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왔던 나-의- 스풰엑. 머니 Speeec!

한때 대학생이었던 나의 머니 스펙은 대략 이러했다(사실 지금도 별 다를 바 없음).

학내 근로장학생 알바와 과외로 얻는 월 수입은 적을 땐 60만원, 많을 땐 90만원. 30만원의 월세와 생활비는 온전히 스스로 부담했다. 비싼 전공 서적과 화장품, 속옷 값은 덤이었다. 

과외둥이가 수업을 몇 번 미루는 달이면 월 최고 수입은 보장되지 못했다. 어쩌다 일에서 잘리기라도 하면 다시 구할 때까지 하루 종일 돈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모자라면 집에서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장년의 부모님은 점점 기력이 빠지고 계신 탓에 본인들 돌보기도 벅차셨다. 그냥 까고 말해서 나한테 줄 돈이 없으셨다. 손 벌리는 게 절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내 머니 스펙을 수치로 다시 정리하면, 월 수입 60만원~90만원. 월세 내고 생활비 쓰고 나면 남는 거 제로. 저축은 개나 줘. 취미는 돈 없을 때 동생한테서 꿔다 쓰기. 

빚 무서운 건 몰라도 없는 티 내는 거 무서운 줄은 알았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우리 정부는 하해와 같은 은혜를 내려줬다.

'대출의 은혜' 감사감사

‘대출의 은혜’ 감사감사

처음엔 몰라서 안 썼다. 뒤늦게 이 은혜로운 존재를 알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지금은  조금 늦게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린다.) 한국장학재단의 생활비 대출을 알게 되자마자 이것은 나의 대학생활에서 옵션이 아닌 필수가 돼버렸다.

돈에 쪼들리며 살아도 쪼들리는 티는 죽어도 내기 싫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는 친구들, 직접 벌이는 하지만 일자리 끊긴다고 당장 생존을 위협 받진 않는 친구들 앞에서 생존을 위해 일한다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았다.

한 끼 식사를 할 때면 저렴한 걸 먹고 싶더라도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어디든 괜찮다.”고 말했고, 없는 자의 강박이 그러하듯 얻어 먹는 것도 편하게 얻어 먹지를 못했다.

나에게 남은 건 자존심뿐이었으니까. 너희와 같은 중산층이(되고 말 거)라는 자존심.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나였지만 타인의 눈에 의리 없고 염치없는 사람까지 되긴 싫었다. 그래서 내겐 없는 티를 내는 일이 빚보다 더 무서웠다. 그리고 자신 있게 생활비 대출을 해댔다. 왜? 갚을 거니까. 대학만 졸업하면 먹고 살고도 남을 만큼 벌어줄 거니까. 이십 몇 년의 인생을 공부하느라, 돈 버느라 치열하게 살아온 나님은 그런 보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우수 고객님! 우수 고객님? NO. 우수 호갱님!

하던 과외마저 잘리고 인생이 괴로워서 평소보다 술을 몇 배로 퍼 마시던 시절, 나는 눈만 떴다 하면 알바몬과 과외 카페를 들락거리며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내 잔고는 언제나 그렇듯 0으로 수렴하는 중이었다. 잘 안 마시던 술을 마시니 통장 비는 속도가 1.5배는 빨랐다. 연비는 낮은데 미친 듯이 달리는 차마냥 위태로운 일상이었다. 

나는 번민했다.

‘일자리 하나 찾기도 점점 힘드네. 나 같은 인간은 쓸모가 없는 건가? 휴, 동생한테 돈을 빌릴까? 생활비 대출 추가?’

그러던 중 15xx으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전화를 받던 그 순간의 날씨, 햇살, 도로의 분위기 등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여보세요?”

“고객님, 저희 xx체크카드 우수 고객으로 선정되셔서 저희가 월 30만원 한도의 소액신용 혜택을 드리려고 합니다.”

심신이 지쳐있던 나는 ‘우수’라는 말에 이미 흥분하고 있었다.

‘뭐? 내가 우수하다고? 아, 진짜 신이 도우시는구나. 나를 알아보시고.’

“받을 게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케이!(오오오오오오오오오!! 케이!)

이렇게 나의 '신용 라이프'는 시작됐다.

이렇게 나의 ‘신용 라이프’는 시작됐다.

대출과 신용이 지켜준 인간 존엄? 존(도)엄(슴)

신용.

어릴 때 신용카드란 용어에 ‘신용’이라는 단어가 왜 들어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신용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였을 때 쓸 수 있는 단어인데 돈이 오가는, 그것도 은행과 개인의 관계에서 왜 ‘신용’이라는 단어를 쓰는지 와 닿지 않았다. 그땐 내가 어려서 어른들의 언어에 익숙지 않은 거라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의 내가 ‘신용’이란 단어에 대해 느낀 어색함은 꽤 타당한 직감이었다. 어른의 세계에 익숙지 않은 데서 기인한 건 아니었다.

어른들은 내게 모든 일을 자기 돈으로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사업을 할 땐 당연히 대출을 끼고 하는 거라고 말해줬고, 학자금 대출이 원활한 미국의 제도가 좋다고 말해줬다. 빚 때문에 우리 집이 망가지는 걸 봤음에도 주입된 학습의 효과는 강했다. 빚을 ‘과도하게’ 지면 곤란하지만, 컨트롤 할 수 있을 정도의 빚을 지는 일은 보다 높은 곳(?)에 가기 위한 필수적 절차라고 받아들였다. 신용카드가 많으면 재산이요, 부동산 값 상승을 도모하며 대출을 받는 것은 현명한 처사요, 미래를 위해 학자금 대출을 받는 건 달갑진 않아도 괜찮은 투자라고 생각했다. 대출과 신용은 나에게 인간 존엄을 지키는 데 꽤 유용한 도구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른이 됐다.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닌 덕에 ‘과도한’ 학자금 대출은 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과 학기를 다니느라 받은 대출금, 장학금 접수 기간을 놓쳐 받은 대출금, 그리고 생활비 대출금이 차곡차곡 쌓여 약 500만 원의 빚을 진 채무자가 됐다. 겨우 몇 십 만원 씩 받은 생활비 대출은 생각보다 빨리 불어났다. OMG! 컨트롤 할 수 있을 정도의 빚만 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차하면 과도해질 지경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신용을 썼다. 비록 소액한도이긴 하지만. 소액신용 체크카드(일명 하이브리드 카드)를 사용하면서 조금 찜찜한 감이 있긴 했지만 잔고가 0이 되면 필요한 대로 긁었다. 몇 천 원씩 쓴 것이 쌓여 10만 20만원이 됐고, 수입이 적을 땐 한도 30만원을 알뜰하게 채웠다.

이렇게 난 공부를 했고 의식주를 해결했고 친구를 만났다. 가끔은 비싼 선물도 했다. 인간적인 일상과 자존심을 지켰다.

그리고,

대출과 신용으로 지킨 나의 자존심과 정신적 평온은 매달 초 날아오는 청구서 앞에서 무너졌다. 돈을 벌자마자 가슴 찢어짐을 느끼며 갚는 일이 대부분이었으나, 못 갚을 때면 매일 하루 두 번씩 울리는 카드사의 전화벨 소리를 들으며 몸만 큰 어린애가 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청구서와 독촉 전화 앞에서 나란 인간의 존엄은 존도 엄었다.

스펙도 청춘도 열정도 지켜주지 못한 대출이여!

사진과 글 내용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은 없습니다.

사진과 글 내용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은 없습니다.

돈 벌고, 대출 받고, 빌린 돈 갚고 쓰기 위해 또 돈 벌고, 그 와중에 학교 다니고, 틈틈이 하고 싶은 공부와 대외 활동을 하며 나의 20대가 지나갔다. 정말 정신없이, 맘 졸이며 살았다. 그러면서 배운 게 있다면 돈 모으기는 졸라게 힘들다는 것과 빚 안 지고 살려면 나를 둘러싼 수많은 소비의 유혹 앞에서 눈 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사회의 시스템은 나를 절대 지켜주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생의 쓴맛을 보고나니 순수한 열정은 꽤나 퇴색되었다. 20대의 끝물이면 끝발 날리는 스펙 쌓아놓을 줄 알았으나, 일상을 챙기느라 이도 이루지 못하였다. 매스컴은 청춘, 청춘 해대는데 청춘의 ‘봄 춘’ 자가 무색하게 나의 발은 눈밭을 걸어온 듯 시리다. 앞으로 겨우겨우 월급 받으며 대출금 갚고 삶의 새로운 국면들을 극복해 나가야 하니 내 앞엔 여전히 눈밭이 펼쳐져 있다.

눈밭에서 어쩌다가 오두막을 마주치면 거기에 따뜻한 이웃이 있을지 괴물이 있을지 어찌 알까? 혹시나 하고 의심하면서도 결국엔 문을 열어보겠지. 이런 식으로 또 대출의 유혹에 흔들릴 수 있을 것 같다. ‘따뜻한 금융’이라거나 ‘든든’하고 ‘행복’을 나눠준다는 말로 나를 꾀면 난 괴물을 이웃으로 착각하게 될지도 모른다.1)정부 대출 장려로 가계소비 위축…쪼그라든 ‘서민 지갑’ 해결책은? 2015.06.09

jeongsin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정신 차려야 한다지만, 그렇다지만!!

“나라면 그렇지 않을 거야”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금융정의연대'(www.kofica.or.kr)에서 ‘청년 부채 실태조사’의 일환으로 인터뷰이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신원은 절대 비밀로 하며, 인터뷰 해주신 내용은 청년 부채 문제 개선을 위해 소중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서울에서 거주 or 직장생활 or 재학 중인 만 19~34세 미혼 청년들 중 한국장학재단 이외의 기관에서 학자금 대출을 받으신 분,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리신 분 등 카드값이나 대출금 상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든 분을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상담에 응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소정의 문화상품권과 함께 ‘재무관리상담 서비스’를 제공해드립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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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및 교정/ 저년이

글/ 컹니, 안물안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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