분은 이 둘 중 하나로 양분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중 연예인의 겨털은 대부분 굴욕적인 치부로, AV 여배우의 겨털은 숨겨진 털적 본능을 자극하는 자극제로 취급된다. 나아가 후자의 경우에는 겨털을 자신의 심볼로 삼아 인기를 얻은 뒤 AV를 여성의 권익증진을 위한 도구(?!)로 삼은 쿠로키 카오루와 같은 모순적인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쿠로키 카오루를 아십니까

도쿄의 치치올리나(이탈리아의 포르노 배우 출신 국회의원)라는 별명을 지닌 쿠로키 카오루. 그녀의 영상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여성주의와 관련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가 액모계의 유명 인사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쿠로키 카오루와 그녀의 상큼한 겨털들!

쿠로키 카오루와 그녀의 상큼한 겨털들!

쿠로키 카오루가 여성권익 증진이라는 터무니 없는 명제와 자신의 AV를 관련 지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의 무성한 겨털들 역시 한 몫을 했다. 뭐, 그녀가 맹활약했던 80년대 당시에는 어땠을 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후 털 전쟁사에서 그녀의 이름이 간혹 겨털녀 친화적인 방향으로 언급될 수 있었던 근원은 바로 그녀의 털 무성한 액에 있었으니. 결국 그 맥락에서 보자면 쿠로키의 액모 선전은 여성의 겨털을 비호하는 행위의 일종으로 읽힐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다. 그녀의 겨털을 선전한 콘텐츠가 다름 아닌 포르노인 이상, 그 털이 매력으로 작용하는 과정에는 대체로 수용자의 용인이 필수적인 까닭이다. 당시 포르노 소비자는 대부분 남성. 그렇다면 쿠로키의 액모는 한 여성이 자체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완결 지을 수 있는 신체의 부위가 아니라, 타자화되고 대상화되어  남성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도구일 가능성이 높다.

쿠로키가 자발적으로 털을 길렀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적어도 세간에 널리 알려진 바는 없다.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이상 그녀의 액모는 빛과 어둠을 동시에 지닌다. 여성의 액모가 무조건 천대 받아야 할 “추한” 것이라는 인식에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봤자 남성의 기준에 따라 모습을 가다듬는 여성의 신체라는 굴레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록시 헌트의 청록색 겨털

 앞서 <러브픽션>의 희진은 알래스카에서는 추위 때문에 여성도 겨털을 기른다는 발언으로 겨털의 실용적(?)기능과 건강 차원의 필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쿠로키 카오루는 80년대에 겨털을 통한 매력 어필에 솔선수범하며 겨털의 심미적(?)기능을 선보였다. 여성 겨털은 무조건 추하다는 세간의 인식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이들은 그 밖에도 있다. 이들은 그간 AV계에서나 일종의 특이취향으로써 통용되던 겨털을 양지로 끌어내려 애쓴다. 그를 위해 겨드랑이에 붉고 푸른 염색모를 기르는 것도 불사한다. 2011년 레이디가가가 머치뮤직 비디오 어워드에서 푸른 겨털을 선보인 후 시동이 걸린 여성의 겨털 염색은 헤어스타일리스트 록시 헌트의 가세로 현재 꽤나 불이 붙은 상황이다. 가히 털 전쟁사의 일대 이변이라 할 수 있겠다.

 

미소 짓는 록시 헌트와 그녀의 자랑스러운 염색모

미소 짓는 록시 헌트와 그녀의 자랑스러운 염색모

겨털 염색 운동은 이미 한국에도 상륙한 상황. 2014년 말에는 겨털 염색에 관한 기사들도 제법 나왔다. 유투브에는 남자 친구의 겨털까지 청록색으로 염색한 한국 여인의 동영상도 올라와 있는 모양이다. 과연 염색 겨털이 어느 정도로 심미성이 뛰어난 것인지 확답하기는 어렵다. 그거야 각자 판단해 볼, 취향의 문제이니까. 그러니 얘기해 볼만한 것은 겨털이 과연 얼마나 예쁜가, 혹은 얼마나 예뻐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겨털은 과연 개인의 취향과 선택 하에 놓일 수 있는 부위인가?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답해야 할 진정한 의문인지도 모른다.

내 몸에 대한 자유

쿠로키 카오루의 겨털은 그랬다. 겨털에 관한 개인의 취향과 선택을 겨털 소유자인 여성에게 맡기고 있지 못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겨털이 남자 보기에 꽤 독특하게 매력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전부라는 점. 그러니 만약 그녀를 따라 누군가 겨털을 길러 보았다 한들 그것은 기른 자 본인이 느끼기에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이 때의 타인은 특히 여성의 육체를 평가하는 남성 상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록시 헌트의 겨털은 그와 다르다. 그녀는 청록색 겨털을 포함한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겨털을 밀지 않겠다는 것, 나아가 염색해서 예쁘장하게(?) 꾸미겠다는 것은 온전히 그녀의 선택이다. 이것으로 비로소 겨털은 육체로 귀환한다. 여태껏 육체에 달린 추한 없앨 것에 가까웠던 그것이, 여성 신체의 일부로 여김 받는다.

그런데 이 난데없어 보이는 귀환은 사실상 귀환이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겨털은 본디 육체의 일부였다. 한 번도 그렇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상식이라 불리는 기준에 의해 결정되어 왔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상식은, 어쩌면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밀고 싶은 사람은 밀고, 땋고 싶은 사람은 땋고, 염색하고 싶은 사람은 염색하게 두는, 그런 자유로운 형태로. 왜냐하면 겨털은 원래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내 것이자 사회적으로 탄압 받을 필요가 없는 온 전한 나의 영역, 나의 몸이니까.

글/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