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사귀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남자를 붙들고 당부한다. “나는 이런 쪽엔 보수적이니까, 우리 진도는 천천히 나가자.” 그리고 남자는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며 여자의 손을 잡고 모텔 거리로 데려간다. 내 친구가 이런 얘기로 연애상담을 했다면 나는 당장 외쳤을 것이다. 헤어져!

240597989e0f3e190b6b1523c9c99921_AzW29FcY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에서는 이 명백하게 폭력적인 상황이, 남녀가 반전되어 나온다. 처녀귀신 순애는 떡 한 번 치고 한을 풀어 성불하기 위해 나봉선의 몸에 빙의한다. 그러고는셰프 강선우에게 들이댄다. “아 솊~ 우리 한번만 해요!” “아 그까짓 거 한 번 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강선우가 곤란해 하든 말든 입술을 내밀고, 끌어안고, 침대로 기어들어가기까지 한다. 시청자들은 ‘헤어져!’를 외치는 대신 광대를 한껏 올리며 박보영의 애교를 감상하고 강선우에게 말한다. “저 줘도 못 먹는 놈!”

남자는 늘 가해자, 여자는 늘 피해자?

성폭력에 있어서 ‘남자는 늘 가해자, 여자는 늘 피해자’라는 등식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극중 순애의 행동들을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인다. 일반적으로 성폭력에는 여남 사이의 사회적, 물리적 권력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을’인 순애가 ‘갑’인 선우에게 가하는 행동들은 이 권력관계를 거스르는 예외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시청자들은 이 낯선 구도에서 순애의 행동이 데이트 폭력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1)남자인 주방보조가 여자 셰프에게 순애의 방식 그대로 들이대거나, 셰프인 선우가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없는 주방보조에게 들이대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정말 불편하지 않은가?.

또 이같은 등식은  남성의 성욕은 당연한 것이며, 여성의 성욕은 수동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전제한다. 즉, 여성의 성욕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순애의 행동들은 폭력이 아니라 ‘여성의 적극적인 애정표현’, ‘성욕의 표출’ 정도로 미화된다는 거다. 드라마에서 자신의 성욕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20대 여성을 그린다는 것은 물론 고무적이지만, 성욕의 주장과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구분지어 생각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남자라면 응당 한 번 ‘하는’ 것을 – 특히나 저렇게 예쁘고 귀여운 박보영이 들이대는데! – 좋아해야 마땅하다는 인식 때문에 우리는 강선우가 당하는 것들이 일종의 성폭력/데이트폭력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순애가 빙의된 봉선을 방으로 돌려보내고 강선우가 하는 혼잣말은 이러한 편견의 작용에 힘을 더한다. “참을 수 있다, 참을 수 있어. 내가 누구때문에 이러는건데…!” 여자친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아끼고 지켜줘야’한다는 것도 진부하지만, 설령 선우가 정말로 순애와 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상호 합의되지 않은 스킨십을 강요하는 순애의 행동이 폭력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더더욱이, 이 드라마의 각본은 박보영의 귀여운 얼굴과 깜찍한 애교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성립된다. 순애가 예쁘지 않은, 보편적으로 호감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여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여자는 되고 남자는 안 되는’

그러니까 이 동영상은, 얼핏 보면 (성)폭력의 상황에서 여성이 가해자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미화되는 바로 그 등식을 비꼬는 것처럼 보인다. 문장만 놓고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 ‘여자가 하면 로맨스, 남자가 하면 변태’, ‘여자가 쳐다보면 유혹, 남자가 쳐다보면 성추행’. 압권은 마지막이다. 남자가 여자를 만지면 범죄, 여자가 남자를 만지면 “좋았어요?” 이쯤 되면 정말로 억울할 만 하다. 동영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댓글을 남겼다. ‘이제 사회적 약자는 남자’, ‘여성우월사회’, 그리고 ‘남자도 만지고싶다’! …?

 

3) 덧글캡처 3) 몬캐스트 덧글캡처

몬캐스트의 해당 동영상은 여남 모두가 함께 논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그리고 논의해 봐야 하는 이야기들을 잘못된 접근 방식으로 완전히 엉뚱한 맥락에서 풀어놓았다.

우선 동영상은 여남 문제의 사회적인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앞뒤를 자른 행동들만을 덩그러니 내어놓았다. 여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만큼이나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동영상은 여남 사이의 완력 차이와 만연한 데이트 폭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데이트 비용의 공평한 분담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지만, 동영상은 여남 사이의 불평등한 경제 격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동의를 얻지 않은 스킨십은 성별을 떠나 문제가 되지만, 동영상은 성폭력의 문제에 작용하는 여남 사이의 권력관계와 일반적으로 남성 가해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성폭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영상을 접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평소 여남 문제에 가지고 있었던 인식에 기초해 동영상의 행동들을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서로 겪어왔던 것들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는 동영상에 동조해 억울해하고 누군가는 동영상에 어이없어 빡쳐하는 차이가 생긴다.

깔 데는 거기가 아닌데

또한 이 동영상은 잘못된 성 인식에 대해 말하기는 커녕 이를 내재화하고 있다.

2015.8.12 일일이슈브리핑 #반도의_흔한_성교육

Posted by Misfits on Wednesday, 12 August 2015

지난 8월 논란이 되었던 교사용 성교육 지침 자료2)미스핏츠 일일이슈브리핑 <반도의 흔한 성교육>(2015.08.12.) https://www.facebook.com/misfitskr/posts/1650162845225328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나 익숙한 얘기들이 등장한다. “데이트 비용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남성의 입장에서는 여성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하기 마련이다.” 이런 성교육은 이성관계를 여성의 몸과 남성의 경제력을 교환하는 것으로 그리며, 데이트 비용을 남성에게 전가한다. “(남성의) 성에 대한 욕망은 때와 장소에 상관 없이 급격하게 나타난다.”, “여성은 한 특정 남성에만 성적으로 반응하는 데 견줘 남성은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성들과 널리 성교할 수 있다.” 이 자료를 제작한 곳은 엉뚱하게 까이는 여성가족부가 아니라 교육부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바로 그 동영상 내부에도 깃들어 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생긋 웃는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스캔’하고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불순할 것이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청자들이 아니라 동영상 제작자들이다. 동영상에서 깠어야 하는 건 바로 그 성 인식인데 말이다.

둘 다 아니에여...

둘 다 아니에여…

우리가 해야 하는 대답은 ‘둘 다 안돼요’ 다. 여자든 남자든 상대방을 음흉한 눈길로 훑으면 안 돼요. 벽치기나 억지 키스가 로맨틱하다는 건 드라마가 잘못 가르쳐 준 환상이에요, 여자든 남자든 안 돼요. 여자든 남자든 다른 사람의 몸을 함부로 만지는 것도 당연히 안 돼요. 그러나 동영상은 ‘둘 다 안 돼요’ 대신 ‘남자는 억울해요!’ 하고 말한다. 바이럴을 위해 웃자고 ‘과장한’ 편견과 여성에 대해 남성들이 가지는 피해의식이 뒤범벅된 이 동영상은, 잘못된 성 인식을 개선하기는 커녕 성 갈등만을 조장한다.

그러니까 여성우월주의 사회라고?

데이트 폭력, 성폭력의 문제에 대해 ‘여성우월주의가 만연한’ 사회가 ‘사회적 강자인’ 여성들을 두둔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착각이다. 엄밀히 말하면 여성은 성의 문제에서 배제당한다.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여성이 가해자로 지목받지 않는 것은 여성의 성욕을 없는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3)미스핏츠 일일이슈브리핑 <여성우위 세상에서 남자들은 정말 힘들겠다ㅠㅠ>(2015.09.01.)  https://www.facebook.com/misfitskr/posts/1657007727874173

<마녀사냥>의 패널들은 ‘그 남자가 술자리에서 저한테 스킨십을 했어요’ 하고 말하는 여자에게 충고한다. 그 남자는 진지한 게 아니라 그냥 한 번 해보려는 것일 수도 있어요, 조심해요. 그러나 ‘그 여자가 술자리에서 저한테 스킨십을 했어요’ 라는 남자에게는 그린라이트를 누른다(물론 남자인 상담자가 여성의 스킨십에 불편해 할 것이라는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야, 여자도 그냥 한 번 하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단 말야. <오 나의 귀신님>에서 시청자들이 웃어 넘긴 바로 그 모습, 몬캐스트의 동영상에서 그려진 그 도식은 이처럼 어디에나 있다.

‘여자는 되고 남자는 안 되는 행동’이라는 말이 억울하다면

‘여자는 되고 남자는 안 되는 행동’이라는 말은 여남 모두에게 불편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성우월주의가 도래한 세상에서, 이제는 사회적 약자인 남성들을 배려하고 ‘긍휼히 여겨’야 할까?4)이상언,중앙일보, 남자의 불행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52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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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헉…한국 남자 너무 불쌍하다…헉…너무 안됐네…

이런 것들이 불편하고 억울하다면 여남 모두에게 규정된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해 함께 말해야 한다. 박력있게 여자를 휘어잡아 밀어붙이는 ‘남자다운’ 모습의 맞은편에는 부끄러워하며 이를 받아들이는 ‘여성스러운’ 모습이 존재한다. 여성과 남성 양쪽을 옭아매는 등식에서 남성만 쏙 빠져나갈 수는 없다. 여성들이 여성성이라는 스테레오타입에서 해방되고 여성의 성욕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때, 남성들 역시 남성성에서 해방되고 남성의 성욕을 다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여자가 더 조심했었어야지” 라는 말이 사라지려면, “남자는 다 늑대니까 조심해” 라는 말 역시 사라져야 할 테니까.

 

편집 및 교정/요정

글/다홍

   [ + ]

1. 남자인 주방보조가 여자 셰프에게 순애의 방식 그대로 들이대거나, 셰프인 선우가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없는 주방보조에게 들이대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정말 불편하지 않은가?
2. 미스핏츠 일일이슈브리핑 <반도의 흔한 성교육>(2015.08.12.) https://www.facebook.com/misfitskr/posts/1650162845225328
3. 미스핏츠 일일이슈브리핑 <여성우위 세상에서 남자들은 정말 힘들겠다ㅠㅠ>(2015.09.01.)  https://www.facebook.com/misfitskr/posts/1657007727874173
4. 이상언,중앙일보, 남자의 불행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524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