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일상이 무척 불편하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다. 무언가를 알면 알 수록 내 일상은 더더욱 불편해졌고 이 사회에 대한 대책 없는 불안감과 불신만 커졌다. 나는 나만 불편할 수는 없어서 그러기엔 왠지 억울해서 계몽주의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교과서에서 ‘계몽주의’라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의 생경함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자본주의, 자유주의, 실리주의… 온갖 주의(-ism)에 대해 배워가던 시기였지만 계몽주의는 아무래도 이상했다. 찝찝한 마음에 뒤늦게 사전에서 계몽의 뜻을 찾아보니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이라고 했다.

아니 대체 누가 누굴 가르쳐! 계몽의 주체가 불특정 다수이어서 그런지 유난히 ‘계몽하다’는 동사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차라리 ‘계몽당하다’ 혹은 ‘(누군가를) 계몽시키다’ 같은 표현이 더 어울리는 듯도 하다. ‘가르쳐서 깨우침’이라는 표현이 주는 꼰대스러움 탓에 ‘계몽’이라는 단어에서는 어떤 적극성이나 주체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익명의 힘센 계몽주의자

지금의 한국 사회는 믿고 싶지 않거나, 믿을 수 없겠지만 숱한 계몽의 역사가 빚어낸  산물이다. 내 마음에는 영 차지 않고 발전은커녕 후퇴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다 잘되라고 그런 거’다. 인권을 훼손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그 어떤 어마무시한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다 우리(나라) 잘 되라고 그런 거다. 혹은 뇌물을 받고, 로비를 했다 하더라도, 심지어는 나라를 팔아 먹었어도 그것 역시 어떻게 좀 잘 해보려고 그런 거다. 다들 잘 해보려고 했고, 잘되라고 그랬는데 도대체 우리나라는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됐을까.

물론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도 가~~ㄴ혹 있다

물론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도 가~~ㄴ혹 있다 (편집자주:계’몽’…)

그건 계몽이, 적어도 우리나라의 계몽이 대개 ‘꼰대’들에 의해, 조금 더 직접적으로는 힘이 세고 인습에 젖어 있으며 때때로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조금 더 배운 사람이 덜 배운 사람을, 생각이 합리적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계몽한 것이 아니라, 힘이 센 사람이 힘이 약한 사람을 계몽시켰기 때문이다.

대체로 인습에 젖어 있으며 권력 수단을 쥐고 있는 이른바 ‘배운 자들’, 즉 기득권층은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실제로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해도 꾸준히 계몽‘시켜’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옳다’고 여겨진 가치가 바로 유교에 기반한 여성혐오다. 그 결과로 지금의 ‘유슬림’이 탄생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계몽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유슬림. 대번에 봐도 유교와 무슬림이 떠오르는 단어 조합이다. 아니 이렇게 환장할 단어가 있다니!

환장하겠다

환장하겠다

최근 페미니즘 담론이 활성화되면서 부쩍 눈에 띄는 신조어다. 유교 깊숙이 뿌리박힌, 그래서 여성혐오인지도 몰랐던 여러 사회 기제를 무슬림에 빗대 꼬집는 말이다. 사실 현실에서 마주하는 여성혐오는 유슬림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막막함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전히 드센 여자로 비춰지기 마련이고, 맘충1)편집자주: 신조어로, 무례하고 이기적인 젊은 부모들, 특히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방관하는 젊은 엄마를 지칭하는 말이다. 관련 기사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128283,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 등 무분별한 성차별적 호칭이 판을 친다. 그럼에도 지금의 현실이 희망적인 건 이제 사람들이, 그게 소수건 다수건, 이런 호칭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의 계몽주의자

이러한 호칭들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이제야, 아니 이제라도 조금씩 깨닫게 된 건 정말 오롯이 ‘페미니스트’ 덕분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고백하건대 나도 ‘페미니스트=유난스러운 여자들’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부끄럽지만 조금 변명을 해보자면 페미니즘 담론이 활성화 되기 전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오해가 바로 ‘유난스러운’과 ‘여자’라는 편견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편견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는 엠마 왓슨의 UN 연설, 혹은 주변 페미니스트들의 설명, 학교의 교양 수업 등일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전인류적인 인권 신장의 목소리에서 가장 고무할만한 점은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을 ‘계몽한다’는 비교적 당연한 명제다. 페미니즘을 잘 알고, 기꺼이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가르쳐서 깨우치’고 있다는 것이다. 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감히 계몽시켰던 것, 혹은 주입시켰던 것과는 분명 다르다.

우리는 이제 오랜 역사동안 권력 집단이 우리에게 양성평등이라고 계몽시켰던 숱한 가치들, 대표적으로는 군 병역 문제 같은 것들이 진짜 양성평등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한 얼핏 남성우월주의처럼 보였던 유교 사상이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 역시 옥죄고 있었다는 것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모두, 페미니스트들 ‘덕분’이다.

너, 나, 우리. 기꺼이 불편해지자

우리는 그간 우리가, 또 사회가 페미니스트에 붙여 온 부정적인 수식어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일부 대중들이 ‘꼴페미’라는 단어로 페미니즘을 깎아내리는 것과 달리 ‘진짜’ 페미니즘은 여성이나 남성 한 쪽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나 역시 그랬지만 지금껏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지적받는 일, 나아가 내가 틀렸다고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어렵고 불편한 일을 모두가 해내야 하는 이유는 페미니즘이 우리 모두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계몽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습에 젖어있는 우리를 ‘가르쳐서 깨우쳐 줄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인종주의가 구습을 넘어 차별과 폭력의 가치로 여겨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성차별주의 역시 앞으로 오랜 투쟁의 역사를 기록해갈 것이다. 하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알고 주장하게 된다고 해서 나의 권익이,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페미니스트의 숫자에 비례해 향상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앞으로의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불편함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예컨대 폭력인지 몰랐던 것을 폭력이라고 인지한 뒤의 불편함 같은 것 말이다.

편집자주: 이제 난 깨달았어 그것도 폭력이었던거야

편집자주: 이제 난 깨달았어 그것도 폭력이었던거야

나 역시 친구가 무심코 한 “걔가 여성스러운 성격은 아니지”라거나 “남자애가 왜 그렇게 쪼잔하냐”는 말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사람이네”라고 하지 않고 “이상한 여자네”라고 하는 흔한 사람들의 화법도 참을 수 없게 불편했다. 남성과 여성이 주어로 등장하는 말은 대체로 틀렸거나 신빙성이 낮다고 생각하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말에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이 사회에서 마구잡이로 뚜드려 맞는 걸 지켜보는 심정은 처참했다. 아내는 존댓말을 쓰는데 남편은 반말을 쓰는 드라마 속 설정도 언젠가부터 불편하게 다가왔다. 페미니즘을 알게된 후, 그러니까 페미니스트들이 나를 계몽한 후, 내 일상을 둘러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언어 폭력처럼 다가왔다.

나는 나를 둘러싼 여성혐오를 깨닫는 한동안이 무척이나 불편했고, 지금도 엄청나게 불편하며, 앞으로도 불편할 예정이다. 그럼에도 난 이 불편함이 기껍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불편했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화를 냈으면 좋겠다. 반성은커녕 객관적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조차 너무 버거운 지금의 여성혐오가 사람들을 잔뜩 화나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사회의 ‘유슬림적 기제’가 쫓겨나길 바란다. 그것이 내가 어느 날 문득 계몽주의자를, 또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고 싶어진 이유다.

 

편집 및 교정/요정

글/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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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집자주: 신조어로, 무례하고 이기적인 젊은 부모들, 특히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방관하는 젊은 엄마를 지칭하는 말이다. 관련 기사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128283